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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사랑도 번역이 필요할까>
-한영 육아 번역기를 읽고
사랑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다. 사랑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니라 노력으로 지속해야 하는 일종의 기술이라고. 이 책의 저자는 책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은연 중에 말한다. 사랑은 나와 다른 세계를 배우는 일이고, 그러하기에 번역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이 책은 방송인 임현주 아나운서님과 영국인 기자 다니엘 튜터 작가님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며 공감하며 살아가는 성찰 에세이다. 이 책은 한국인과 영국인 국제 커플의 육아담을 다루고 있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읽은 건 삶과 결혼, 육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였다. 분명 저자와 나는 다른 인간이고, 저자의 남편과 내 남편도 다르고, 저들이 키우는 두 딸과 우리 집에서 살아가는 17마리의 고양이 아가들은 전혀 다른 존재다. 하지만 기이하리 만치 나는 저자가 그려내는 삶의 자세와 감각과 일상의 에피소드가 나와 깊이 겹치는 걸 느꼈다. 서로 다른 성장배경을 지녔기에 나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배우자의 지혜로움을 통해 한땀씩 성장하는 에피소드나, 서툰 엄마였다가 경험치가 하나씩 쌓여가며 육아관이 바뀌는 모습이나, 비교와 완벽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배우자의 곁에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변화의 결까지, 공감되는 에피소드는 무던히도 많았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내가 붙들고 싶었던 질문은 오직 하나였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건 다음과 같다.
나다움을 지키면서도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가. 다름을 고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책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아이의 혈관종 에피소드다. 한국에서는 그것을 흉으로 여기고 숨기려 한다. 외모를 중시하는 문화 배경과 타인에 대한 오지랖이 깊은 정의 문화가 이 감정의 이면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남과 다르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시선과 질문을 먼저 의식하게 된다. 저자 역시 외출할 때 아픈 아이에게 모자를 씌우고, 사람들의 질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좀더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스스로를 탓한다. 하지만 저자의 남편은 다르다. 그는 그 사실을 과장하지도, 특별히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아이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 일정한 거리에서의 존중. 그 태도는 관심 없음이 아니라, 타인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방식의 존중이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내가 고양이들을 돌보며 병과 증상들을 알아가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 역시 저자처럼 불안했다. 내가 모자라서 내 아이들이 아픈 것 같아 죄책감에 무던히도 시달렸다. 병원에서 권하는 치료에 응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하루 하루의 컨디션에 마음이 수시로 무너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병을 극복해낸 몇 번의 기적과, 병마로 잃어버린 아이들의 기억이 겹쳐지면 깨닫게 된 게 있었다. 내 아이들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강인한 아이들이었노라고.
아픈 고양이는 식욕이 떨어지고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약 먹는 게 괴롭고 몸이 아프니 활동량이 줄어들어 고양이의 완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림프종 선고를 받았던 우리 달땡이는 복도식 아파트를 걷는 방식으로 좁은 집에서 못 채운 활동량을 채워 식사량을 버텨서 힘든 약을 먹고 2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은 적 있었다. 우리 가온이는 병명조차 확인할 수 없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검사를 위한 마취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체중이 줄어들어, 지난 여름 빈사 상태의 우리 가온이는 그와 유사한 임상 징후 4건을 다룬 논문을 통해서 진료 방식을 바꾸었다. 이틀 간격으로 영양 수액을 맞고, 수술 후 고담백 회복식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해서 뉴케어에 갈아서 미음처럼 한 두 수푼 떠먹는 것조차 고역이던 시절, 가온이는 하루에 수십 번 토하면서도 끊임없이 먹으려고 했다. 두 달 만에 3킬로 정도 빠져서 피골이 상접하여 매주 병원에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란 이야기를 들었던 내 아기는,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지금은 몸무게를 800그람이나 증량하고, 스스로 사료를 먹을 수 있을 만큼 회복했다. 옆으로 누워서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잦은 구토로 식도 확장 및 돌출로 미음처럼 간 습식조차 한 수저 먹이고 안아 올려 십 오분 이상 등을 쓸어주며 소화를 도와야 했던 내 아기, 우리 가온이는 절박한 어미의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그 안아주는 시간을 견뎠고, 음식을 받아 삼켰고, 토할 지언정 약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걸으려고 애썼다. 아프다고 주저 앉지 않는 그 강인함에, 나는 우리 가온이를 내 작은 기적이라고 부른다. 가온이가 좀 나을라 치니 지난 주에 우리 아름이가 신장 위험 판정을 받았다. 내 첫째 아름이의 신장의 70% 정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는 더이상 내 아기들의 질병을 가지고 나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아름이는 신장 처방 사료는 먹지 않지만, 내가 부탁하면 신장 파우치는 먹어준다. 신장 사료를 먹으면 병의 증세를 늦출 수 있다고 들었기에, 병원에 부탁해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신장 처방식은 습식 건식 가리지 않고 다 주문했다. 그리고 내가 구할 수 있는 보조제도 구해서 먹이고 있다. 알약을 먹이면 거품을 물며 화를 내던 아름이는, 내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신장에 좋은 영양제를 잘 삼켜준다. 아이들은 몸이 아파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상태로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 아이들의 삶을 온전히 지지하며 곁에서 견디겠노라 다짐했다.
어쩌면 저자가 서두에서 말하는 관용은 거창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고치려 하지 않는 것,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과하게 해석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두는 태도. 그것은 내가 동물들에게 배운 태도와 닮아 있었다.
나와 다름에 대한 이 사회의 시각을 보여주는 또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책에서 저자가 연예인의 논란을 보고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남편은 묻는다.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누구인데?" 댓글들을 보니 대충 그렇더라고 답하자, 그는 온라인의 댓글은 소수의 사람이 남긴 생각일 뿐인데 대중의 주류 의견처럼 과대표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생일날, 카드에 이런 문장을 써준다. "논란을 더 많이 만드세요."라고. 눈치 보며 살지 말라는 외부의 말들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힘일 것이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까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왜 한국에서는 이런 말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왜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듬고, 튀지 않으려 애쓰고, 결점을 숨기려 할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속담은 튀지 않으려는, 혹은 튀면 안된다는 우리 정신의 내면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증표가 아닐까 싶다.
동양은, 특히 우리 나라는 오래도록 농경 사회였다. 기술이 발전하기 그 옛날 농사는, 결코 개인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과업이었다. 튀지 말라는 말은, 공동체에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반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조화와 화합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했던 시간들. 공동체의 규범을 어기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위험이었을 시대, 그게 우리의 과거다. 문제는 그 감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데 있다.
튀지 않음, 다시 말해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되던 사회의 가치관이 더 이상 생존 조건이 아닌 현대에도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저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식의 기반이 되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완벽주의를 개인의 성실함처럼 보지만, 사실은 결점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집단의 압력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사회의 압력에 따라 완벽해지기 위해 수많은 자기계발 담론이 이 사회를 들썩이게 만드는 한편으로는 '나로 살고 싶다'라든가 '미움 받을 용기'에 대한 희구가 반복해서 소비되는 것도 내 눈에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회에 압력에 버티듯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아의 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없이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무던하지 않았다. 조용한 사람이 아니었고, 생각이 많았고, 느끼는 것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늘 눈에 띄었고, 그만큼 자주 미움을 받았다. 어색한 공기, 미묘하게 밀려나는 자리, 어느 순간부터 끼지 못하게 되는 대화. 둥글게 흘러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적당히 맞추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가 없었고, 오래 머무는 관계도 드물었고, 자주 혼자였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나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고집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남편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 <고독한 이방인의 산책>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수많은 한국인이 내면화한 타인의 시선이 주는 압박을 낯설어한다. 왜 그렇게까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왜 몇몇 사람의 말이 전체의 판단처럼 작용하는지 묻는다. 그 질문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또다른 선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인 저자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저자 역시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타고난 대로 아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나가듯, 오늘 실패하더라도 내일 또 기회가 있다는 것을 결혼 생활과 육아 속에서 배워간다. 한 사람을 선택했는데 상상하지 못한 다른 세계가 찾아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세계를 번역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제는 안다. 내가 틀렸던 게 아니라, 내 방식이 단지 이 사회의 방식과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나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끝없이 나를 설명하며 소진하기보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존재를 조금 더 가까이 두기로 했다. 내가 나로 존재해도 누구도 개의치 않는 사회, 존재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로움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 나는 그 가능성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조금 믿어보게 되었다. 사랑에도 번역은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한 번역 역시 필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