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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읽는 이에 따라서 다른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자이면서 페미니스트라니,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에 대해 궁금했었지만, 이 책은 사랑 많고 부족한 - 세상에 부족하지 않은 부모란 과연 존재하는 걸까에 대한 의문은 뒤로 삼키고 - 아빠의 육아 분투기로 읽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성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온몸을 바쳐 육아를 하는,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데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집사람'으로서 '작은 집사람'을 양육하는 서한영교의 이야기였습니다.
물에 들어가지 않고는 수영을 배울 수 없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는 육아를 배울 수 없다.
-p. 187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상을 주장하며 과격한 언어를 쏟아내는 대신,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한껏 자신의 노력을 쏟고 있는 그의 모습이 좋았습니다.
세상은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화되어있고 각자의 성 역할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게 사실입니다. 능력의 차이, 힘의 차이에 따른 활동의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이런 일을 하면 안 되고 여자는 저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 아니 거의 신념에 가까운 것들에 싸여서 자라온 우리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걸 바라는 건 무리입니다. 다른 책에서 다룬 내용이지만, 남자가 칭찬이랍시고 던지는 말이 사실은 여성 비하일 수도 있습니다. 항의를 하면 예민하게 구는 꼴이 되고요. 저자 서한영교는 그 프레임에서 나오려 무던히 애를 쓰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세상은 프레임 안에 있기에 녹록지 않습니다.
나무의 진화는 뿌리, 높이, 두께를 통해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나무의 수종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젠더에도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여성, 남성,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등등. 분화된 다양한 젠더들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위해서는 진보가 아니라 진화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p.196
페미니스트이면서 시각장애인 아내와 함께 아이를 양육하는 그의 주업은 '육아'입니다. 시인이기도 하고, 에디터 일을 하는 등 최소한의 벌이를 하고 있지만 '아버지'라면 돈을 많이 벌어오고 아내에게 집안일을 모두 맡기는 게 당연한 것인 이 세상에서는 한심한 사람이고, 도태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가난을 슬퍼할지언정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은, 모두가 함께하는 그 생활에 대해 감사할 거라는걸요.
언젠가 아이가 아빠는 페미니스트야?라고 물어보면 응, 애쓰고 있어,라고 씩씩하게 대답해줄 날을 기다려본다.
-p.227
과격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세상을 싫어하는 저는. 아이를 젠더 프레임에 가두지 않기 위해 애쓰며 키웠습니다. 생각이 갇히는 게 싫었습니다. 잘 한 것 같아요. 제 아이는 의외로 무척 고지식 한 녀석이라, 만일 제가 프레임을 씌웠더라면 평생 그 안에서 살 뻔했거든요. 무척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를 씌울 뻔했어요.
남자로서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건, 여성 페미니스트보다 더 힘든 길인 것 같습니다.
어렵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살고 있는, 그리고 노력하는 그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나는 다시 탄생했다. 내 안의 여성-유령과 함께 두 번째 페미니스트로. 누군가에게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곁에 위치한 두 번째 자리에서 "나도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다시 선언하며 책임을 다하려는 두 번째 사람으로.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곁에 위치한 두 번째 자리에서 "저도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합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있으려 한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로서......
-p.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