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
황금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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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멀리 있지 않다

-숲으로 출근합니다 서평



직업을 가리키는 말 중에 천직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늘이 내린 직분,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아 떨어질 때 쓸 수 있는 명칭이 아닐까. 나는 이 에세이를 읽는 동안 저자의 나무의사, 즉 가드너로서의 삶은 천직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만큼 이 책은 자신의 일이 사랑스럽고 행복한 이의 밝은 기운이 책에 실린 햇살 속의 여러가지 나무의 다양한 색상처럼 또렷하게 뻗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쓴 글은 읽는 이마저 그 대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같은 감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글을 읽는 동안 나 역시 그 감각을 여러 번 느꼈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기에, 고양이에게 위험할 소지가 있는 화분이나 꽃은 집에 들이지 않지만, 계절을 따라 옷을 갈아입는 길가의 나무나 풀을 구경하는 건 좋아한다. 지나가다가 궁금한 식물이 생기면 인공지능에게 사진을 전송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바쁘게 목적지에 가야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풀섶 앞에 주저앉아 있을 때도 많다. 바위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새끼 손톱보다도 작은 들꽃에 마음이 빼앗기기도 하고, 보도블럭 사이로 피어난 민들레와 풀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며 생수병을 기울여 풀이 죽어 보이는 연두빛에 물방울을 튀겨 주기도 한다. 자연의 색은 내게 네온사인보다 강렬하고 아름답다. 특히 요즘처럼 겨울이 물러가며 피어나는 색색의 꽃들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 책은 내가 이전에 읽은 식물세밀화가 이소영님의 <식물과 나>처럼 이 이 글 <숲으로 출근합니다>의 저자 황금비 가드너님도 계절별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나무를 계절별로 소개한다. 도시 생태를 유지시켜주는 나무를 중심으로 소개해서인지, 실린 사진 속 나무 잎파리나 꽃이 눈에 익은 것도 많았다. 식물 명은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게 많아서 애써 물어도 까먹는 경우가 잦지만, 확실히 잎사귀의 모습이 눈에 익은 나무가 보일 때마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목련을 설명할 때는 자목련은 유치원 앞에서, 백목련은 버스 정류장에서 외롭게 서있던 모습이 떠올랐고, 벚나무를 소개할 때에는 수변 공원 너머의 수백년은 되었음직한 굵기의 벚나무를 남편과 산책한 기억이 떠올랐다. 버즘나무가 도시의 생태와 미관을 위해서 소나무로 교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에는 어린 시절 버즘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면 송충이가 떨어질까 봐 무서워하며 맑은 날에도 우산을 펼쳐 들고 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고, 배롱나무를 볼 때면 시댁 가던 길에 멈춰선 공원에 서있던 붉은 배롱나무의 단풍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은목서는 이사 오기 전 집 앞 공원에 심어져 있어서, 참 예쁘고 우아한 꽃이다 감탄하던 기억이 겹쳐졌고, 눈쌓인 말채나무의 붉고 얄팍한 가지들은 겨울에 방문했던 수목원의 아름다운 정경으로 이어졌다. 이 책에는 내 삶이 나도 모르게 꽤나 많은 나무들과의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일러주었다. 


수많은 기억이 고리처럼 이어지는 동안, 나는 내가 살아온 곳들이 참으로 고맙게도 자연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들이었음에 새삼 감사를 느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생명 감수성이 깊어진 건, 내 삶에 이름 없이 존재했던 풀과 나무들, 그리고 그를 둥지로 삼고 살아가는 수많은 곤충과 새들 덕이 아니었을까. 그건 도심에서 나무를 지켜내고자 노력해주신 수많은 분들의 노고 덕분임과 동시에, 매연과 병충해에 시달리면서도 대한민국의 혹독한 사계절을 버텨내며 생명의 움을 틔워낸 수많은 식물들의 강인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근 2년 간 식물에 관한 다양한 글을 읽어오며, 식물들도 화학 물질로 소통을 하며, 형제 격인 식물들을 보호하려 하며, 다양한 협력 체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배웠다. 식물을 무척 사랑하여 베란다가 정글과도 같은 우리 엄마를 통해, 다정한 말을 건네고 지극정성으로 돌보면, 더 예쁘게 꽃이 많이 피고, 오래 가고, 더 푸르게 빛나는 식물들을 보며 자라온 나는, 어느 순간부터 갓 피어난 꽃이나 새순을 뜯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지난 주 벚꽃길에서도 바람결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벚꽃잎을 주워와 책 사이에 말려두었는데, 그 마음 때문일까. 갖다 팔기 위해서 제주에서 후박나무의 껍질을 400그루나 벗겨버렸다는 조경업자의 이야기를 읽다가 무척 화가 나고 가슴이 아팠다. 식물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처를 입으면 방어를 하기 위해 화학물질을 분비하고, 그를 통해 주위 식물에 경고를 보낸다. 조경업자이면 식물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텐데.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약용으로 쓰이는 동명의 다른 후박나무가 아닌 그저 삶았을 때 단맛이 날 뿐인 엉뚱한 후박나무의 껍질을 수백그루나 벗겨낸 그 조경업자는 어떤 인간인 것인지. 엉뚱한 나무를 학대한 것이라면 조경업자로서 직업상 자질이 부족한 것이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돈에 눈이 먼 사기꾼이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체포된 모양이지만, 그 끔찍한 학대를 당하는 동안 나무는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싶어, 얼마나 딱한 사정이 있길래, 를 먼저 생각한 저자보다 내 마음은 한층 더 강퍅해졌다. 


책을 덮고 나니, 4월을 맞이하여 연둣빛 싱그러운 새순을 부지런히 피워내는 나무의 기특한 생명력이 한층 더 선연하게 눈에 맺히는 기분이었다. 푸름은 머리를 맑게하고 기분이 좋게 만든다. 내 삶 주변의 푸르름이 겪고 있을 보이지 않은 고초를 헤아리며 한 번 더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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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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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번역이 필요할까>

-한영 육아 번역기를 읽고


사랑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다. 사랑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니라 노력으로 지속해야 하는 일종의 기술이라고. 이 책의 저자는 책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은연 중에 말한다. 사랑은 나와 다른 세계를 배우는 일이고, 그러하기에 번역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이 책은 방송인 임현주 아나운서님과 영국인 기자 다니엘 튜터 작가님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며 공감하며 살아가는 성찰 에세이다. 이 책은 한국인과 영국인 국제 커플의 육아담을 다루고 있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읽은 건 삶과 결혼, 육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였다. 분명 저자와 나는 다른 인간이고, 저자의 남편과 내 남편도 다르고, 저들이 키우는 두 딸과 우리 집에서 살아가는 17마리의 고양이 아가들은 전혀 다른 존재다. 하지만 기이하리 만치 나는 저자가 그려내는 삶의 자세와 감각과 일상의 에피소드가 나와 깊이 겹치는 걸 느꼈다. 서로 다른 성장배경을 지녔기에 나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배우자의 지혜로움을 통해 한땀씩 성장하는 에피소드나, 서툰 엄마였다가 경험치가 하나씩 쌓여가며 육아관이 바뀌는 모습이나, 비교와 완벽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배우자의 곁에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변화의 결까지, 공감되는 에피소드는 무던히도 많았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내가 붙들고 싶었던 질문은 오직 하나였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건 다음과 같다. 

 나다움을 지키면서도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가. 다름을 고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책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아이의 혈관종 에피소드다. 한국에서는 그것을 흉으로 여기고 숨기려 한다. 외모를 중시하는 문화 배경과 타인에 대한 오지랖이 깊은 정의 문화가 이 감정의 이면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남과 다르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시선과 질문을 먼저 의식하게 된다. 저자 역시 외출할 때 아픈 아이에게 모자를 씌우고, 사람들의 질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좀더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스스로를 탓한다. 하지만 저자의 남편은 다르다. 그는 그 사실을 과장하지도, 특별히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아이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 일정한 거리에서의 존중. 그 태도는 관심 없음이 아니라, 타인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방식의 존중이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내가 고양이들을 돌보며 병과 증상들을 알아가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 역시 저자처럼 불안했다. 내가 모자라서 내 아이들이 아픈 것 같아 죄책감에 무던히도 시달렸다. 병원에서 권하는 치료에 응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하루 하루의 컨디션에 마음이 수시로 무너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병을 극복해낸 몇 번의 기적과, 병마로 잃어버린 아이들의 기억이 겹쳐지면 깨닫게 된 게 있었다. 내 아이들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강인한 아이들이었노라고. 


아픈 고양이는 식욕이 떨어지고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약 먹는 게 괴롭고 몸이 아프니 활동량이 줄어들어 고양이의 완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림프종 선고를 받았던 우리 달땡이는 복도식 아파트를 걷는 방식으로 좁은 집에서 못 채운 활동량을 채워 식사량을 버텨서 힘든 약을 먹고 2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은 적 있었다. 우리 가온이는 병명조차 확인할 수 없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검사를 위한 마취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체중이 줄어들어, 지난 여름 빈사 상태의 우리 가온이는 그와 유사한 임상 징후 4건을 다룬 논문을 통해서 진료 방식을 바꾸었다. 이틀 간격으로 영양 수액을 맞고, 수술 후 고담백 회복식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해서 뉴케어에 갈아서 미음처럼 한 두 수푼 떠먹는 것조차 고역이던 시절, 가온이는 하루에 수십 번 토하면서도 끊임없이 먹으려고 했다. 두 달 만에 3킬로 정도 빠져서 피골이 상접하여 매주 병원에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란 이야기를 들었던 내 아기는,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지금은 몸무게를 800그람이나 증량하고, 스스로 사료를 먹을 수 있을 만큼 회복했다. 옆으로 누워서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잦은 구토로 식도 확장 및 돌출로 미음처럼 간 습식조차 한 수저 먹이고 안아 올려 십 오분 이상 등을 쓸어주며 소화를 도와야 했던 내 아기, 우리 가온이는 절박한 어미의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그 안아주는 시간을 견뎠고, 음식을 받아 삼켰고, 토할 지언정 약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걸으려고 애썼다. 아프다고 주저 앉지 않는 그 강인함에, 나는 우리 가온이를 내 작은 기적이라고 부른다. 가온이가 좀 나을라 치니 지난 주에 우리 아름이가 신장 위험 판정을 받았다. 내 첫째 아름이의 신장의 70% 정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는 더이상 내 아기들의 질병을 가지고 나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아름이는 신장 처방 사료는 먹지 않지만, 내가 부탁하면 신장 파우치는 먹어준다. 신장 사료를 먹으면 병의 증세를 늦출 수 있다고 들었기에, 병원에 부탁해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신장 처방식은 습식 건식 가리지 않고 다 주문했다. 그리고 내가 구할 수 있는 보조제도 구해서 먹이고 있다. 알약을 먹이면 거품을 물며 화를 내던 아름이는, 내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신장에 좋은 영양제를 잘 삼켜준다. 아이들은 몸이 아파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상태로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 아이들의 삶을 온전히 지지하며 곁에서 견디겠노라 다짐했다. 


어쩌면 저자가 서두에서 말하는 관용은 거창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고치려 하지 않는 것,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과하게 해석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두는 태도. 그것은 내가 동물들에게 배운 태도와 닮아 있었다.


나와 다름에 대한 이 사회의 시각을 보여주는 또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책에서 저자가 연예인의 논란을 보고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남편은 묻는다.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누구인데?" 댓글들을 보니 대충 그렇더라고 답하자, 그는 온라인의 댓글은 소수의 사람이 남긴 생각일 뿐인데 대중의 주류 의견처럼 과대표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생일날, 카드에 이런 문장을 써준다. "논란을 더 많이 만드세요."라고. 눈치 보며 살지 말라는 외부의 말들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힘일 것이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까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왜 한국에서는 이런 말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왜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듬고, 튀지 않으려 애쓰고, 결점을 숨기려 할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속담은 튀지 않으려는, 혹은 튀면 안된다는 우리 정신의 내면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증표가 아닐까 싶다. 


동양은, 특히 우리 나라는 오래도록 농경 사회였다. 기술이 발전하기 그 옛날 농사는, 결코 개인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과업이었다. 튀지 말라는 말은, 공동체에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반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조화와 화합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했던 시간들. 공동체의 규범을 어기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위험이었을 시대, 그게 우리의 과거다. 문제는 그 감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데 있다. 


튀지 않음, 다시 말해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되던 사회의 가치관이 더 이상 생존 조건이 아닌 현대에도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저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식의 기반이 되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완벽주의를 개인의 성실함처럼 보지만, 사실은 결점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집단의 압력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사회의 압력에 따라 완벽해지기 위해 수많은 자기계발 담론이 이 사회를 들썩이게 만드는 한편으로는 '나로 살고 싶다'라든가 '미움 받을 용기'에 대한 희구가 반복해서 소비되는 것도 내 눈에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회에 압력에 버티듯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아의 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없이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무던하지 않았다. 조용한 사람이 아니었고, 생각이 많았고, 느끼는 것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늘 눈에 띄었고, 그만큼 자주 미움을 받았다. 어색한 공기, 미묘하게 밀려나는 자리, 어느 순간부터 끼지 못하게 되는 대화. 둥글게 흘러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적당히 맞추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가 없었고, 오래 머무는 관계도 드물었고, 자주 혼자였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나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고집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남편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 <고독한 이방인의 산책>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수많은 한국인이 내면화한 타인의 시선이 주는 압박을 낯설어한다. 왜 그렇게까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왜 몇몇 사람의 말이 전체의 판단처럼 작용하는지 묻는다. 그 질문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또다른 선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인 저자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저자 역시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타고난 대로 아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나가듯, 오늘 실패하더라도 내일 또 기회가 있다는 것을 결혼 생활과 육아 속에서 배워간다. 한 사람을 선택했는데 상상하지 못한 다른 세계가 찾아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세계를 번역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제는 안다. 내가 틀렸던 게 아니라, 내 방식이 단지 이 사회의 방식과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나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끝없이 나를 설명하며 소진하기보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존재를 조금 더 가까이 두기로 했다. 내가 나로 존재해도 누구도 개의치 않는 사회, 존재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로움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 나는 그 가능성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조금 믿어보게 되었다. 사랑에도 번역은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한 번역 역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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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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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 신을 기리며

—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을 읽고



이 책은 현대 남성성의 위기를 카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그중에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프리즘으로 읽어낸다. 남성 안의 여성성, 여성 안의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뜻밖에도 지금의 이 시대에 더 절실하게 들린다.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고, 테토녀, 에겐남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언어로 일상에 파고들 만큼 성별의 경계와 역할의 감각이 빠르게 재편되는 시대에 남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답을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저자 고혜경 박사는 그 답을 제도나 규범이 아니라 신화의 무의식 속에서 찾는다. 헤파이스토스, 아폴론,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하데스, 제우스. 여섯 남신을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억압한 내면의 원형으로 복원하는 이 작업이 지금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헤파이스토스에게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이 서평을 책 전체를 고르게 조망하기 보다는, 내 마음 속에 깊게 파고든 헤파이스토스라는 한 원형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쓰고자 한다.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을 읽다가 문득 내가 왜 헤파이스토스라는 존재에 이렇게 오래 시선이 머무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나는 오래전부터 상처 입은 영혼에 민감했다. 특히 겉으로는 제 몫을 다하며 살아가지만, 가장 깊은 자리에는 한 번 밀려난 기억을 품고 있는 존재들에게 자꾸 마음이 갔다. 나는 그런 존재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유능함과 성실함의 표면 아래, 사랑받지 못한 슬픔이 숨어 있는 얼굴을 보면 오래 시선이 머문다. 헤파이스토스는 바로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불과 기술의 신이기 전에, 먼저 버려진 아이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 이유는 내게도 낯익은 감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엄마의 트로피였지, 사랑하는 자식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첫 취업에 실패하며 자랑거리를 잃은 나는 오랜 세월 가족 안에서 투명한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다. 기대에 부응할 때만 환영받고, 그렇지 않을 때는 존재가 흐려지는 관계. 내가 아는 부모의 사랑은 처음부터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헤라와 제우스의 거부는 내게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헤파이스토스의 상처는 먼 신화 속 비극이 아니라,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감각의 언어처럼 읽혔다.


저자는 헤파이스토스를 단순한 기술의 신으로 읽지 않는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버지의 질서 속으로 입문하는 과정이라면, 헤파이스토스는 그 경로를 온전히 밟지 못한 신이다. 그는 중심의 질서에 진입하지 못한 채 불과 금속, 용광로와 공방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이 해석 방식은 우리에게 친근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전혀 다르게 보게 만든다. 그의 기술은 단순한 생산 능력이 아니라, 버려진 존재가 살아남기 위해 발명한 창조의 형식이 된다. 그는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영웅이 아니라, 중심에서 밀려난 자리에서 끝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신화 속에서 나는 제우스보다 헤라가 더 잔인하다고 느꼈다. 제우스에게 헤파이스토스는 헤라가 혼자 만들어낸 아들이고, 그의 배제는 냉혹하지만 적어도 신화적 권력 질서의 언어로 읽힐 여지가 있다. 그러나 헤라는 다르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존재를 기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밀어낸다. 이 장면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처럼 읽힌다.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네가 바로 잘못이라는 선언, 그 낙인이 헤파이스토스의 영혼에 새겨져 있다. 


헤파이스토스의 상처는 세상과 싸우다 패배한 상처가 아니다. 세상에 나가기 전, 가장 먼저 사랑받아야 할 자리에서 이미 환영받지 못했다는 상처다. 그 상처는 후천적인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뿌리에 새겨진 추방의 감각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부모의 사랑조차 결코 무조건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만큼은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힘이기를 바란다. 세상 어디에서도 조건 없는 수용을 얻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그 자리만큼은 예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신화는 그런 믿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은 기대와 투사, 실망과 수치심에 의해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다. 자식이 기대에 맞지 않을 때, 사랑은 흔들리고 심지어 거절의 얼굴을 띠기도 한다. 헤파이스토스의 이야기가 유독 잔인한 것은 그가 적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품어주어야 할 존재들에게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파이스토스가 용광로 앞에서 새로운 사물을 빚어내는 장면은 내게는 단순한 제작 행위로 읽히지 않았다. 그것은 상처를 형태로 바꾸는 작업처럼 보였다. 사랑받지 못한 자가 파괴 대신 창조를 선택한 셈이다. 이 점에서 헤파이스토스는 아주 현대적인 인물처럼 다가온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한 자리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종종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한다. 존재만으로는 환영받지 못했기에, 기능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 한다. 더 잘 만들고, 더 잘 일하고, 더 쓸모 있는 존재가 되면 마침내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헤파이스토스의 기술 역시 그런 절박함의 언어처럼 읽힌다. 그래서 그의 불은 권력의 불꽃이라기보다 결핍의 열기처럼 느껴진다.


제임스 힐먼의 말처럼 인간의 내면이 단일하지 않고 다중심적이라면, 헤파이스토스에게 오래 머무는 나의 시선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한 신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오래 소외되어 온 어떤 원형을 알아보는 일에 가깝다. 버려진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 신이 내게 오래 남는 이유는, 그 신이 내 안 어딘가에서도 아직 완전히 제 몫의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용광로 앞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처를 파괴로 돌리지 않고 끝내 무언가를 만들려는 충동,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쓸모와 창조로 번역해내려는 몸부림이 내게도 아주 낯설지는 않기 때문이다.


헤파이스토스는 영웅이 아니다. 가장 먼저 밀려난 자리에서 자기만의 공방을 세운 존재이다. 그의 위대함은 상처가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상처를 끝내 세계를 부수는 방향으로 돌리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고 남기는 방향으로 견뎌냈다는 데 있다. 어떤 영혼들은 사랑받지 못한 자리에서 파괴를 배우고, 어떤 영혼들은 그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다. 헤파이스토스는 후자에 속하는 신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아픈 신이고, 그런 까닭에 더욱 찬란한 신이다. 앞으로도 내게 그는 기술의 신이라기보다,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끝내 창조의 언어로 바꾸어낸 위대한 영혼으로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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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장의 고백
조승리 지음 / 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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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장의 고백>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켜야 했다. 화자인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이 아닌 내 기억의 연장선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차별, 당연하게 여겨지는 책임의 전가, 그리고 끝내 한 사람에게만 쏠리는 삶의 무게는 내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작중 주인공의 태도가 못내 갑갑했다. 70살이 넘도록 모든 것을 감당하려는 주인공의 태도, 누군가는 그것을 숭고한 '희생'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 이면의 구조가 보인다. 더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끝까지 버티고, 더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짐을 짊어지는 방식. 하지만 그 구조의 끝에는 오직 한 사람의 처절한 소진만이 남는다. 소설은 그 과정을 집요할 만큼 사실적으로 추적하는 느낌이었다.

 

맨 처음에는 내가 죽어야만 이 고통이 끝날 것 같기에 죽기를 소원하고, 그 다음에는 고통의 직접적인 원천인 모친이 죽기를 희망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나는 슬프도록 여실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길이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결국 가족이란 이름의 천형을 벗고 스스로 살기를 선택하는 그 아프고 처절한 선택마저도 이해한다. 아니, 내 자신이 그 과정을 겪었기에, 아니 아직도 그 굴레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했기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주인공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를 죽이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족은 이 세상에 없노라고 말이다.

 

주인공은 남편과 함께 하며 인연을 끊었던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평생토록 가족에 얽매여 살아왔지만, 나는 주인공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책임을 감당해왔지만, 더 이상 타인의 삶을 위해 나를 지우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 남지 않기로 했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내가 선택한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가족은, 나의 탄생은 결코 내 의지가 들어 있지 않는 결과였다. 이 단순하고도 엄중한 원칙을 깨닫기까지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돌아왔다.

 

작중 주인공은 고통스러울 때마다 교회로 가 신에게 기도한다. 그를 둘러싼 교회의 지인들은 주님이 믿음에 응답할 것이라고 응원하며, 실제로 주인공이 요양원에 보낸 모친이 화재로 죽음으로써 그의 기도가 응답 받은 것 같은 장면이 나오나, 나는 여전히 기도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모친의 죽음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결국 모친과 떨어져 자신의 길을 걷기로 택한 행위의 결과였다. 어머니를 끝까지 모셨다면, 용궁장의 화재가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그러하기에 이 소설의 구조는 내게 여실히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이 삶을 바꾸는 것은 막연한 염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택과 행동이란 사실을.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 나는 내 삶의 크기를 스스로 키우고, 그것을 다시 나눈다. 나눠주어 작아지면 다시 키우면 그만이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문법이다.

 

<용궁장의 고백>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가. 이 책을 읽은 지금은 단호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책임지고, 그 경계 밖에서는 멈출 것이라고. 나를 무너뜨리는 책임은 더 이상 책임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란 걸 알기에. 그 멈춤의 자리 위에서, 온전한 나를 다시 만들어갈 참이다.

 

#용궁장의고백 #조승리 #소설 ##독파 #도서제공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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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요떠요 할머니 특서 어린이문학 15
오미경 지음, 김다정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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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요 떠요 할머니>는 특서주니어에서 출간된 신간 어린이 동화이다. 이 이야기는 발표 도중 잘못된 피드백으로 상처를 입어 말을 잃게 된 소녀 오단풍과, 친구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기 위해 나서는 아이들의 작은 모험을 담고 있다. 이야기 속에는 마녀라는 판타지적 요소와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보는 어른들의 따뜻한 시선이 함께 놓여 있다. 어린이 소설다운 상상력과 모험,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지지하는 부드러운 어른의 개입이 인상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십대 초반, 명작 동화를 탐독하던 내 유년기의 감각이 문득 되살아났다. 변성기 이전의 나는 발표를 좋아하는 활달한 아이였다. 그러나 변성기 무렵 목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목소리가 변한 뒤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반 친구들의 비웃음 이후 말을 잃어버린 단풍이의 모습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어린이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지만, 그 장면은 어른이 된 지금의 나에게도 오래된 기억을 건드렸다.

단풍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동물에 대한 장점을 떠올리며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반에서 강아지를 키우자고 제안한다. 물론 동물권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제안이 얼마나 무책임한 발상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아이에게 그 말은 단순한 제안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애정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 그러나 아이들의 교실에서 흔히 보이는 잔혹한 무지함은 그 마음을 비웃음으로 돌려준다. 그 순간 단풍이는 목소리를 잃는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이란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존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특히 좋았던 이유는 상처가 생긴 자리와 그것을 극복하는 자리 모두가 친구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단풍이는 때로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해 주려는 활달한 장미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그 마음을 곡해하지 않는다. 친구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겠다며 마니토 상자에 개구리를 넣어 보내고,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놀라게 하는 짓궂은 장난을 반복하는 재윤 역시 단풍이에게는 단순한 괴롭힘의 존재로 남지 않는다. 단풍이는 그 행동 뒤에 있는 친구의 마음을 읽어낸다. 이런 장면들은 아이들의 순수가 세상살이에 닳은 어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이 이야기에는 멋진 어른이 등장한다. 뜨개방의 ‘떠요 떠요 할머니’다. 재윤은 할머니를 마녀라고 믿지만, 할머니는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는다. 대신 친구를 돕고 싶어 하는 재윤의 마음과, 스스로 한계를 넘고 싶어 하는 단풍이를 위해 마녀인 척 마법의 주문을 가르쳐 준다.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무능하거나 무심한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의 세계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조용히 힘을 보태는 어른이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따뜻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함께 주문을 외우고 마침내 단풍이가 목소리를 되찾는 결말은 단단히 닫힌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게 그 장면은 끝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단풍이와 재윤, 장미는 앞으로도 수많은 시련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 상처를 견디고 다시 목소리를 찾는 법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어른인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렇게, 누군가와 함께 목소리를 되찾는 법을 배워 왔는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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