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긴 싫고
장혜현 지음 / 자화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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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말씀하셨죠. '넌 언제 어른 될래?' 
못 입게 된 청바지와 낡은 셔츠를 이어 붙여 만든 크로스백을 보고선 그러시더군요.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실 줄 알았는데. 아마 제 취향이 어려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엄마는 길가에서 예쁜 꽃을 발견하고 호들갑 떨며 좋아하는 소녀 같은 분인지라 제가 엄마를 닮았다면 빨리 어른이 되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엄마가 던진 그 물음표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전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가능하면 피터 팬으로 살고 싶은데 제 삶이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간간이 사고를 쳐가며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나이만 먹어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을 반납하고 어른처럼 살아야 했던 그 시기에서 정신 연령의 시계가 멈춰버린 걸까요? 이런 엄마를 둔 탓에 제 아이는 도리어 어른스러워져버렸고 진보 성향을 띤 보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보수 성향의 진보였던가. 미래를 염려하며 미친 듯 수학 문제를 풀어대는 아이의 옆방에서 저는 여전히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걸까 사색합니다.

<어른이 되긴 싫고>의 장혜현 작가도 어른이 되긴 싫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어떤 것이 어른인가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처음부터 어른이 되기 싫었던 건 아니고, 어린 시절의 내가 그랬듯이 어렸을 땐 서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서른을 만나고 나면 어린 시절 꿈꿨던 그것과는 동떨어져있음을 깨닫죠. 작가는 여행을 통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생각합니다. 
 전작 <졸린데 자긴 싫고>보다는 <어른이 되긴 싫고>가 제게 더 가까운 에세이였습니다. 여행과 사진을 통해 작가의 사랑과 아픔, 치유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엔 나이 차 많은 언니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사랑하고 아프던 시절이... 그러나 이 에세이 <어른이 되긴 싫고>는 작가가 느끼고 생각한 것이 독자에게도 적용되어 나 자신의 이야기로 함께 했습니다. 에세이는 감정의 흐름을 타고 의미가 부여되며 사색합니다. 전작보다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일상에서의 생각이 주를 이루지만 사랑과 여행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좀 더 생각이 많아졌고, 문장은 익어갑니다. 그러고 보면 어른이 된다는 건 '생활'이라는 것에 조금 더 깊게 들어온다는 뜻일까요. 그게 어떤 것일지는 몰라도 작가가 말한 것 처럼 '잦은 폭우에도 난파되지 않을 견고한 배 한 척이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기를 기도하는것, 그 배를 이끌 수 있는 다정한 선장이 내가 되는 것(p.44)' 을 염원합니다. 

'어른'에 대한 각자의 정의를 무엇으로 품고 있느냐에 따라 이 에세이는 다르게 읽히겠지요. 아마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비뚤어지지는 마세요. 이 책은 자기 계발서도 아니고, 사회교육 책도 아닌 에세이니까요. 장혜현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있는 에세이입니다. 읽고 함께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신만의 노트에 적으면 좋지 않은가요.


그러니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른의 기준을 남의 시선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닌
나의 행복으로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 해도 행복의 주체가 내가 되면 된다.
그리고 본인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
혹 오답이 나오더라도 그것 역시 좋은 어른의 지름길일 테니.
-p.6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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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족의 왕 마쓰시타 고노스케 기업스토리 9
이와세 다츠야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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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 기업가들도 좋거나 나쁜 일로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만 압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경제, 경영, 정치 같은 걸 잘 모르거든요. <혈족의 왕> 표지의 한일자로 다문 입과 아련한 눈빛의 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학창시절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듣기도 했죠. 조용할 때 쉬쉬쉭하는 플레이어 모터 소리가 들릴까 봐 라디오를 들었습니다만 평소에는 좋아하는 가수의 테이프나 복사 테이프를 듣곤 했습니다. 가장 처음 선물 받았던 카세트 플레이어가 파나소닉 카세트 플레이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뒤 삼성, 소니, 아남의 것으로 바뀌긴 했지만.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바로 그 파나소닉의 창업자입니다. 전신인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라고 하면 더 정확하겠지요. 쌀투기로 파산하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심부름 꾼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열한 살의 나이에 딸린 식구가 많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경제를 비롯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는데요. 그 중압감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무척 하고 싶은 게 많을 어린 나이었으니까요. 
심부름꾼과 점원 시절을 거쳐 20대 초반, 아내와 가내 수공업으로 소켓을 개발해 판매했는데요. 일반 소켓에 이어 쌍소켓도 개발해 판매했습니다. 초반엔 주먹구구식으로 경영을 하는 바람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만 점점 발전해 포탄형 자전거 램프를 개발 판매한 일로 대성공을 거두지요. 안일한 경영과 1차 세계대전 후 1920년대의 공황 때문에 자금 부족으로 고생했던 그가 역경을 잘 이겨내고 1924년 9월 이후 이 포탄형 램프를 대히트친 일로 마쓰시타 전기의 기초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저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일제 강점기에 진행되었던 군수사업에 관해서는 그가 고생했던 일에 그다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큰 그림을 그릴 줄 몰라서 그런 건지. 그 시대에 관한 것만큼은 - 더욱이 '군수'라거나 '전쟁 사업' 같은 건 용납이 안돼요. 일본인 입장에서는 황군이 어쩌느니 하면서 자국의 승전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게 당연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기분이 나쁜 것도 당연한 일이잖아요. GHQ( 일본식 표현. 서구에서는 SCAP를 사용.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제재를 받아 고생했더라도 안타깝다거나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소설이라서 감정적인 부분을 잘 요리했더라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평전이니까요.  

미쓰시타 고노스케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지만 정신 차리고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이 아니라 평전입니다. 다소 건조한 건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자칫 우상화할까 저어한 저자의 의도인 것인지, 대체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고 서술하고팠던 것인지,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 모두를 드러내서 '경영의 신'이 아닌 혈족을 부흥시킨 자수성가 기업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소설에 익숙한 제 독서력의 영향도 있겠지만 초집중하지 않으면 집중력이 흩어집니다. 인물이 많이 등장하고 회사명, 지명, 제품명 등이 잔뜩 나와 잠깐 방심하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반드시 메모 준비를 하고 읽으시길 권합니다. 

책에서는 그의 도전 정신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조금 위태롭다고 생각하더라도 이거다 싶은 것에는 과감히 뛰어들고, 밀어붙이는 역량이 좋았습니다. 이를테면 도시바가 일본은 가난해서 TV를 살 수 없다고 한 반면, 마쓰시타는 농가를 방문, 적극적으로 판매를 하는 식으로 독특한 판매전략, 면밀한 마케팅, 역발상, 끈기, 독함 등이 기업을 끌어간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다만 처남이 분리해서 나간 산요 전기와의 관계는 뭐가 이런가  싶을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산업 스파이니 뭐니 난리가 날 정도의 일을 대범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결국 세탁기 개발 판매 사건으로 사이가 악화되는데요. 어쨌든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인들이 흔히 하는 잘못인 작은집 살림 차리기도 했더군요. 그건 나중에 후회했다지만 그러면 뭐 합니까. 본부인과 작은 부인,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다 상처가 되는걸. 

책을 읽고 제가 경영을 할 수 없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전, 마쓰시타의 엄격한 경영 방식이 싫습니다. 도와준 사람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고객의 목소리를 들어라!"라는 사훈이 있는 건 좋습니다만, 은혜를 잊지 않는 것만큼 좋지 않은 일도 절대 잊지 않는 모양입니다. 측근이 월권을 한다 싶으면 - 사소한 보고 누락이라도 - 두고두고 승진에 영향을 준다거나 퇴출시키기도 합니다. 전 한두 번의 기회를 줄 텐데. 그 한두 번이라는 마음가짐이 기업을 무너뜨리는 거겠죠. 경영인은 좀 독할 필요가 있는데, 전 나름 강한 것 같아도 사업하기엔 무르거든요. 사업가였던 아버지께서 제가 어릴 때 한 말씀이 있습니다. 열 명의 친구를 두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두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었는데요. 어딘가에 나왔던 말인 것 같은데, 어릴 때라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측근이었다가 크게 틀어진 사이토는 마쓰시타의 면면을 폭로해버렸는데요. 이런 건 좋지 않습니다. 기업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단점이 많다는 게 소문이 나면 사업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이 책 <혈족의 왕>은 한 기업인을 우상화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니 그를 따르면 너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는 식의 메시지 대신 마쓰시타 고노스케에 대한 일대기를 전해줍니다. 에디슨에 대해 좋은 점만 보아오다가 어느 순간 탐욕을 보았을 때 실망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이렇게 그냥 있는 그대로를 접하는 쪽이 낫지 않나 합니다. 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발명가가 아닙니다. 기업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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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넘 타운 기업소설 시리즈 9
니레 슈헤이 지음, 김준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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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경제를 전혀 모른다고 했지만 저는 타이쿤이나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깁니다. 소소하게는 음식점 경영부터 나아가선 부동산 운용이나 건설, 더 크게는 도시 전체를 만들어 가는 걸 좋아합니다. 음식점 경영 시뮬레이션은 제한된 시간 안에 고객의 니즈만 충족 시키면 되고, 부동산 게임은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물건을 사고팔아 현금을 많이 만들면 됩니다. 하지만 심시티 같은 게임이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무척 다양한 각도로 시 전체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죠. 최근엔 모바일 심시티도 해보았는데요. 머리가 아프고 눈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을 동반하지 않고 인앱 결제만 유도하길래 그만두었습니다. 가상의 도시를 운영하는 것도 보통이 아닌데 실제의 도시 혹은 마을을 책임진다는 건 대단한 일이겠죠. 리셋할 수도 없고 에디터를 통한 치팅도 할 수 없잖아요. - 자기만 쏙 빠져나가는 식의 리셋을 꾀하거나 일반인은 생각도 못할 치팅을 하는 거 같긴 합니다만.
그렇지 않고서야 비효율적인 짓을 할리가 없지 않나요. 무소용인 건물이나 홍보관을 세우거나 이상한 랜드마크에 억대 돈을 쏟아붓는 그런 짓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초(町: 일본의 행정구역) 장이 된 야마사키 테쓰로가 초를 돌아볼 때 저도 함께 한숨을 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아도 비슷한 꼴을 여러 번 보았으니 말입니다. 야마사키 테쓰로 이름이 나와서 말인데요. 이 남자는 종합 상사인 요쓰이에서 식료 사업본부 곡물거래부 부장으로 근무하던 중 어처구니없는 일로 진급의 길이 막힌 것도 모자라 퇴출될 위기에 처했습니다만 마침 고향의 친구가 초장으로 출마해달라는 부탁을 술김에 허락하는 바람에 결국 미도리하라 초 초장이 되어 인생 역전인지 막장인지 아무튼 그런 것에 처하게 된 비운 - 혹은 행운의 남자입니다. 마지막까지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으므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습니다. 지자체의 수장이라면 대단한 일인데 - 얼마 전 저희 동네 이장 선출 때도 열기가 대단했거든요.- 어째서 불운이니 행운이니 하느냐면, 이 마을은 15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부채를 지고 있는 대책 없는 곳이니까요.

장점을 찾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만 합니다. 어느 누구도 망해가는 마을의 초장이 되려 하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서 야마사키에겐 쓸모없는 공공건물들도 살리고 지역 경제도 살리는 묘안이 떠올랐으니 그건 바로 '실버타운'의 유치였습니다. 
지금은 실버타운 입주 비용이 일반인에겐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금액이라는 걸 알기에 포기했지만 만일 합리적인 수준의 타운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는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실버타운엔 친구도 많을 테고, 문화 센터도 있을 거고, 봉사할 곳도 있을 테고, 텃밭 같은 소일거리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요양원이나 요양 병원비도 노인장기요양보험공단에서 지원을 받는다 해도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므로 자식은 역시 많아야 부담이 덜어진다는 걸 깨닫게 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노인의 거취나 의료복지 쪽에 눈이 갔는데, 초장이 된 야마사키는 모두를 살리는 방법으로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기존과 차별화된 실버타운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하고 싶다고 추진하기만 하면 쭉쭉 진행되는 기획이겠습니까. 더욱이 150억이라는 빚이 있는걸요. 150억 원도 아니고 150억 엔인데.

제주 역시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지만, 바로 어제 23년 만에 1321억 원을 모두 상환하여 빚이 없는 지자체가 되었습니다. 만세. 2010년에 5724억이었던 걸 7년 만에 전부 상환했다니 칭찬할만하지만 재정을 메꾸는 쪽으로만 방향을 잡은 것 같아 씁쓸합니다. 제가  제주에 입도한 것도 2010년인데, 제가 지내온 7년 동안 도민의 삶이 윤택해졌나 하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 아, 내년부터 고교 무상교육이 시작됩니다. 그건 또 칭찬하고 감사합니다.
어쨌든. 야마사키 같은 기획을 내고 거의 모든 이가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정녕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일까요. 야마사키의 경우엔 방해요소나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었던 걸까요. 아무리 뜻이 좋고 열의가 있다 하더라도 실제의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하고 나서는 이들도 있을 테고 적극적으로 이권을 챙기는 이들도 있을 텐데. 그런 면에서는 좀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았나 합니다.

기업소설이라는 분야는 생소했기에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했었습니다. 그러나 괜한 고민을 했더군요.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흘러가는 걸. 제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사회파 소설보다는 좀 더 논리적이며 현실에 가깝게 흐른다는 차이 정도만 있을 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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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투 더 워터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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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은 15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기독교 중심의 광신적이며 공공에 노출된 살해 행위였습니다. 이교도를 박해하기 위해 시작된 이 마녀사냥, 마녀재판은 기독교의 기득권을 굳건히 하기 위해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자를 악마와 거래한 사람으로 규정, 잔인한 고문과 처벌을 가했습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정점을 찍은 이 행위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마녀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처단할 정당한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니까요. 마녀는 남들이 모르는, 몰라도 되는 걸 아는 여자였을지도 모르고,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여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기타 여러 가지, 그러니까 갖다 붙이면 붙는 대로 그녀들은 마녀가 되었습니다. witch 가 여자에 국한된 단어가 아니므로 남자 역시 그 화를 피할 수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witch는 마'녀'요, 그녀라고 표현하는 건 피해자의 상당수가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드라우닝 풀에서 여자들은 희생되었습니다.

<인투 더 워터>의 여자들도 그랬습니다. 드라우닝 풀에서 죽은 여자들의 사연을 조사하고 글로 쓰던 미모의 작가 넬이 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그날, 사람들이 각자 숨겨놓았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 형체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십 대 시절 외모가 남달리 빼어난 언니를 둔 탓에 비교당하며 놀림당하던 줄리아(줄스)는 언니의 남자친구에게 받은 큰 상처 때문에 물 공포증이 생겼습니다. 물에 빠질 뻔한 날, 언니는 자신을 구하려 물에 뛰어들었던 건지 고문을 하기 위해 따라 들어왔던 건지 그마저도 혼란스럽습니다. 쩍 벌어진 마음의 틈으로 계속 스며드는 물로 인해 어른이 된 지금은 언니의 연락마저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죽다니. 그것도 좋아하던 그 백퍼드의 강에서. 믿을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습니다.
넬의 딸 리아는 후회합니다. 엄마가 자신의 비난 때문에 자살했다고 여깁니다. 사람들에게 그 사연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다간 자신이 사랑한 친구, 지금은 세상에 없는 케이티의 비밀이 사람들 눈앞에 놓이게 되니까요. 죽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케이티의 비밀은 자신이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루이즈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케이티의 자살로 고통받는 자신의 영혼은 영원히 치유받을 수 없는 걸 알지만, 백퍼드 강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넬의 원고에 등장하는 건 원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어느 것도 타인의 손을 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넬을 찾아가 항의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션은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하며 사건을 추적합니다.  마을의 형사이기도 하고, 넬과 리아의 친한 지인이었던 그는 혼자 남은 리아가 안쓰럽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역시 백퍼드 강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어서 범인을 잡아 사건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케이티와 리아의 교장 선생이자 션의 아내인 헬렌, 션의 아버지 패트릭,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는 니키, 케이티의 남동생 조시까지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신참 형사 에린마저도요. 수많은 비밀이 얽힌 가운데 백퍼드의 강은 끝없이 흘러갑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면모를 고루 갖춘 <인투 더 워터>는 <걸 온 더 트레인>의 작가 폴라 호킨스의 신작입니다. 전작에서는 등장인물이 적어 아쉽다 했더니, 이번에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소설만큼은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무척 많이 등장합니다. 한층 더 촘촘해진 그물망 같은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건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했는데요. 날짜와 시점의 변화가 잦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며 다시 앞쪽을 뒤적이게 됩니다. 한 번에 쭉 읽으면 괜찮은데 나누어 읽는 사람이라면 펜과 메모지를 지참에 간단하게 기록해둘 것을 권합니다. 시점의 변화가 다양한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캐릭터에 빙의를 했다는 건데, 그러면서도 캐릭터의 개성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글을 쓰는 동안엔 다중인격이 되어야 했을 겁니다. 이 캐릭터가 되어 변명하고, 또 다른 캐릭터가 되어 분노했습니다. 자신만만한 넬이었기도 했고, 움츠러든 줄스이기도 했습니다. 굉장한 체력전이었을 것 같아요. 다만, 그렇기에 독자 역시 체력을 소모해야 합니다. 다채로울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도대체 왜, 누가 어떻게 넬을 살해했을까. 자살이라면 그녀가 늘 하고 다니던 엄마의 유품 팔찌는 어디로 갔을까. 케이티는 왜 죽은 걸까. 그리고 과거의 망령들은 그녀의 죽음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혹시 편히 잠들고 싶었던 자신의 영혼을 뒤흔든 넬이 미웠던 걸까. 모든 것이 궁금해 빠르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소설 <인투 더 워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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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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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잔잔하게 시작됩니다. 일상에서 일어날 일이라 생각하면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일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 소설 <마쉬왕의 딸> 전체를 생각한다면 아주 평범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4살의 소녀를 납치해 13년간 감금한데다가 그 사이에 아이까지 낳게 하여 가족'처럼' 살았던 남자가 체포되어 수감되어있던 중, 교도관을 죽이고 탈옥했다는 게  전부거든요. 스릴러나 미스터리 같은 곳에선 흔한 설정이잖아요. 이 정도는. 그의 딸 헬레나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아이와 남편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킵니다. 보통의 인간이 아닌 아버지를 잡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합니다. 헬레나는, 나는 '마쉬왕의 딸'이니까요. 크레센도 에다니만도.(crescendo ed animando)

전기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용맹한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어린 소녀 헬레나는 그들의 늪지대가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를 읽고 또 읽으며 막연하게 외부 세계를 그려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세상도 충분히 넓었기에 특별히 탈출을 꿈꾸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다섯 살 생일날 가까스로 재료를 찾아내어 케이크를 구워주려 했던 엄마보다도, 벌로써 우물에 갇혀 죽을 뻔한 그녀를 밤새 품어주어 살아날 수 있도록 했던 엄마보다도 자신을 가둬두고, 가끔은 족쇄도 채우던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가학적이고 폭력적이었음에도 비교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든 행동이 옳은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를 떠난 후 어른이 된 지금 바른 태도로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가 된 건 스스로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무기력해 아이를 보호해 줄 수 없었던 엄마와 폭력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양육의 바른 태도를 배울 수 없었을 텐데도, 어른이 된 헬레나는 자신의 아이를 사랑으로 잘 돌보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남편에게서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으로 돌아온 후, 성장과정이 많이 비추어지지 않았지만 조부모의 행동을 보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나타샤 캄푸쉬의 경우도 3096 일 동안 힘들었던 것 이상으로 세상으로 돌아온 후 힘들어했으니까요. 

어머니의 학습된 무기력은 아버지가 2주 동안이나 집을 비웠을 때에도 아이를 데리고 달아나거나 혼자 달아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어린 헬레나가 볼 때에는 얼마나 하찮아 보였을까요. 아버지는 헬레나를 데리고 다니며 사냥하는 법, 피를 빼는 법 같은 전사로서의 소양을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육체적 보호자(그녀가 보호를 받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지배자였습니다. 완전히 통제된 생활에서 반항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라 하면 자야 했고 먹으라 하면 먹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헬레나는 길들여졌고, 그런 것에 익숙했습니다. 늪지대의 지배자인 위대한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길이었습니다. 폭포 인근에서 우연히 다른 가족을 목격한 후 이매지너리 프랜드가 생기기 전까지는요. 그들은 헬레나가 태어나 처음 본 타인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리고 늑대 사냥에서 돌아온 날,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물 속에서 있었던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나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둘째, 아버지는 내가 안전한지, 내 마음이 어떤지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것이다. 셋째, 어머니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나에게 무관심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 세 가지는 아주 큰 깨달음이었다.
-p. 257

과거의 헬레나와 현재의 헬레나가 처음엔 부드럽게, 조용히 움직이더니 이윽고 급하고 강하게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독자인 내 머릿속에서는 열몇 살의 헬레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른 남짓의 헬레나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힘차게 달려나가고 있었습니다. 
후에 마쉬왕이라 불리게 된 남자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했습니다. 잔인하고 나르시시즘으로 뭉쳐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헬레나에겐 애정 어린 행동을 했을까요.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도 자기 새끼는 아낀다는 글이었는데요. 그건 부성애나 모성애 같은 애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 아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날이 온다면, 가차 없이 내다 버릴 수 있다는 거죠. 마쉬왕도 헬레나를 그렇게 생각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다만, 아버지가 헬레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헬레나가 아버지를 떠났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죠. 
직간접의 피해자였던 그녀는 훌륭한 '전사'였고, 그 전사를 길러낸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습니다. 그녀가 아버지를 떠날 준비를 한 건 무리의 알파가 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알파는 무리의 유일한 암컷을 지켜야 했습니다. 야생의 본능과 인간의 마음이 뒤섞인 그녀는 본능에 따라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아버지가 실은 납치 강간범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알파는 무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아버지를 사냥하려는 이유입니다.

크레센도 수비토(crescendo sub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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