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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평점 :
현재 잘 나가는 대중문화 평론가 현수빈이 유년 시절에 살았던 다가구 주택을 추억합니다. 일곱 살이었던 그녀의 기억은 어렴풋하고 순서가 뒤죽박죽이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남자친구인 박우돌이 기억을 보충해주고 블로그에 당시 함께 살았던 사람을 찾는다는 팝업도 띄워주는 등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하는데요. 라일락 하우스라고 부르기로 한 그 집에서 함께 살았던 우돌이 처음부터 그녀의 유년 시절 추억하기 칼럼을 반대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모든 과거가 다 들춰지는 게 싫었다면 말이죠. 가난했지만 알콩달콩 살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만으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은 함께 살던 대학생 조영달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칼럼을 쓴 그날부터 과거가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일곱 살 여자아이가 알았던 과거와 어른들이 알고 있던 과거, 그리고 진실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6학년 때였나... 저도 연탄가스를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 서너시쯤 연탄을 갈고 방으로 들어와 잠이 들었는데요. 아침 여섯 시쯤 알람을 끄고 일어나려니 도저히 일어나지지 않더군요. 어지럽고, 메스꺼운 것이 도저히 아침을 준비할 수 없었어요. 저쪽 옆에서 자던 동생을 깨워서 세수부터 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누나가 아파서 아침을 못 줄 거 같으니까 일단 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요. 그런데 세수하러 나가던 동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 피아노와 라면 박스에 몸을 와당탕하고 부딪혔다더군요. - 쓰러졌고, 그 소리에 아빠가 안방에서 뛰어나오셨어요. 이러저러하다 말씀드리니 큰일 났다며 연탄가스를 마신 거 같다고 하시고선 덧문과 창문을 모두 열고 바깥 방으로 나와 누우라고 하시고 연탄보일러를 살피시더군요. 살피신다고 해도 워낙에 기계치에 몸쓰는 일은 하나도 못하는 분이라 그냥 불문을 살피고 뚜껑을 잘 닫는 정도였지만요. 이유는 모르지만, 어디선가 가스가 샜고, 가스가 들어오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제가 제일 많이 들이마셨나 봅니다. 아휴. 그때 가스만 안 마셨어도 엄청 똑똑할 뻔했는데.
당시엔 주요 난방재가 연탄이었던 만큼 사고도 참 많았습니다. 그놈의 일산화탄소는 동치미로 해결이 안 되는데, 희한하게 김치 국물이나 동치미를 마시고 나면 좀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플라세보효과를 누릴 새도 없이 조영달은 그렇게 죽어버렸고, 그의 죽음은 자살이니 사고니 말이 많았었지만, 당시엔 자살로 수사가 종결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모종의 살인 음모 같은 건 없었지만, 조금씩 어긋난 무언가가 살의를 부추기기도 했고, 의혹도 낳았으며 오해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라일락 하우스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미심쩍은 부분 하나씩을 안았지만,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모두 잊혀가려던 중, 천진난만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캐릭터 현수빈이 나타나 과거를 열어젖히려 합니다. 다시 불안해지는 사람들. 과거와 마주한다는 건. 몰랐던 일을 알게 된다는 건. 새로운 비극을 낳을 수 있다는 걸 현수빈은 몰랐습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에선 1980년대 서민의 생활이 제대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것들이 끄집어내졌는데요. 특히 골목길에 있던 콘크리트 쓰레기통이 그러했습니다. 제주로 이사 왔을 때, 신시가지였던 탓에 그런 쓰레기통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의 클린하우스와는 다르지만 뭔가 산뜻한 쓰레기 버리는 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학교에는 그런 게 있었어요. 좀 커다란. 소각장도 있었고... 콘크리트 쓰레기통에 관한 묘사를 읽는 순간, 미화원이 철제 삽으로 쓰레기통 안을 긁는 소리와 함께 그 냄새까지 화악하고 떠오르는 겁니다. 서울 시범아파트에서의 더스트 슈트와 함께요. 소설을 읽으며 80년대에 정말 그 정도로 못 살았던 건가 하는 생각에 기억을 마구 더듬어 보는데, 기억이 안 나요. 저는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을 갖다 버렸거든요. 딸아이는 다섯 살 때 살던 집의 구조도 기억해 내는데, 저는 기억나지 않아요. 버리고 싶었던 기억이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라일락 하우스의 사람들도 그랬겠지요. 버리고 싶었던 기억이었고, 버렸던 기억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