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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일본의 기타리스트 후쿠다 신이치의 바흐 연주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연주는 마치 피아노의 굵은 현을 직접 쓰다듬어 연주하는 것 같은 음색이군요. 마키노 사토시가 연주하는 것도 이렇겠죠. 부드럽다가도 강인하다가 슬며시 다가와 감동을 주는 그런 연주일 거예요. 소설 속의 인물이니 실제의 인물을 통해 상상해봅니다. 마키노와 요코와 파리에서 바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둘은 사랑하고 있었어요.
마티네란 프랑스어의 마르탱(낮)에서 온 단어로 보통 저녁에 공연하는 오페라나 뮤지컬, 음악회 등의 흥행을 위해 낮에 공연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간 흥행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마티네의 끝에서>의 주인공 마키노는 천재 기타리스트입니다. 스승님의 여러 제자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지요. 소설이 시작할 무렵, 그는 이미 무척 유명한 기타리스트였는데요. 이 소설에는 그가 연주하거나 언급하는 다양한 음악들이 등장합니다 제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BGM이 떠오르는데, 대개 가장 마지막에 언급된 곡이 다음 음악 제목이 나올 때까지 뇌리에 떠돕니다. 어울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만일 영화였더라면 OST 공급을 위해 저작료를 많이 내야 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수록된 음악들 모두를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알고 있는 곡들,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속에서 느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못했는데 - 아니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 자체를 몰랐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건 아마 게이치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러니 그는 이 소설을 썼고 나는 읽었으니, 앞으로 그 음악들 중 몇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이라는 기억을 안고 가겠지요.
얼마 전 또다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IS에 의한 것이라는데, 남겨진 자,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는 너무나 커, 생존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보다는 죄책감이 더 크다고 합니다 <마티네의 끝에서>의 요코도 그렇습니다. 바그다드 취재 도중 경험한 테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기에 충분했죠.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마키노와 요코는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어떤 영혼의 이끌림 같은 것이라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으론 부족합니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작별했습니다. 처음 만나 별로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기에 사랑을 말하기엔 경솔하다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마키노는 자신의 마음을 전했죠. 하지만 요코에게는 결혼을 앞둔 약혼자가 있었기에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세 번째 만났을 때에, 마키노는 음악적 슬럼프에 빠져들고 있었고, 요코는 테러의 위험을 겪은 후였습니다. 불안정한 그들이었지만 이번에야말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요코는 약혼자 리처드에게 이별을 고하고 마키노를 선택했습니다. 범 지구적인 원거리 연애를 하는 그들은 스카이프가 오작교였는데요. 21세기라 다행입니다. 휴대폰 로밍 서비스도 있고, 인터넷 메일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질투나 이기적인 마음은 세기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닌가 봅니다. 요코와 마키노가 일본에서 만나기로 한 날, 마키노의 비서 겸 매니저인 미타니 때문에 일이 크게 틀어지고, 그로 인해 둘은 헤어집니다.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심리 상태가 아니었기에, 게다가 구차하게 따져드는 성격들이 아니었기에 미타니때문에 생긴 오해를 스스로의 고민을 통해 마음을 정리합니다. 적어도 한 번쯤 직접 물어보지 않는 요코 때문에 답답했고, 미타니 때문에 울컥했습니다. 마음을 주고 있던 마키노가 요코와 사귄다는 사실에 그녀가 취한 행동은 깊이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코와 미타니의 대화와 데이트는 뭔가 전문적이 대화가 오고 가서 제가 낄 자리가 없는 것 같다고 느꼈었거든요. 그들의 사이에서 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마키노도 그런 느낌이었나 봅니다. 뒷자리에서 마키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했던 건 그의 옆에 누구도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누군가가 그 옆을 차지하려 한다면, 그건 자신이어야 한다는 순간적인 욕심이었을 겁니다. 더 이상의 조연은 싫다라는 감정이었겠죠. 하지만 그런 건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미타니의 행동에 화가 났습니다.
미타니와 요코는 각자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만나기까지는 아픈 시간들이 필요했습니다.
지금까지 단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깊이 사랑했던 사람...... 음악이 앞으로 내달려갔다. 이 한때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녀는 기도했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기를.
-p.480
히라노 게이치로는 사람의 심리를 심층 분석해서 드러내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걸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독자인 저는 주인공이 되어, 조연이 되어 그들의 심리를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단순히 로맨스 소설로 생각해 스토리라인만을 찾는다면 진정한 맛을 느끼긴 어려울 것입니다. 읽다가 잠시 눈과 손을 멈추고 클래식 기타로 연주하는 곡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이 어떨까요? 마키노의 연주곡 중 하나인 킬링 미 소프틀리를 추천합니다. 더불어 아랑후에즈 협주곡도요. 저 역시 30여 년 전부터 좋아했던 곡이거든요. 그리고 진한 커피와 함께 읽는다면 이 소설을 맛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달콤하지는 않으니 부디 쓰디쓴 커피로 준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