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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지만 - 우울한 엄마여행자의 위로를 찾는 여행
진명주 지음 / 와일드북스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다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떤 엄마가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데리고 배낭여행을 떠났대, 동남아 그러니까 태국 같은 나라로 말이야. 숙소도 허름하고 교통편도 형편없는데 예약도 안 하고 아이를 그렇게 데리고 다녔나 봐. 게다가 설날이 끼어있는 두 달간이었다더라.
남편은?
저자가 여행길에서 만난 숱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아이도 그렇게 물었습니다.
응. 남편은 한국에서 그냥 회사일하고. 그런데 남편이 가는 걸 탐탁지 않아 했대.
나보다 더 고지식한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아이와 배낭여행은 아니지. 아이도 힘들고 엄마도 얼마나 힘들었겠어. 둘 다 행복했다면 관계없지만 그래도 아닌 거 같아. 게다가 명절이 끼어있다니. 며느리니까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남아있는 남편이 친지들에게 아내의 부재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고 변호를 해야 하는데 남편 입장도 생각해야지.
저도 크게 다른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생존을 위해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길을 나섰던 나는, 피시방에서 아이를 재운 적도 있고 하마터면 노숙자가 될 뻔했던 위기도 넘겼었던 나는, 아이와 함께 했던 여정이 여행이었다면 좋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거든요. 아이와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이었겠지하면서요.
그러나 이내 저도 그녀를 손가락질했습니다.
애를 너무 고생시키는 거 아니야? 외국에 나가서 고생하는데, 행복은 별로 보이지 않아. 방을 못 구해서 화나기도 하고 방치된 아이는 울기도 하는데, 이게 여행이야? 외국에서의 생고생. 우울을 이유로 아이를 동반한 도피는 아니었을까?
사기, 바가지가 난무하는 여행길. 심지어 방을 못 구하기도 하는 여정에 골치가 아파졌습니다. 거기에 아이까지 함께 있다니, 아이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저는 왜 이 여행이 즐겁지 않을까요.
그녀의 아이는 신났고, 외롭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즐거웠습니다.
모두가 비난하는 여행을 떠났다.
서른아홉 그 해, 여행을 떠났다.
현실의 늪으로부터, 그로 인한 긴 우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모두가 말했다.
현실을 견딜 수 없다고 해서 훌쩍 떠나는 게 말이 되냐고.
남들이 그럴수록 떠나고 싶은 욕구는 더욱 커졌다.
떠난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지만...
고난 속에 문득 피어나는 즐거움 같은 거, 이런 건 일상에도 존재하는 것일 텐데... 그걸 위해서 떠난 걸까. 여행길에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남편의 목소리와 싸웠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들었을까. 아이는 자라서 이 여행을 어떤 의미로 기억하게 될까.
어쩌자고 아이를 데리고 나와선.
그러다 문득, 거의 15년 전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나를 비난하던 낯선 이의 댓글이 갑자기 솟아올랐습니다.
대책 없이 아이를 데리고 나오다니 정신 나간 여자로구먼. 엄마 자격도 없어.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서로를 잘 살피고 누구보다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난, 그때의 일을 잊어버리고 다른 이들처럼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저자가 아이와 함께 한 여정은 그 누구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이 여행이 저자와 아이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는 그들의 몫이니까요.
아이와 단둘이 몇 개월씩 배낭여행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아이가 곁에 없었다면 소리 내어 엉엉 울었을 것이다.
-p.206
'아이는 지금, 여행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몸이 고단할수록 그런 의문이 자주 찾아왔다. 아이와 배낭여행에 나선 건 순전히 내 욕심이었다는 생각에 자책했다. 그러나 오늘, 낮에 다녀온 곳을 혼자 조용히 떠올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조금 안도했다. 어쩌면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금 이 여행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다시 힘을 얻는다. 어제처럼 오늘도, 다시 배낭을 둘러멜 힘을.
-p.210
혼자였더라면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거야.
네가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엄마는 길 위에서 숱한 눈물을 흘렸을 거야. 절망감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을 거야. 그런 엄마 곁을 지켜준 네가 고마워.
그것도 늘 즐겁고 유쾌하게 여행해줘서, 또 그렇게 여행할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p.282
저자의 이 목소리는 또한 나의 것이었습니다.
나 역시 내 곁을 지켜준 아이가 없었더라면 절망에 빠져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지켜야 할 것이 있기에 지금껏 살아왔으니까요. 저는 아이와 굉장히 긴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이가 커서 내가 아이를 지키는 건지, 아이가 나를 지키는 건지. 우리는 전우처럼, 친구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7년 전 여행기 속 7살 아이는, 어느새 사춘기 소년이 되었다. 이제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거나 부모에게 상처가 되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내가 변했듯 아이도 변했다. (...) 여행기를 다시 꺼내 읽는 동안, 그 시절 아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다정했던 나의 아이가, 사랑스럽던 나의 아이가, 내게 마구 달려와 안기는 느낌이었다.
-p.295
그리고 시크한 내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즐거웠다면 뭐.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