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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족의 왕 마쓰시타 고노스케 ㅣ 기업스토리 9
이와세 다츠야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솔직히 말해서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 기업가들도 좋거나 나쁜 일로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만 압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경제, 경영, 정치 같은 걸 잘 모르거든요. <혈족의 왕> 표지의 한일자로 다문 입과 아련한 눈빛의 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학창시절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듣기도 했죠. 조용할 때 쉬쉬쉭하는 플레이어 모터 소리가 들릴까 봐 라디오를 들었습니다만 평소에는 좋아하는 가수의 테이프나 복사 테이프를 듣곤 했습니다. 가장 처음 선물 받았던 카세트 플레이어가 파나소닉 카세트 플레이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뒤 삼성, 소니, 아남의 것으로 바뀌긴 했지만.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바로 그 파나소닉의 창업자입니다. 전신인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라고 하면 더 정확하겠지요. 쌀투기로 파산하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심부름 꾼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열한 살의 나이에 딸린 식구가 많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경제를 비롯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는데요. 그 중압감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무척 하고 싶은 게 많을 어린 나이었으니까요.
심부름꾼과 점원 시절을 거쳐 20대 초반, 아내와 가내 수공업으로 소켓을 개발해 판매했는데요. 일반 소켓에 이어 쌍소켓도 개발해 판매했습니다. 초반엔 주먹구구식으로 경영을 하는 바람에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만 점점 발전해 포탄형 자전거 램프를 개발 판매한 일로 대성공을 거두지요. 안일한 경영과 1차 세계대전 후 1920년대의 공황 때문에 자금 부족으로 고생했던 그가 역경을 잘 이겨내고 1924년 9월 이후 이 포탄형 램프를 대히트친 일로 마쓰시타 전기의 기초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저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일제 강점기에 진행되었던 군수사업에 관해서는 그가 고생했던 일에 그다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큰 그림을 그릴 줄 몰라서 그런 건지. 그 시대에 관한 것만큼은 - 더욱이 '군수'라거나 '전쟁 사업' 같은 건 용납이 안돼요. 일본인 입장에서는 황군이 어쩌느니 하면서 자국의 승전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게 당연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기분이 나쁜 것도 당연한 일이잖아요. GHQ( 일본식 표현. 서구에서는 SCAP를 사용.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제재를 받아 고생했더라도 안타깝다거나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소설이라서 감정적인 부분을 잘 요리했더라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평전이니까요.
미쓰시타 고노스케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지만 정신 차리고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이 아니라 평전입니다. 다소 건조한 건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자칫 우상화할까 저어한 저자의 의도인 것인지, 대체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고 서술하고팠던 것인지,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 모두를 드러내서 '경영의 신'이 아닌 혈족을 부흥시킨 자수성가 기업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소설에 익숙한 제 독서력의 영향도 있겠지만 초집중하지 않으면 집중력이 흩어집니다. 인물이 많이 등장하고 회사명, 지명, 제품명 등이 잔뜩 나와 잠깐 방심하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반드시 메모 준비를 하고 읽으시길 권합니다.
책에서는 그의 도전 정신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조금 위태롭다고 생각하더라도 이거다 싶은 것에는 과감히 뛰어들고, 밀어붙이는 역량이 좋았습니다. 이를테면 도시바가 일본은 가난해서 TV를 살 수 없다고 한 반면, 마쓰시타는 농가를 방문, 적극적으로 판매를 하는 식으로 독특한 판매전략, 면밀한 마케팅, 역발상, 끈기, 독함 등이 기업을 끌어간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다만 처남이 분리해서 나간 산요 전기와의 관계는 뭐가 이런가 싶을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산업 스파이니 뭐니 난리가 날 정도의 일을 대범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결국 세탁기 개발 판매 사건으로 사이가 악화되는데요. 어쨌든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인들이 흔히 하는 잘못인 작은집 살림 차리기도 했더군요. 그건 나중에 후회했다지만 그러면 뭐 합니까. 본부인과 작은 부인,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다 상처가 되는걸.
책을 읽고 제가 경영을 할 수 없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전, 마쓰시타의 엄격한 경영 방식이 싫습니다. 도와준 사람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고객의 목소리를 들어라!"라는 사훈이 있는 건 좋습니다만, 은혜를 잊지 않는 것만큼 좋지 않은 일도 절대 잊지 않는 모양입니다. 측근이 월권을 한다 싶으면 - 사소한 보고 누락이라도 - 두고두고 승진에 영향을 준다거나 퇴출시키기도 합니다. 전 한두 번의 기회를 줄 텐데. 그 한두 번이라는 마음가짐이 기업을 무너뜨리는 거겠죠. 경영인은 좀 독할 필요가 있는데, 전 나름 강한 것 같아도 사업하기엔 무르거든요. 사업가였던 아버지께서 제가 어릴 때 한 말씀이 있습니다. 열 명의 친구를 두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두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었는데요. 어딘가에 나왔던 말인 것 같은데, 어릴 때라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측근이었다가 크게 틀어진 사이토는 마쓰시타의 면면을 폭로해버렸는데요. 이런 건 좋지 않습니다. 기업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단점이 많다는 게 소문이 나면 사업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이 책 <혈족의 왕>은 한 기업인을 우상화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니 그를 따르면 너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는 식의 메시지 대신 마쓰시타 고노스케에 대한 일대기를 전해줍니다. 에디슨에 대해 좋은 점만 보아오다가 어느 순간 탐욕을 보았을 때 실망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이렇게 그냥 있는 그대로를 접하는 쪽이 낫지 않나 합니다. 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발명가가 아닙니다. 기업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