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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평점 :
버려진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 신을 기리며
—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을 읽고
이 책은 현대 남성성의 위기를 카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그중에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프리즘으로 읽어낸다. 남성 안의 여성성, 여성 안의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뜻밖에도 지금의 이 시대에 더 절실하게 들린다.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고, 테토녀, 에겐남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언어로 일상에 파고들 만큼 성별의 경계와 역할의 감각이 빠르게 재편되는 시대에 남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답을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저자 고혜경 박사는 그 답을 제도나 규범이 아니라 신화의 무의식 속에서 찾는다. 헤파이스토스, 아폴론,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하데스, 제우스. 여섯 남신을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억압한 내면의 원형으로 복원하는 이 작업이 지금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헤파이스토스에게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이 서평을 책 전체를 고르게 조망하기 보다는, 내 마음 속에 깊게 파고든 헤파이스토스라는 한 원형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쓰고자 한다.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을 읽다가 문득 내가 왜 헤파이스토스라는 존재에 이렇게 오래 시선이 머무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나는 오래전부터 상처 입은 영혼에 민감했다. 특히 겉으로는 제 몫을 다하며 살아가지만, 가장 깊은 자리에는 한 번 밀려난 기억을 품고 있는 존재들에게 자꾸 마음이 갔다. 나는 그런 존재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유능함과 성실함의 표면 아래, 사랑받지 못한 슬픔이 숨어 있는 얼굴을 보면 오래 시선이 머문다. 헤파이스토스는 바로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불과 기술의 신이기 전에, 먼저 버려진 아이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 이유는 내게도 낯익은 감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엄마의 트로피였지, 사랑하는 자식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첫 취업에 실패하며 자랑거리를 잃은 나는 오랜 세월 가족 안에서 투명한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다. 기대에 부응할 때만 환영받고, 그렇지 않을 때는 존재가 흐려지는 관계. 내가 아는 부모의 사랑은 처음부터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헤라와 제우스의 거부는 내게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헤파이스토스의 상처는 먼 신화 속 비극이 아니라,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감각의 언어처럼 읽혔다.
저자는 헤파이스토스를 단순한 기술의 신으로 읽지 않는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버지의 질서 속으로 입문하는 과정이라면, 헤파이스토스는 그 경로를 온전히 밟지 못한 신이다. 그는 중심의 질서에 진입하지 못한 채 불과 금속, 용광로와 공방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이 해석 방식은 우리에게 친근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전혀 다르게 보게 만든다. 그의 기술은 단순한 생산 능력이 아니라, 버려진 존재가 살아남기 위해 발명한 창조의 형식이 된다. 그는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영웅이 아니라, 중심에서 밀려난 자리에서 끝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신화 속에서 나는 제우스보다 헤라가 더 잔인하다고 느꼈다. 제우스에게 헤파이스토스는 헤라가 혼자 만들어낸 아들이고, 그의 배제는 냉혹하지만 적어도 신화적 권력 질서의 언어로 읽힐 여지가 있다. 그러나 헤라는 다르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존재를 기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밀어낸다. 이 장면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처럼 읽힌다.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네가 바로 잘못이라는 선언, 그 낙인이 헤파이스토스의 영혼에 새겨져 있다.
헤파이스토스의 상처는 세상과 싸우다 패배한 상처가 아니다. 세상에 나가기 전, 가장 먼저 사랑받아야 할 자리에서 이미 환영받지 못했다는 상처다. 그 상처는 후천적인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뿌리에 새겨진 추방의 감각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부모의 사랑조차 결코 무조건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만큼은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힘이기를 바란다. 세상 어디에서도 조건 없는 수용을 얻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그 자리만큼은 예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신화는 그런 믿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은 기대와 투사, 실망과 수치심에 의해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다. 자식이 기대에 맞지 않을 때, 사랑은 흔들리고 심지어 거절의 얼굴을 띠기도 한다. 헤파이스토스의 이야기가 유독 잔인한 것은 그가 적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품어주어야 할 존재들에게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파이스토스가 용광로 앞에서 새로운 사물을 빚어내는 장면은 내게는 단순한 제작 행위로 읽히지 않았다. 그것은 상처를 형태로 바꾸는 작업처럼 보였다. 사랑받지 못한 자가 파괴 대신 창조를 선택한 셈이다. 이 점에서 헤파이스토스는 아주 현대적인 인물처럼 다가온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한 자리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종종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한다. 존재만으로는 환영받지 못했기에, 기능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 한다. 더 잘 만들고, 더 잘 일하고, 더 쓸모 있는 존재가 되면 마침내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헤파이스토스의 기술 역시 그런 절박함의 언어처럼 읽힌다. 그래서 그의 불은 권력의 불꽃이라기보다 결핍의 열기처럼 느껴진다.
제임스 힐먼의 말처럼 인간의 내면이 단일하지 않고 다중심적이라면, 헤파이스토스에게 오래 머무는 나의 시선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한 신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오래 소외되어 온 어떤 원형을 알아보는 일에 가깝다. 버려진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 신이 내게 오래 남는 이유는, 그 신이 내 안 어딘가에서도 아직 완전히 제 몫의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용광로 앞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처를 파괴로 돌리지 않고 끝내 무언가를 만들려는 충동,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쓸모와 창조로 번역해내려는 몸부림이 내게도 아주 낯설지는 않기 때문이다.
헤파이스토스는 영웅이 아니다. 가장 먼저 밀려난 자리에서 자기만의 공방을 세운 존재이다. 그의 위대함은 상처가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상처를 끝내 세계를 부수는 방향으로 돌리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고 남기는 방향으로 견뎌냈다는 데 있다. 어떤 영혼들은 사랑받지 못한 자리에서 파괴를 배우고, 어떤 영혼들은 그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다. 헤파이스토스는 후자에 속하는 신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아픈 신이고, 그런 까닭에 더욱 찬란한 신이다. 앞으로도 내게 그는 기술의 신이라기보다,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끝내 창조의 언어로 바꾸어낸 위대한 영혼으로 남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