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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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학생 때, 그리고 고등학생 때까지도 우정 이상의 것을 느꼈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애가 참 좋고, 다른 아이와 더 친하게 지내는 게 너무너무 싫고 독점하고 싶었습니다. 이 마음이 쌍방통행일 땐 괜찮은데 가끔은 일방통행일 때도 있어서 슬픕니다. 그렇다고 나, 너 좋아해. 그러니까 다른 애랑 친하게 지내지 마.라고 말할 수도 없죠. 중2 때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나 역시 그 친구를 좋아했음에도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느냐며 거리를 두었었어요. 나중엔 다시 화해한 후 친하게 지냈지만 그 친구는 실업계로, 저는 인문계로 진학하면서 자연히 멀어졌죠. 중 3 때엔 여자가 무슨 인문계냐고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부모님과 싸우면서도 저와 함께 인문계를 가고 싶다는 친구도 있었어요. 그 친구와는 애틋하다기보다는 화음 같은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소프라노와 하이 소프라노였던 우리 둘은 운동장을 돌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 친구와는, 모르겠어요. 그때 그 친구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좋지 않게 절교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저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자해를 하던 친구도 있었어요. 한 번만 더 그러면 다시는 아는 체도 않겠다는 말에 자해를 멈추었지만, 이런 모든 감정들은 고3이 되면서 자연히 사그라들었던 것 같습니다. 여중과 여고를 거치며 누구나 그런 일을 겪는 건가요? 전 어쩌면 제가 애정 결핍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김세희 작가의 <항구의 사랑>의 배경은 2000년대 초반입니다. 저랑은 세대가 좀 차이나죠. 그래서인지 어쩐지 모르지만 여학생 간의 사랑에 약간의 성적 코드가 얹힙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반이라고 불렸습니다. 세이클럽 같은 데서 이반 모임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죠. 이반이라고 하면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밖에 몰랐던 제게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이반이라고 지칭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모든 이들이 스스로를 이반이라고 불렀던 건 몰랐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반드시 성별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늘 갖고 있었던 저는 이 책을 읽다가 조금 놀랐습니다. 사랑에는 성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책을 붙잡고 있으면서 자꾸 과거로 돌아가는 제게, 그리고 저의 친구들에게 그런 의미는 없었거든요. 서로를 아주 많이 좋아하더라도 손을 잡고 놀러 다니는 그 이상은, 독점하고 싶은 마음 그 이상은 없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반의 사랑을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누구의 성적인 문제를 제가 결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범죄는 안되지만 그들의 행위를 제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항구의 사랑>에 성적 코드가 약간 - 대부분 상상에 의한 것이지만 - 있지만 소설은 순수합니다. 그 당시의 순수했던 사랑, 그 무엇도 거리낄 게 없었던 사랑이 있었습니다.

2000년대 초 목포를 배경으로 한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로, 당시 유행했던 아이돌 팬픽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요. 그런 건 요즘도 여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을 게이로 만드는 거냐고 물었을 때의 대답이 이 책에도 있더군요. 다른 여자와 섹스하는 게 싫어서. 좋아하는 연예인의 섹스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저는 - 그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도 - 여전히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그들 나름대로의 무언가가 있겠죠. 역시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이돌 당사자가 그걸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하는 염려를 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제 영역이 아니라서.

<항구의 사랑>의 주인공 준희는 민선 선배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인희는 오랜 시간 동안 준희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른이 되어 각자의 길에서 걸어가게 되었을 때도 그때의 사랑은 무언가로 가슴에 남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정말 순수하게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으로 말이에요.

책의 종장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찡함은 없었는데, 작가의 말을 읽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밀려와서 뭉클해졌습니다. 어딘가에 있을 민선 선배가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읽어나가다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알아챈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아련해졌어요.

앞서 말한 친구들보다 한 학년 전,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는 몇 년에 한 번 겨우 소식을 듣는 사이가 되었는데요.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17년 전이로군요. 그때 그 친구가 그랬어요. "결혼식 때야 보게 되다니. 이러다가 다음엔 장례식 때 보는 거 아냐?" 드레스 차림의 저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러다가 정말 그렇게 될까 봐, 아니 장례식에서조차 못 볼까 봐 때로 두렵기도 합니다. 유명한 소설가와 결혼한 그 친구는 잘 살고 있겠죠? 그리고 혹시 내 글을 보면 자기라는 걸 떠올릴까요? 그렇다면 덧글 남겨줘. 친구야.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강물의 표면에 붙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물살에 고통스럽게 휩쓸려 다녔던 것 같다. 그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붙들려 실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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