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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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게 되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

— 신유진, 《나를 균열내기》를 읽고

처음에는 이 책을 작가론 모음처럼 읽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이 많았고, 그 이름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카뮈, 사강, 아고타 크리스토프, 아니 에르노, 에두아르 루이, 다니엘 페나크, 밀란 쿤데라, 엘렌 식수. 이들은 모두 다른 언어와 시대와 몸을 통과해온 작가들이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그들을 묶는 하나의 질문이 또렷해졌다.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

재능으로 쓰는가. 상상력으로 쓰는가. 문장력으로 쓰는가. 물론 그 모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게 남은 대답은 조금 달라졌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통과한 세계의 균열로 쓴다. 고통, 계급, 몸, 언어, 성별, 욕망, 수치심, 상실, 사랑. 이 모든 것들이 한 사람 안에 쌓였다가 어느 순간 문장의 형태로 흘러나온다. 다만 좋은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토해내지 않는다. 삶의 파편을 다시 배치하고, 질문하고, 덜어내고, 구조화한다. 그러므로 작법이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삶이 나를 통과한 뒤 남긴 잔해를 어떤 형식으로 다시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붙든 것은 카뮈였다. 카뮈의 부조리는 철학적 개념이기 전에 몸의 감각이었다. 눈을 멀게 하는 빛, 숨을 조이는 더위, 지친 육체. 인간은 생각으로만 세계를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통과하는 존재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조차 태양 아래에서는 추상적인 애도의 언어가 아니라 버텨내야 할 열기와 피로가 된다. 그래서 카뮈의 소설 속 인간은 세계의 냉혹함 앞에서 의미를 쉽게 얻지 못한다. 세계는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무응답 앞에서 인간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이 질문이 좋았다. 세계가 고통에 응답하지 않아도 굴복하지 않는 것. 부조리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부조리 안에서 끝까지 인간답게 걷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삶의 방식이라면, 작법 역시 이와 닮아 있다. 글쓰기는 세계가 주지 않은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의미 없음의 한복판에서도 끝내 말을 잃지 않는 일이다. 삶이 나를 설득하지 못할 때에도 내가 나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문장을 세우는 일이다.

사강의 대목에서는 조금 웃음이 났다. 사강에 대해 너무나 사강다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작가. 젊음, 쾌락, 허무, 사랑, 지루함, 도박 같은 단어들과 함께 기억되는 사람. 그러나 이 책은 사강을 단순한 천재 소녀나 시대의 스캔들로 읽지 않는다. 사강이 젊어서 매혹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감각을 누구보다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사유의 밀도다. 어린 작가도 세계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내면 한 시대를 대변할 수 있다. 반대로 오래 산 사람도 자기 삶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작가의 나이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좋은 글은 연륜의 자동 산물이 아니다. 경험이 많다고 해서 곧바로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은 그 자체로는 원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어떤 문장으로, 어떤 거리로, 어떤 구조로 바라보느냐가 작가를 만든다. 사강은 너무 이른 나이에 자기 시대의 공허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가볍고 우아한 문장으로 붙잡았다. 가벼움은 깊이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어떤 가벼움은 오히려 무거운 것을 견디기 위해 고안된 가장 섬세한 형식일 수 있다.

그르니에의 장에서는 ‘자기 안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이 머리에 남았다. 낯선 곳을 꿈꾼다는 것은 단순히 멀리 떠나고 싶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규정해온 기억과 관계와 역할에서 벗어나,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고 싶다는 뜻일 수 있다. 그르니에에게 여행은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름들을 하나씩 벗겨내는 일이었다. 낯선 곳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자기 안의 더 깊은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과 닮아 있다.

나는 때때로 먼 곳을 꿈꾼다. 나를 정의하는 기억과 관계를 벗어난 곳.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상상. 그곳에서 나는 누구일까. 이름도 역할도 잠시 내려놓은 채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르니에를 읽으며 깨달았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고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불필요한 것을 깎아내어 투명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작법 역시 그렇다. 좋은 글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덜어내고, 비워두고, 침묵이 머물 자리를 만든다. 글쓰기란 결국 나를 더 많이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가리고 있던 것들을 걷어내는 일일 수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앞에서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는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은 작가가 아니라, 어쩌면 그 장벽을 자기 문체의 핵심으로 삼은 작가였다. 모국어를 떠나 프랑스어라는 낯선 언어 안에서 글을 쓴다는 일. 그것은 단순한 외국어 글쓰기가 아니라 존재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경험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결핍을 감추지 않았다. 화려한 수사를 포기하고, 짧고 건조하고 무자비한 문장으로 전쟁과 고립과 상실을 썼다. 그 불완전한 언어가 오히려 그의 대표작을 만들었다.

이 점이 내게는 몹시 경이로웠다. 나는 오래도록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고 싶어했다. 더 정확하게, 더 풍부하게, 더 자유롭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억지로 흉내 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남은 것, 자신이 겨우 붙들 수 있는 것, 그 핵심만을 문장으로 세웠다. 결핍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결핍의 모양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약점은 제거해야 할 흠이 아니라, 가장 고유한 문체가 시작되는 자리일 수 있다.

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를 읽는 대목에서는 내 아비투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래전에 가족을 떠났지만, 그곳의 모든 것이 여전히 내 몸에 새겨져 있다. 책임을 먼저 떠올리는 습관, 돈 앞에서 긴장하는 몸, 가족을 위해 견뎌야 한다고 믿었던 시간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말투와 감각.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제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출발한 세계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세계에 영원히 감금되는 존재는 아니다.

에르노와 루이는 계급을 개인의 상처로만 고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몸에 새겨진 사회적 흔적을 해부한다. 그래서 그들의 글쓰기는 복수도 미화도 아니다. 떠나온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가 자신에게 남긴 언어와 감각과 수치심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작법적 태도로 다가왔다. 자기 삶을 쓴다는 것은 “나는 이렇게 아팠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왜 그런 아픔이 가능했는지, 어떤 구조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이 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기서사는 위험하면서도 필요하다. 나의 경험 안에는 언제나 타인의 삶이 포함되어 있다. 가족, 계급, 지역, 성별, 노동, 돌봄, 관계. 내가 나를 말하는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까지 함께 말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서사는 윤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세계의 안쪽을 증언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내가 살아온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나를 가둔 세계였지만, 동시에 내가 끝내 떠나온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글쓰기는 떠나온 세계를 다시 불러와, 그곳의 언어와 경험을 문학의 중심으로 옮겨놓는 작업일 수 있다.

다니엘 페나크의 몸에 대한 사유도 인상적이었다. 몸은 정신을 운반하는 껍데기가 아니다. 몸은 세계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장소다. 우리는 마음으로 슬퍼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슬픔은 먼저 몸에 온다. 목이 막히고, 배가 아프고, 어깨가 굳고, 잠을 잃는다. 기쁨도 분노도 수치심도 마찬가지다. 몸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통과하고, 노화하고, 병들고, 소멸한다. 삶의 의미를 성취에만 둔다면 몸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배반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경험에 둔다면, 몸은 해석해야 할 사건이 된다.

이 대목은 내게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반려묘들을 돌보며 몸의 언어를 배웠다. 아픈 몸은 말보다 먼저 신호를 보낸다. 먹지 않는 것, 숨이 다른 것, 눈빛이 흐려지는 것, 가만히 웅크리는 것. 돌봄이란 그 미세한 언어를 읽어내는 일이다. 어쩌면 글쓰기 역시 비슷하다. 말이 되기 전의 감각, 아직 문장이 되지 않은 통증, 설명보다 먼저 찾아오는 몸의 반응을 알아차리는 일. 몸을 세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세계를 더 정확히 읽는다. 작가는 관념으로만 쓰지 않는다. 몸으로 먼저 겪은 뒤, 뒤늦게 문장으로 이해한다.

쿤데라의 장에서는 작법이라는 말이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감정을 쏟아내는 그릇이 아니라 질문을 조직하는 구조였다. 그는 소설을 음악처럼 생각했다. 하나의 주제가 변주되고, 반복되고, 다른 인물의 시선 속에서 새롭게 울린다. 좋은 소설은 정답을 향해 직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답을 유예하고, 관점을 뒤집고, 비극 속에서 희극을 발견하며, 인간의 우스꽝스러움과 존엄을 동시에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내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많은 초고들을 떠올렸다. 진심은 있었지만 구조가 없었던 글들. 감정은 넘쳤지만 질문이 정리되지 않았던 이야기들. 인물은 아팠지만 그 아픔이 어떤 형태로 독자에게 도달해야 하는지 몰랐던 시간들. 쿤데라는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소설은 감정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고. 감정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형식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집을 짓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 말은 지금의 내게 특히 중요하다. 예전의 나는 이야기가 밀려와서 썼다. 쓰고 싶어서라기보다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서 썼다. 그런 시절의 글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통제되지 않은 생명력,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장면들, 나도 모르게 나를 드러내는 인물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쓰게 되는 것들에서 쓰는 것들로 옮겨가고 있다. 밀려오는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어떤 구조로 세울지 생각한다. 인물의 고통을 어떻게 배치할지, 독자가 어디에서 숨을 쉬고 어디에서 무너져야 할지, 하나의 이야기가 어떤 질문으로 남아야 할지 고민한다. 이것은 영감의 상실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이동일 것이다. 수동적 작가에서 능동적 작가로.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이 책의 또 다른 큰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예전부터 “여성적인 글쓰기”라는 말을 경계했다. 그것이 자주 감상적이고 사적인 글, 혹은 작고 부드러운 글이라는 식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이 쓴 글이라는 좁은 규정이 아니라, 기존 언어의 질서를 해체하고 억압된 몸과 감각과 무의식의 목소리를 문장 안으로 들여오는 일이다.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이미 세계의 위계가 들어 있다.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지,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침묵해야 하는지, 어떤 몸과 욕망이 정상으로 인정받고 어떤 감각이 부끄러운 것으로 밀려나는지.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바로 그 언어의 감옥을 의심한다. 자기 안의 가장 은밀한 고통을 꺼내는 일이 ‘나’라는 벽을 허무는 일이며, 그 벽을 넘어 타자와 만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내가 왜 소설 속 인물들에게 나를 담아왔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 속에서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는지도 모른다. 버려진 아이, 너무 오래 참은 아이,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사랑을 믿지 못하는 아이, 몸으로 먼저 세상의 폭력을 배운 아이, 자기 존엄을 되찾기 위해 뒤늦게 말을 배우는 아이. 나는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을 안아주던 손이 결국 나에게도 닿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내가 캐릭터에 나를 담는 일은 도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무너뜨렸던 세계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현실에서는 너무 늦게 도착한 위로를 이야기 안에서는 제때 도착하게 하는 일. 현실에서는 끝내 받지 못했던 이해를 인물에게는 건네주는 일. 그것은 사적인 위안이면서 동시에 작법이었다. 문학은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를 다른 형태로 다시 살게 한다. 개인의 고통을 보편의 언어로 확장시키고, 나만의 방이라 생각했던 곳에 누군가도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작법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작법은 냉정한 기술이 아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진심도 아니다. 작법은 고통을 견디는 구조이고, 기억을 다루는 거리이며, 결핍을 문체로 바꾸는 선택이다. 몸의 감각을 듣는 일이고, 계급의 흔적을 해부하는 일이며, 언어의 감옥을 의심하는 일이다. 또한 사랑하는 인물들을 함부로 구원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세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안다. 좋은 글은 단지 잘 쓴 문장들의 모음이 아니다. 좋은 글은 한 사람이 자기 삶의 폐허에서 끝내 세운 견고한 장소다. 그곳에는 통증이 있고, 수치심이 있고, 부조리가 있고, 몸의 기록이 있고, 계급의 흔적이 있고, 사랑의 잔해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는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쓰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너무 빨리 위로하지도 않고, 하나씩 문장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작가론이 아니라 작법론으로 남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의 작법론이다. 어떻게 살아야 쓰게 되는가. 어떻게 써야 살아낼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이 책의 끝에서 서로를 마주 본다.

나는 오래도록 쓰게 되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밀려오면 썼고, 인물이 찾아오면 썼고, 슬픔이 나를 밀어붙이면 썼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밀려오는 것을 받아 적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어떤 구조로 세워야 하는지 고민하고, 어떤 문장으로 남길지 선택하는 사람. 상처를 상처로만 두지 않고, 그것이 통과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드는 사람.

작가는 자신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과한 세계의 파편을 견딜 만한 형식으로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작법이란 바로 나를 균열낸 모든 것들로부터, 끝내 나만의 문학을 짓는 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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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노화 - 이시형의
이시형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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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 이시형, 『행복노화』를 읽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같은 90대의 몸을 지닌 두 사람을 생각했다.


한 사람은 저자인 이시형 박사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노년을 하나의 실천적 지혜로 바꾸어 독자 앞에 내놓는다. 그의 문장은 노년의 몸에서도 정신이 얼마나 또렷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나이 들었다는 사실이 곧 사유의 종말은 아니며, 노화가 곧 인간의 폐기처분선고는 아니라는 것을 그의 존재 자체가 증언한다.


다른 한 사람은 내 시아버님이다. 역시 90대이지만, 파킨슨병으로 근손실이 심해져 누워 계시고, 섬망 증세와 중증 치매를 겪고 계신다. 같은 세월을 살았으나 두 노년의 풍경은 너무 다르다. 한쪽에는 아직 언어와 판단과 사회적 역할이 남아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몸의 붕괴와 인지의 어둠이 있다. 이 대비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추었다. 노화란 정말 무엇인가. 단지 오래 산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삶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이 질문을 함부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파킨슨병과 치매, 섬망과 근손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복합적인 질환이다. 병든 노년을 “관리를 못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늙고 아픈 몸을 다시 한 번 모욕하게 된다. 인간의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유전, 질병, 환경, 경제력, 돌봄의 조건, 우연한 사고, 의료 접근성, 살아온 노동의 강도까지 모두 몸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시아버님의 노년을 실패한 노년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한 인간이 통과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생의 말년일 뿐이다.


그럼에도 『행복노화』가 내게 깊이 와닿은 이유는, 노화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도 그 속도와 방향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화를 병으로만 보지 않는다. 노화는 누구나 통과하는 생명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똑같이 펼쳐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일찍 지치고,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배우고 쓰고 일한다. 어떤 몸은 질병 앞에서 빠르게 무너지고, 어떤 몸은 예비력을 가지고 버틴다. 그 차이는 단지 유전자의 차이만이 아니라, 살아온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다.


특히 후성유전의 관점은 내게 매우 유용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과거에는 유전자가 인간의 노화와 질병을 거의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책은 유전적 요인 못지않게 식습관, 운동, 수면, 스트레스 관리, 인간관계, 환경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타고난 유전자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떤 유전자가 켜지고 어떤 위험이 줄어드는지는 오늘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이 말은 노화가 숙명이라는 체념에서 우리를 조금 구해낸다. 몸은 이미 주어진 운명이지만, 생활은 그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나는 여기서 내 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나의 과체중은 단순히 의지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대사와 환경과 습관이 뒤엉킨 신호에 가깝다. 나는 오랫동안 몸을 도덕 점수표처럼 읽어왔다. 날씬한 몸은 성실하고, 살찐 몸은 게으르며, 병든 몸은 관리를 못 한 몸이라고 쉽게 판단했다. 하지만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과거의 노년이 굶주림과 추위, 전쟁과 피난, 산업화와 과로가 새겨진 몸이라면, 오늘의 중년과 예비 노년은 과잉과 피로,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초가공식품과 운동 부족이 새겨진 몸이다. 몸은 도덕 점수표가 아니다. 몸은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기록이다.


건강한 노화란 몸을 미워하며 벌주는 일이 아니라, 몸을 다시 읽고 조율하는 일이어야 한다. 당과 정제 탄수화물, 초가공식품을 줄이는 일은 단지 살을 빼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의 대사를 다시 안정시키고, 노화를 촉진하는 생활의 흐름을 조금씩 되돌리는 일이다. 운동 역시 젊음을 과시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노년의 예비력을 만드는 일이다. 수면은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의 토대이고, 스트레스 관리는 사치가 아니라 뇌와 몸을 지키는 방어선이다.


책에서 말하는 예비력의 개념도 인상 깊었다. 인간은 평소 가진 힘을 모두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 대비한 여분의 힘을 남겨둔다. 젊을 때는 그 여분이 넉넉해 무리해도 금방 회복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예비력은 줄어든다. 그래서 노화 관리는 젊어 보이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아플 때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일이다. 근육, 수면, 식사, 관계, 경제적 안정, 사명감은 모두 노년을 장식하는 요소가 아니라 생의 완충지대다.


이 책은 행복노화의 조건으로 건강, 장수, 경제적 여유, 좋은 인간관계, 사회성 혹은 사명감을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내 삶의 방식도 생각했다. 내게 좋은 관계란 반드시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는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좋은 인간관계만큼이나 좋은 고양이 관계를 가질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들을 돌보는 일은 단순한 애호가 아니다. 밥을 챙기고, 아픈 몸을 살피고, 이름을 불러주고, 작은 변화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은 나를 고립시키기보다 오히려 삶 쪽으로 붙들어준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인간을 덜 늙게 한다. 적어도 마음이 굳어버리는 속도를 늦춘다.


나는 노화가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몸은 변한다. 체력은 줄고, 회복은 느려지고, 예전처럼 무리할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러나 내가 아직 도전할 수 있고, 나를 관리할 수 있으며,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나는 완전히 늙은 것이 아니다. 젊음은 나이의 소유가 아니라 재시도의 능력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몸이 예전과 달라졌다면, 그 몸에 맞는 전략을 다시 짜면 된다. 늙음은 가능성의 종료가 아니라 전략의 변경이다.


시아버님의 노년과 이시형 박사의 노년은 내게 삶의 두 끝을 보여준다. 한쪽은 우리가 피하고 싶지만 언젠가 마주할 수 있는 취약성이고, 다른 한쪽은 노년에도 가능한 품격과 지성의 증거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워만 하는 것도,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의 생활을 조금씩 바꾸는 일이다. 당을 줄이고, 초가공식품을 멀리하고, 잠을 회복하고, 몸을 움직이고,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공부하고, 돌보는 관계를 지키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예의다.


『행복노화』는 늙지 않는 법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늙어간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되, 그 과정을 방치하지 말라고 말하는 책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선택할 수 없고, 이미 살아온 시대를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식사, 오늘의 걸음, 오늘의 잠, 오늘의 마음가짐은 선택할 수 있다. 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늙음을 조금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노화는 병이 아니다. 다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생의 가장 오래된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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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방 (초판 한정 양장) ㅣ 특서 청소년문학 48
뤼도비크 르콩트 지음, 장소미 옮김 / 특별한서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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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이 너무 무서워졌을 때


 -뤼도비크 르콩트, 『나만의 방』을 읽고



처음에는 공황장애에 가까운 이야기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아이. 현관문 앞에서 몸이 굳고, 가슴이 뛰고, 호흡이 흐트러지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아이. 병원 검사로는 뚜렷한 이상이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그는 아프다. 열도 없고, 상처도 없고, 피도 나지 않지만, 문밖으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병명을 이렇게 말한다. 

캐빈 증후군.


나는 그 단어를 몰랐지만, 주인공이 느끼는 감각은 알 것 같았다. 집이라는 공간이 처음에는 대피소였다가, 어느 순간 감옥이 되는 일.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일. 내가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상태를 타인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막막함이라는 것까지도. 


소설 속 주인공은 말한다. 자신의 상태를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렵다고.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학교에 가기 싫어 불안을 핑계 삼는 아이처럼 보일 수 있다고. 버릇없이 자란 청소년의 변덕으로 치부될 수 있다고. 이 대목이 나는 유난히 아팠다. 보이지 않는 고통은 너무 쉽게 의심 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가 나야 상처를 믿고, 깁스를 해야 통증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음이 몸을 붙잡는 병은 대개 증명하기 어렵다. 아픈 사람은 아픔과 싸우는 동시에, 그 아픔이 진짜라는 사실까지 설명해야 한다.


나도 비슷한 시간을 거쳐온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때까지 내게 공부는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공부는 내 자존심이었고, 내가 나를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 나는 잘 배우는 사람, 오래 앉아 견디는 사람, 시험이라는 문 앞에서 결국은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사법고시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험 하나에 떨어졌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았다. 내 안에서는 그 실패가 이상한 속도로 번역되었다.


나는 시험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자다. 나는 공부도 못 해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잔인한 비약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그것이 논리처럼 느껴졌다. 실패는 사건이 아니라 판결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반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누가 나를 가둔 것도 아니고 문이 잠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나갈 수 없었다. 밖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길도, 사람도, 햇빛도. 달라진 것은 나였다. 실패 이후의 나는 문밖의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만의 방』의 초반부를 읽을 때 나는 이 이야기를 개인의 불안과 은둔, 실패와 회복의 이야기로 먼저 읽었다. 하지만 책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화자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학교가 싫어서도, 친구 관계가 힘들어서도, 막연한 사춘기의 불안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몸을 멈춰 세운 것은 기후 변화에 대한 공포였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갑자기 더 넓어진다. 화자는 처음부터 무력했던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언가를 해보려 했다. 자신만의 목표 목록을 만들고, 환경 보호를 실천하고, 작은 행동을 통해 세계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려 했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개인의 작은 실천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이 눈앞에 놓인다. 빙하가 녹고, 생태계가 무너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이야기는 뉴스 속 정보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아이의 심장과 호흡과 다리로 내려온다.


기후 위기는 숫자로 발표되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몸의 증상으로 도착한다. 지구온난화는 보고서의 문장이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현관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공포가 된다. 이 책이 날카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만의 방』은 한 아이의 캐빈 증후군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가족 문제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이 아이를 방 안에 가둔 것은, 자신이 살아갈 세계가 이미 망가지고 있다는 감각이다. 그는 게으른 것이 아니다.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아직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공포를 너무 정직하게 받아버렸다.


어른들은 자주 아이들에게 말한다. 환경을 생각하라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러나 정작 그 아이들이 정말로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 공포를 얼마나 감당해주고 있을까. 기후 위기는 아이들에게 추상적인 사회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아가야 할 시간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다. 어른들에게 기후 변화가 “앞으로 조심해야 할 문제”라면, 아이들에게 그것은 “내가 살아갈 세계가 정말 괜찮은가”라는 생존의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질문은 내게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아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아이가 밖을 두려워하게 만든 세계가 문제인가.


물론 아이는 다시 움직여야 한다. 방 안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회복을 단순한 의지의 문제로 만들지 않는다. “용기를 내라”, “밖으로 나가라”, “행동하라”는 말은 쉽다. 그러나 말은 행동보다 쉽다.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화자가 자신의 문제가 기후 변화 공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병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 낫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름을 알면, 자신을 덜 미워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겪은 것은 기후 불안이 아니라 실패 이후의 자기혐오와 사회 복귀에 대한 공포였다. 소설 속 화자와 나는 서로 다른 이유로 방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닮은 점이 있었다. 바깥이 너무 커졌다는 것. 그리고 그 바깥을 감당할 언어가 한동안 없었다는 것. 


나에게 바깥은 다시 평가받는 세계였다.

화자에게 바깥은 무너져가는 행성이었다.

둘 다 한 사람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


그래서 이 책의 회복은 거창한 해결책으로 오지 않는다. 처음의 변화는 말하기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친구 마농에게 자신이 나갈 수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하고 나서 홀가분해진다. 다음에는 그 스스로의 말대로 제르맹 선생님에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주 작은 통로가 열린다. 방 밖으로 나가는 첫걸음은 언제나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때로는 내가 왜 무서운지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이다. 내 공포가 변덕이나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부터 인정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나만의 방』은 기후 위기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 자신의 아픔을 설명하지 못해 더 깊이 침묵하는 사람, 세상의 거대한 문제를 너무 개인적인 방식으로 앓아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자주 아픈 사람에게 증명을 요구한다.

왜 못 나가느냐고 묻는다.

왜 그냥 하지 못하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문은 손잡이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무게로 닫혀 있다.

『나만의 방』은 그 닫힌 문 앞에 선 아이를 함부로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아이의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가 묻는다. 너는 언제부터 무서웠니. 무엇이 너를 여기까지 밀어 넣었니. 그리고 이제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니.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오래전의 나를 떠올렸다. 실패 이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나. 내가 나를 실패자라고 부르던 시간.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것 같아 더 깊이 숨어들었던 시간. 그리고 동시에,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지 않은 위기의 결과를 살아내야 한다. 어른들이 미뤄온 문제를 미래라는 이름으로 떠안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한 아이의 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아이를 아프게 만든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방 안에 갇힌 아이를 보며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나오지 못하느냐고 묻기 전에,

무엇이 저 아이에게 바깥을 견딜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는지를.

그리고 어쩌면 회복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아이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말할 수 있게 기다리고 아픔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먼저 믿어주는 것.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 개인의 실천만을 요구하는 대신, 함께 책임지는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나만의 방』은 말한다.

방 안에 들어간 사람은 끝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어쩌면 누구보다 먼저 세계의 균열을 감지한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함께 들어줄 누군가의 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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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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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

— 권혁란, 《이름의 빈자리에》를 읽고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누군가를 세계 안으로 불러 세우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고, 한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붙들어두는 작은 닻이다. 권혁란의 《이름의 빈자리에》는 괴물, 여성, 망자, 동물, 문학과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이름이 인간을 어떻게 만들고, 지우고, 연결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이 책은 이름을 둘러싼 인문학적 에세이이면서 동시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기록이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읽을 때도 괴물이 무섭다기보다 슬펐다. 그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이름도 받지 못했고, 창조주에게 부정당했으며, 인간들에게 반복해서 배척당했다. 프랑켄슈타인을 죽일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요구한 것은 복수 이전에 관계였다. 자신과 같은 존재 하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동료 하나,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유대. 괴물에게 필요했던 것은 지배나 살육이 아니라 곁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라는 크리처의 말은 오래 남는다. 이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호칭을 생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책임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너는 내 세계에 등록되지 않았다.” “너의 고통은 나와 관계없다.” 그런 선언이 이름의 부재 안에 숨어 있다. 결국 괴물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이름을 주지 않는 세계, 책임지지 않는 창조주, 얼굴을 보지 않고 혐오부터 던지는 인간들이 한 존재를 괴물로 만든다.


라이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카는 이름을 얻었지만 자기 삶의 주인은 되지 못했다. 인간은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겼지만, 그 이름은 보호의 언어가 아니라 기록의 언어였다. ‘최초의 우주 개’라는 찬란한 수식어 뒤에는 한 생명의 공포와 외로움이 있었다. 이름이 있어도 구원받지 못한 존재. 이름이 남았지만 삶은 빼앗긴 존재. 이 책이 묻는 것은 바로 그런 자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에게 이름을 붙이고, 누구의 고통은 이름 뒤에 숨겨왔는가.


책을 읽으며 나는 며칠 전 사라졌던 아파트 길고양이 솔이를 떠올렸다. 솔이는 집 앞 상가 펍에서 밥을 먹고, 중성화도 마친 채 사람들 곁에서 조심조심 살아가던 아이였다. 며칠째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중, 한 할머니가 고양이 때문에 냄새나서 못 살겠다며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싶었지만, 퇴근길에 펍 사장님께 물어보니 그 할머니가 솔이를 우산으로 때렸고, 아이가 다쳐 지금은 지인 집에서 임시보호 중이라고 했다.


그 할머니에게 솔이는 이름 없는 길고양이였을 것이다. 골칫거리, 냄새, 불편함, 쫓아내야 할 대상. 그러나 우리에게 솔이는 솔이다. 이름을 부르면 멀리서 인사하듯 뛰어오던 아이. 추운 날 캔을 따주면 혼자 다 먹지 않고 친구를 부르러 가던 아이. 밥 먹는 동안 곁을 지켜주면 고맙다는 듯 아파트 현관까지 재잘거리며 배웅해주던 영특한 아이. 이름이 붙는 순간, 생명은 풍경에서 관계가 된다. 관계가 되는 순간, 그 존재의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데려온 아이들의 이름도 떠올렸다. 우리 라온이는 처음 왔을 때 이름조차 없었다. 해랑이는 ‘츄’처럼 발성기호에 가까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받아온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시 지어주었다.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라는 뜻으로 보담이, 세상의 중심이 되라는 뜻으로 가온이, 해처럼 빛나는 내 작은 호랑이라는 뜻으로 해랑이, 사랑받은 티가 나라는 뜻으로 티나, 길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은 잊고 꽃길만 걸으라는 뜻으로 꽃길이, 네가 별이 될 때까지 내가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키움이. 그렇게 공들여 고민한 이름을 하나씩 붙여주었다.


그때 내가 한 일은 단순히 새 호칭을 고르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이다. “너는 이제 이전의 이름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너는 함부로 불리던 존재가 아니라, 내가 오래 생각하고 부를 존재다.” “너의 삶이 이 이름처럼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란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내 세계 안에 들이고, 그 삶에 책임의 실을 묶는 일이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말하듯,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꽃이 된다. 그러나 이름을 부른 사람에게는 책임도 생긴다. 솔이를 솔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배고픔과 두려움과 부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라온이와 해랑이에게 이름을 다시 지어준 순간, 그 아이들은 더 이상 이전의 익명 속에 놓인 존재가 아니었다. 이름은 사랑의 시작이면서 책임의 시작이다.


《이름의 빈자리에》가 좋았던 이유는 이 책이 이름을 낭만적인 언어로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은 때로 소유의 표식이 되고, 삭제의 도구가 되며, 누군가를 배제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름은 한 존재를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리는 손이 될 수도 있다. 이름 없는 존재는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 그 존재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얼굴이 되고, 기억이 되고, 관계가 되고, 마침내 내가 지켜야 할 세계의 일부가 된다.


결국 이 책이 내게 남긴 질문은 하나였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누구를 이름 없는 채로 내버려두는가. 괴물이라 불린 존재들, 실험과 기록 뒤에 남은 동물들, 길 위에서 민원으로 취급되는 생명들, 그리고 아직 자기 이름으로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빈자리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먼저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 이름에 담긴 삶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일.


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은, 그 이름을 끝까지 불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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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
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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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멀고도 가까운 단어다


— 이창곤,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를 읽고




일반 국민에게 정책은 멀고도 가까운 단어다. 정책 때문에 내 삶이 바뀐다. 월급명세서의 공제 항목, 병원비 부담, 전기요금 고지서, 아이의 돌봄과 교육 조건, 주거비와 노후의 불안까지, 정책은 매일 우리의 일상으로 도착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정책은 내 삶의 조건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의 과정은 대개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로웠다.


이창곤의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는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을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한겨레》 기자로 일하며 복지,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 정책 이슈를 취재했고, 이후 시민단체와 정부 위원회 활동을 통해 정책 결정 과정의 안팎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정책 해설서가 아니다. 일반 시민에게는 멀게 느껴지는 정책 결정과 실행의 메커니즘을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권력관계와 책임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정책 입문서이자 비판적 시민 교양서에 가깝다.


이 책의 핵심 문장은 분명하다. 정치는 멀고 정책은 가까운가. 아니다. 정책은 근본적으로 정치다. 정책은 단순한 행정 절차나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한 사회의 자원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의 고통이 우선순위에 놓이는지, 누구의 삶이 보호받고 누구에게 부담이 전가되는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을 하나씩 불러낸다. 대통령과 대통령실, 국회와 정당, 경제 부처와 사법부, 싱크탱크, 노동조합, 사용자 단체, 시민단체, 이익집단, 언론, 학계, 그리고 시민까지. 정책은 이들이 서로 충돌하고 타협하며 만들어내는 정치의 산물이다.


책의 1장은 정책의 정치학을 다룬다. 왜 정책에 주목해야 하는지, 대한민국 정책 과정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무엇인지, 정책은 왜 근본적으로 정치인지 묻는다. 특히 저출산 정책과 의료보험 정책의 사례를 통해 정책의 출발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 적절한 타이밍에 대응하는 능력, 그리고 정책 의제로 올릴 것과 밀어낼 것을 결정하는 권력 작용이 정책의 성패를 가른다.


저출산을 다룬 부분은 특히 인상 깊었다. 나는 그동안 저출산을 주거, 고용, 교육비, 돌봄의 문제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는다. 정책은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저출산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재난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울리고 있던 경보를 정책이 제때 듣지 못한 결과였다. 출산율이 이미 인구 대체 수준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산아 제한 정책의 관성은 오래 지속되었고, 초저출산이 현실이 된 뒤에야 국가적 대응이 본격화되었다. 뒤늦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삶의 구조는 이미 무너진 뒤였다.


더 시원했던 지적은 저출산 정책의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저출산 대책은 “아이를 낳으면 보상하겠다”가 아니라 “아이를 낳아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가 되었어야 했다. 사람들은 단지 보상을 받기 위해 아이의 생애를 거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출산은 몇백만 원의 지원금으로 결정되는 소비 선택이 아니다. 주거, 노동시간, 고용 안정, 돌봄, 교육, 경력, 노후까지 삶 전체가 걸린 결정이다. 아이는 통계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감당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태어난다.


책의 2장은 정책 결정의 핵심 주체들을 들여다본다. 대통령은 정책 성공과 실패의 가장 큰 변수이자 최고 결정자다. 대통령 비서실은 정책 결정의 컨트롤 타워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민의를 차단하는 벽이 될 수도 있다. 경제 부처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정책 행위자이고, 정당은 시민의 고통과 요구를 정책으로 번역해야 하지만 한국 정당은 자주 정책 정당이 되지 못한다. 국회와 사법부 역시 정책 결정과 감시, 때로는 사법적 정책 결정의 주체가 된다. 이 책은 정책 실패를 단순히 한 명의 무능이나 한 부처의 실수로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권력기관과 행위자가 얽힌 정책 생태계의 오작동을 보여준다.


책의 3장은 시민사회 정책 행위자들을 다룬다. 시민단체, 노동조합, 사용자 단체, 이익집단, 대학 교수, 언론, 시민이 어떻게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거나 배제되는지 살핀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정책은 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시민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선거 때 대표자를 뽑지만,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지 알기 어렵다. 결정 과정은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정책 실패의 책임은 개인의 불운이나 시대적 한계로 흩어진다. 시민은 정책의 대상이 되지만, 자주 정책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며 며칠 전에 끝난 지방선거 공약이 떠올랐다. 어느 교육감 후보가 특정 동네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언뜻 들으면 좋은 말이었다. 학교는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언제나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질문이 생겼다. 그 동네에는 이미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여럿 있었고, 아파트도 대부분 들어선 상태라 새 학교를 지을 만한 부지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존 건물을 사들이거나 토지를 매입해야 할 텐데, 이미 땅값이 오를 만큼 오른 지역에서 그것이 교육청이나 교육부 예산으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었다.


이때 필요한 질문은 단순하다. 어디에 지을 것인가. 누구의 돈으로 지을 것인가. 교육청 단독 권한으로 가능한가. 실제 수요는 무엇인가. 과밀 문제인가, 통학 불편인가, 특정 학교 선호의 문제인가. 증축이나 학군 조정 같은 대안보다 학교 신설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선거 공약은 자주 이런 질문을 건너뛴다. “학교를 세우겠다”는 말은 쉽고 매력적이지만, 부지와 재원과 권한과 수요 분석이 빠진 순간 그것은 정책이라기보다 욕망을 자극하는 정치적 구호가 된다.


이 사례는 이 책이 말하는 정책 실패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책 실패는 집행 단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때로 실패는 공약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은 약속, 비용 부담을 설명하지 않는 구호, 특정 지역의 기대를 자극하면서도 전체 시민이 부담해야 할 재정 책임은 흐리는 정치적 언어 속에서 이미 실패의 씨앗이 놓인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공약에 대해 시민과 언론이 충분히 묻지 않는 현실이다. 우리는 정책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정작 그 정책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지 따지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다.


정책은 선한 명분만으로 좋은 정책이 되지 않는다. 좋은 정책이라면 반드시 구체적인 장소, 예산, 권한, 수요, 대안 비교를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공약은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설계도가 아니라 선거를 통과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정치수단으로 남을 위험이 크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책 실패를 욕하기는 쉽지만, 정책이 실패하기 전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의 4장은 정책 생태계의 혁신과 뉴비전을 향한다. 저자는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구조적 모순을 해부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민주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방향을 모색한다. 정책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이해관계자, 정치권력, 전문가, 시민이 복잡하게 얽혀 작동하는 유기적인 생태계다. 따라서 더 나은 정책을 위해서는 단순히 유능한 한 사람, 좋은 아이디어 하나, 더 많은 예산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더 투명해져야 하고, 시민이 배제되지 않아야 하며, 실패를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정책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회는 위험하다. 정책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정이 무엇인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부담을 지는지 알지 못하면 시민은 자기 삶을 방어할 수 없다. “왜 이 정책인가?”,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비용을 치르는가?”라는 질문은 전문가만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정책은 멀다. 복잡한 법률과 예산, 관료 조직과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책은 너무나 가깝다. 결국 내 삶의 조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멀고도 가까운 정책의 블랙박스를 열어 보자고 말한다. 더 많은 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한 질문과 더 투명한 결정 과정, 그리고 시민이 사라지지 않는 정책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책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실패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묻고, 시민의 삶을 정책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올 때 비로소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좋은 정책은 위에서 내려오는 완성품이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쌓아 올리는 인고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 시민이 있어야 한다. 정책은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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