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의 주문 - 일하는 여자들을 지탱하는 언어와 관계, 그리고 마음, 개정증보판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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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말하기 전에 미움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

—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을 읽고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바른 말을 잘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상한 말을 이상하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부당한 말, 누군가를 함부로 낮추는 말 앞에서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러나 친인척들은 그런 나를 똑똑하다고 부르지 않았다. 솔직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싸가지 없는 년”으로 통했다.

어른들은 자주 말했다. 여자가 그렇게 따지고 들면 남편 사랑 못 받는다. 미움받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그 말들이 내게 가르친 것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었다. 여자는 말해도 되지만, 너무 정확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자는 생각해도 되지만, 그 생각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만큼 또렷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자는 틀린 말을 바로잡기 전에, 먼저 자신이 미움받지 않을지를 계산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때 몰랐다. 내가 미움받은 것은 말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여자인 내가 너무 똑바로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다혜의 《출근길의 주문》을 읽으며 가장 오래 멈춘 지점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 책은 일하는 여성들의 언어와 관계, 마음과 커리어를 다룬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은 어떻게 말해야 미움받지 않는가.

여성은 너무 세게 말하면 안 된다. 너무 똑똑한 척해도 안 된다. 너무 감정적이면 안 되고, 너무 차가워도 안 된다. 질문을 많이 하면 나댄다고 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소극적이라고 한다. 부드럽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다고 하고, 단호하게 말하면 무섭다고 한다. 남성이 직설적으로 말하면 시원하다, 결단력 있다, 리더답다고 할 수 있는 말이 여성이 하면 예민하다, 까칠하다, 피곤하다는 말로 돌아온다. 그러니 여성은 말하기 전에 먼저 배운다. 미움받지 않는 법을. 자기 말의 모서리를 미리 깎는 법을.

책에서 말하는 쿠션어의 문제는 그래서 단순한 화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쿠션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는데”,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같은 말은 때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말에도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 정직하되 무례하지 않은 말, 정확하되 상대를 함부로 찌르지 않는 말은 분명 좋은 언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완충 장치가 유독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된다는 데 있다.

여성은 자기 의견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과를 배운다. 요구를 해도 부탁처럼 들리게 만들고, 반박을 해도 질문처럼 포장하고, 불쾌함을 말할 때도 상대가 무안하지 않도록 여러 겹의 완충재를 깐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말의 내용보다 말의 태도가 더 크게 심판받는다.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어떻게 말했느냐가, 더 나아가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냐가 문제가 된다.

나는 대학 글쓰기 수업에서 그 이상한 감각을 또렷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그 수업에는 우수 글쓰기 학생에게 일부 수업을 면제하고 논문으로 A+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중간에 그 제도를 받았다. 익명으로 진행된 논설문 쓰기에서 내 글은 주장하는 바가 선명하고 논거가 튼튼한, 남성적인 글쓰기의 전형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2차 익명 수필 쓰기에서는 문체가 수려하고 정서가 아름다운 글쓰기이나 주장하는 바가 약한 게 아쉽고,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쓰는 경향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둘 다 내가 쓴 글이었다.

나는 남자처럼 쓴 것도, 여자처럼 쓴 것도 아니었다. 논설문은 논설문답게 썼고, 수필은 수필답게 썼을 뿐이다. 장르에 맞춰 문체와 구조를 바꾼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글들은 곧장 성별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 주장이 선명하면 남성적이고, 정서가 아름다우면 여성적이라는 식의 분류. 그때 나는 알았다. 글조차 성별로 읽히는구나. 말뿐 아니라 문장에도 성별이 덧씌워지는구나.

그래서 나는 일부러 논문 주제를 산업노동자의 법적 권리와 실태로 잡았다. 젊은 여자는 노동문제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볼 수 있고, 어떤 논리로 말할 수 있으며, 어떤 문제에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내 글이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가 아니라, 내가 세계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출근길의 주문》은 이런 장면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일하는 여성이 겪는 곤란은 단순히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 그 능력이 태도로 심판받기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잘 말하면 건방지고, 조심하면 약하고, 정확하면 차갑고, 부드러우면 만만하다. 여성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말이 놓인 자리까지 함께 평가받는다.

이 문제는 직장에만 있지 않다. 가족 안에도 있다. 시댁에서도 있다. 나는 시댁에 가면 꽤 다른 사람이 된다. 남편에게 깍듯하게 존대하고, 언성을 높이지 않으며, 부탁은 눈빛으로만 한다. 시부모님이 무어라 하시든 대개 “네”라고 답한다. 그러면 나는 참한 며느리가 된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예뻐하신다.

조금 웃기고, 조금 씁쓸하다. 그 “네”가 내 속내의 항복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남편도 안다. 나는 동의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과 쿠션어, 여성성을 활용해 관계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시부모님은 편찮으시고, 시아버님은 파킨슨과 치매가 심하시다. 남편은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부모 간병의 무게를 안고 있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매번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어떤 전투는 이겨도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말의 칼을 칼집에 넣는다. 속내는 타협하지 않지만, 표현은 조절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회가 그 전략을 순함으로 읽는다는 점이다. 내가 “네”라고 말하면 참하다고 한다. 내가 싸우지 않으면 착하다고 한다. 내가 반박하지 않으면 좋은 며느리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성에게 요구되는 좋은 말이란 때때로 좋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침묵이다. 말하지 않는 여성이 사랑받는다. 부드럽게 웃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성이 관계를 망치지 않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렇다고 나는 모든 자리에서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시댁에서는 관계비용을 낮추기 위해 “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터에서는 그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나는 강사였고, 내게는 교육관이 있었다. 이전에 초중등 대상 대형학원에서 일할 때, 학생들의 학력 수준에 맞지 않는 천편일률적인 교육 스케줄에 반발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수준은 달랐고, 필요한 보강도 달랐다. 나는 보강자료를 따로 만들고, 개별 맞춤 수업을 진행했다. 내 판단으로는 그것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자 남자 원장이 말했다. 왜 내 수업에만 들어간 아이들은 반 배정에 따른 강사 교체를 싫어하느냐고. 여자 선생이 학원 방침을 거스르고 그렇게 나대는 거 보기 좋지 않다고 했다. 그 학원에서 나는 왕따였다. 같은 여자 선생들도 나를 미워했다. 그러나 학교별 분반 수업을 주장한 남자 대학생 강사의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그때 나는 뼈아프게 보았다. 같은 개선안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을 얻는다는 것을. 남자가 말하면 건의가 되고, 여자가 말하면 반항이 된다. 남자가 교육 방식의 문제를 지적하면 현장 의견이지만, 여자가 학생에게 맞는 자료를 만들고 수업을 조정하면 나댐이 된다. 내가 한 일의 핵심은 학생의 학습권과 수업의 질이었지만, 그들에게 먼저 보인 것은 “학원 방침을 거스르는 여자 선생”이었다.

말은 내용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누가 말했는지가 평가를 바꾼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아프게 다가온 진실이었다.

스몰토크에 관한 대목도 그래서 불편했지만 정확했다. 한국 사회의 스몰토크는 종종 친근함을 가장한 개인정보 요구가 된다. 나이, 결혼 여부, 자녀 여부, 사는 곳, 학교, 직장, 수입, 배우자의 직업, 자산, 인맥. 이런 질문들은 가벼운 대화처럼 시작되지만 쉽게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표가 된다. 특히 여성은 이런 질문 앞에서 더 자주 해명하는 위치에 선다. 결혼했는가, 아이는 있는가,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시댁에는 잘하는가, 일을 계속할 것인가. 말은 어느새 대화가 아니라 심문이 된다.

좋은 대화는 상대를 빨리 알아내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자신을 드러내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친근함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침범한다. 더 나쁜 것은 그 질문 뒤에 자기 과시가 따라붙는 경우다. 자산, 투자, 수입, 자녀의 성취, 배우자의 직업. 이런 말들은 스몰토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위를 확인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대화가 싫다. 그 불편함은 예민함이 아니라 정당한 경계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에 관한 부분도 오래 남았다. 여성들만 있을 때는 질문이 활발하지만, 남성과 여성이 섞여 있을 때는 여성이 첫 질문자로 나설 확률이 낮아진다는 대목은 많은 것을 말한다. 질문은 단순히 모르는 것을 묻는 행위가 아니다. 질문은 “나도 이 논의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선언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성은 어릴 때부터 질문하는 몸짓조차 조심스럽게 훈련받는다. 너무 나서지 말 것. 분위기를 끊지 말 것. 똑똑한 척하지 말 것. 괜히 말대꾸하지 말 것.

나는 내 말이 잘리는 경험도 자주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결론을 내버리는 일. 내 말을 다 듣기 전에 “그러니까 네 말은 이런 거지”라고 요약해버리는 일. 내가 말하려던 핵심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훨씬 쉽게 받아들여지는 일. 내 문장이 끝까지 갈 권리를 빼앗기는 느낌. 말이 잘린다는 것은 단순한 대화 방해가 아니다. 그것은 내 사고가 완성될 권리를 빼앗기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언어의 문제는 여성에게 더 예쁘게 말하라는 조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이 자기 말의 주도권을 어떻게 잃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언제 쿠션어를 쓸 것인가. 언제 단호하게 말할 것인가. 언제 침묵할 것인가. 언제 “잠시만요,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것인가. 이 구분이 필요하다.

간접화법에 관한 대목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흥미로웠다. 간접화법은 때로 우아하다. 특히 권력관계나 상류층 인사, 조직 내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에서는 말의 힘이 정면충돌보다 우회로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소설에서 권력관계와 상류층 인사를 자주 묘사하기 때문인지, 이 지점은 익숙했다. 내 캐릭터들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지 않는다. 예의와 호칭과 침묵과 시선 속에 진짜 뜻을 숨긴다. 우아한 언사는 힘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힘의 형태를 바꾼다.

하지만 현실의 간접화법은 늘 우아하지만은 않다. 그것이 약자에게만 강요될 때, 간접화법은 배려가 아니라 자기축소가 된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게 만들고, 정확히 요구해야 할 때 부탁처럼 만들며, 분노해야 할 때 미소 짓게 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품위가 아니라 억압이다. 그러므로 좋은 말하기는 무조건 부드러운 말하기가 아니다. 필요한 순간에는 정확해야 하고, 가능한 순간에는 품위 있어야 한다. 상대를 해치지 않되, 진실을 흐리지 않아야 한다.

‘여성적 리더십’에 관한 대목도 답답했다. 왜 여성에게만 리더십 앞에 ‘여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가. 남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면 그냥 리더십인데, 여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면 여성적 리더십이 된다. 이 말은 얼핏 칭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리더십의 표준을 남성으로 두는 오래된 습관이 숨어 있다. 여성 리더가 단호하면 독하다고 하고, 부드러우면 약하다고 한다. 남성이 실패하면 개인의 실패지만, 여성이 실패하면 여성 리더십의 한계처럼 말해진다. 이것은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유리천장만큼이나 유리절벽도 무섭다. 여성에게 높은 자리가 주어지는 순간이 종종 조직이 위태로울 때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평소에는 기회를 주지 않다가, 위기 상황에서 책임을 맡긴다. 성공하면 조직의 성과가 되고, 실패하면 여성의 한계로 기록된다. 여성은 올라가도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다른 방식의 검열대 위에 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같은 생각으로 돌아왔다. 여성적 리더십이 아니라 리더십이면 충분하다. 여성적 말하기가 아니라 말하기면 충분하다. 정확하고 품위 있는 말. 필요할 때 질문하고, 부당할 때 반박하고, 관계비용이 너무 클 때는 전략적으로 침묵하며, 그러나 속내까지는 내어주지 않는 말하기.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는 “네”라고 말하는 참한 며느리가 되었고, 어떤 자리에서는 “그 방식은 학생에게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나대는 여자 선생이 되었다. 이상한 것은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붙이는 이름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같은 사람의 같은 판단력도 어떤 관계 안에서는 참함이 되고, 어떤 관계 안에서는 나댐이 된다. 그러니 문제는 내 말 하나에만 있지 않다. 그 말을 듣는 세계의 귀에도 있다.

《출근길의 주문》은 내게 일하는 여성의 처세서로만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말에 덧씌워진 오래된 명령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책이었다. 부드러워라. 튀지 마라. 너무 똑똑해 보이지 마라. 상대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동시에 유능해라. 리더가 되어라. 질문해라. 성과를 내라. 이 모순된 요구들 속에서 여성은 매일 자기 말을 조율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말의 모서리를 전부 깎아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무례해지고 싶지도 않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되, 사람을 함부로 다치게 하지 않는 언어다. 예의를 지키되 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말이다. 침묵하더라도 그것이 굴복인지 선택인지 아는 태도다.

어쩌면 여성이 말하기 전에 미움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회의 오래된 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나를 지우는 말이 아니라, 나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말. 쿠션어가 필요할 때는 쓰되, 쿠션 속에 내 생각까지 묻어버리지는 않는 말. 질문할 수 있고, 거절할 수 있고, 필요하면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

이 책이 내게 남긴 주문은 결국 이것이었다.

말하라.

그러나 네 말의 주인을 잃지 말라.

배려하라.

그러나 네 자리를 내어주지는 말라.

침묵하라.

그러나 그것이 굴복인지 선택인지 알고 침묵하라.

질문하라.

네가 이 자리에 있음을 스스로에게도 증명하라.

나는 아직도 때때로 “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그 “네”의 의미를 안다. 그것은 언제나 동의가 아니다. 때로는 전쟁을 미루는 말이고, 때로는 나를 아끼는 말이고, 때로는 더 중요한 곳에 힘을 남겨두기 위한 말이다. 그리고 정말 말해야 할 순간이 오면, 나는 더 이상 내 문장을 지나치게 작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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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내일에게 (청소년판) - 숨이 막힐 때 주문처럼 특서 청소년문학 47
김선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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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결을 읽게 되는 소설

— 김선영, 『내일은 내일에게』를 읽고


나는 저자의 북토크에 간 적이 있다. 그때는 저자의 저작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상하게 저자라는 사람 자체가 좋았다. 말의 온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묘한 신뢰가 생겼다. 언젠가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은 내일에게』를 읽으며 그때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소설은 간만에 만난, 정말 글다운 청소년소설이었다.


청소년소설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감정을 단순하게 다루지 않는다. 상처를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고, 어른을 악역이나 구원자로 나눠 평면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이 소설은 다만 사람의 결을 오래 들여다본다. 연두의 일상은 작품의 흐름을 따라 극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결말까지도 그는 다시 학교에 가고,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고, 다시 하루를 산다. 그러나 그 “다시”가 가볍지 않다. 삶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도 다음 날로 넘어가며 이어지는 것임을 이 소설은 조용히 보여준다.


『내일은 내일에게』속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크지 않다.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세상을 뒤집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굶지 않고, 버려질까 두려워하지 않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자기 나이에 맞게 철없이 살고 싶어 할 뿐이다. “나도 어리광 부리며 철없이 살고 싶다. 내 나이에 걸맞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아이들이 바란 것은 거창한 행복이 아니라, 아이로 살아도 되는 하루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인상깊게 남은 감각 중 하나는 “거세된 욕구의 합리화”였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이 없어서 담담한 것이 아니다. 좋은 집, 따뜻한 말, 안전한 자리, 울어도 되는 권리. 그런 것을 원하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나는 괜찮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욕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욕구를 가져도 소용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운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아이들의 담담함은 성숙함이라기보다, 너무 이르게 익힌 생존법처럼 읽혔다.


그 생존법은 때로 폭발한다. 연두가 터지는 장면이 그랬다. 연두의 분노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너무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아이가 처음으로 학대와 폭력의 부당함을 말로, 몸으로, 물건으로 밀어 올리는 장면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곱게 아픔을 호소하지 못한다. 어떤 날은 울고, 어떤 날은 던지고, 어떤 날은 가장 아픈 말을 골라 상대에게 꽂아 넣는다. 이 소설이 좋은 것은 연두를 착한 피해자로만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두는 상처받았지만, 동시에 상처를 되돌려주는 아이이기도 하다. 그 모순까지 포함해서 연두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연두도, 그 주변의 아이들도 상대적으로 방어적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친절을 베푸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냉정함이라기보다 오래된 자기보호에 가깝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내주었다가 다칠까 봐 먼저 얼어붙는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아무 마음도 없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마음이 너무 많은데 그 마음이 들키면 다시 버려질까 봐 먼저 문을 닫는 사람의 말처럼 읽혔다. 방어는 마음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마음이 너무 많이 다쳤다는 흔적일 때가 있다.


이 작품이 깊은 이유는 아이들만 복합적으로 그리는 데 있지 않다. 어른들 역시 평면적이지 않다. 이 소설 속 어른들은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다. 무심해서 상처를 남기는 어른이 있고, 폭력적이고 거칠지만 끝내 아이를 버리지 않는 어른이 있으며, 아이의 삶을 대신 구원하지는 못해도 조심스럽게 쌀을 건네고 미래를 기다려주는 어른이 있다.


연두의 엄마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결코 이상적인 보호자가 아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전 남편의 딸을 끝내 버리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좋은 엄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이 상처를 주었지만, 나쁜 인간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인간적이다. 현실의 어떤 관계는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거칠고, 폭력이라고만 부르기엔 너무 오래 버텨낸 시간이 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모호한 인간의 결을 놓치지 않는다.


반대로 쌀을 건네는 카페 이상의 주인 아저씨 같은 인물은 이 소설의 따뜻함을 만든다. 그는 구원자처럼 과장되지 않는다.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도 못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 다만 알아차리고, 선을 넘지 않으며, 필요한 만큼만 손을 내민다. 아이의 가난을 폭로하지 않고, 아이의 자존심을 짓밟지 않으며, 도움을 굴욕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때로 거창한 선의가 아니라,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는 조심스러운 친절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인물은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죽음도 여러 번 등장한다. 객사한 노숙자의 죽음, 길고양이 네로의 죽음, 가족의 죽음. 특히 네로가 차에 치이는 장면은 마음이 아팠다. 아이에게 보여서는 안 될 세계의 잔혹함이 또 한 번 아이 앞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소설은 그 죽음을 완전히 방치하지 않는다. 이상 아저씨는 네로의 숨이 잦아들 때까지 몸을 쓸어준다. 세계는 잔인하지만, 그 잔인함 앞에서 끝까지 손을 거두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일은 내일에게』의 따뜻함은 바로 그런 데 있다.


이 소설은 우리 사회가 불편한 존재를 어떻게 치워버리는지도 보여준다. 노숙인의 텐트, 길고양이, 가난한 아이, 불안정한 가족. 우리는 자주 위험을 줄이는 방법을 찾기보다 눈앞에서 불편한 존재를 제거하려 한다. 불편함을 위험이라고 부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문제처럼 보이는 사람을 치운다. 그 앞에서 아이가 묻는 “아무 피해를 안 주는데도요?”라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정말 피해를 주었는가. 다만 우리가 보기 싫었을 뿐인가. 이 소설은 청소년의 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비정함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 책은 냉소로 끝나지 않는다. 유겸과 연두의 편지가 그랬다. 유겸은 왕따의 기억을, 연두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품고 있다. 둘의 상처는 같지 않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고통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본다. 같은 상처라서 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처인데도 “그래도 살고 싶었다”는 마음이 같아서 통하는 것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상처가 있다. 그리고 어떤 상처들은 서로 닮지 않았어도, 생존의 언어 안에서 서로를 알아본다.


이 소설이 끝내 붙잡고 있는 것은 완전한 구원이 아니다. 연두의 삶은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가족의 상처도, 가난도, 불안도 깔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어른은 연두의 미래를 기다려준다. “그 아이의 미래를 기다려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라는 문장은 이 작품이 말하는 좋은 어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아이를 대신 구원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는 것. 그 기다림이 때로는 한 사람을 내일까지 데려간다.『내일은 내일에게』라는 제목은 단순히 삶의 무게를 잊자는 말도, 내일이면 모든 고민이 해결될 거라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내일의 나에게 조금 나누어 맡기자는 뜻이었다. 오늘 다 해결하지 못해도, 오늘 다 괜찮아지지 않아도, 그래도 잠들고 일어나 다시 학교에 가고 밥을 먹는 일,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견디면서. 그리고 그 견딤의 곁에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친절과 기다림이 있을 때, 사람은 아주 조금 더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내일은 내일에게』는 “괜찮아질 거야”라고 쉽게 말하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괜찮지 않은 오늘을 안고도 내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책은 청소년소설이지만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각자가 움켜쥔 삶의 무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생활이 자아를 삼키는 공포, 그리고 그럼에도 내일로 넘어가려는 마음을 그린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사람의 결을 읽게 한다. 사람을 착하다, 나쁘다, 불쌍하다, 못됐다로 쉽게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굳어졌는지, 왜 그렇게 폭발했는지, 왜 그럼에도 떠나지 않았는지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사람의 결을 읽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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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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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기 위하여

— 『나이 묻는 사회』 를 읽고


제2의 커리어를 제대로 쌓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막연한 전환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설계하고 싶었다. 공부하고, 배우고, 다른 직업의 가능성을 열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지역 커뮤니티 센터나 각종 교육 지원 제도를 찾아보면 나는 자주 ‘대상자’가 아니었다. 34세 미만 청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묘하게 서러웠다. 내가 늙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느끼는 시기였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청년이 아니라고 잘라냈고, 사회는 동시에 나를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했다. 다시 배우고 싶은 사람, 새 커리어를 만들고 싶은 사람, 아직 자기 삶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 사람으로는 좀처럼 읽어 주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였다. 나이는 사회가 사람을 분류하고, 가능성을 배분하고, 지원 자격을 끊어 내는 현실의 장치다.


『나이묻는 사회』는 바로 이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듣기에는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나이가 결코 숫자에 머물지 않는다. 나이는 취업 가능성, 정책 지원, 관계의 서열, 호칭, 농담, 멸칭, 심지어 한 사람의 매력과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노년 혐오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연령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고, 평가하고, 배제하는 방식이다.


특히 내게 강하게 와닿은 것은 중년 혐오의 결이었다. 우리는 노인 혐오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말한다. ‘틀딱’, ‘연금충’, ‘노인 민폐’ 같은 말의 폭력성은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그러나 중년을 향한 혐오는 더 애매한 얼굴로 온다. 그것은 농담처럼, 유행어처럼, 세대 감각의 평가처럼 등장한다. ‘아재’, ‘개저씨’, ‘아줌마’, ‘영포티’, ‘스윗 영포티’ 같은 말들은 처음에는 가벼운 호칭이나 조롱처럼 보이지만, 반복될수록 중년이라는 나이대를 특정한 이미지 안에 가둔다.


중년 남성은 쉽게 무능하고 권위적이며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묶인다. 중년 여성은 생활감, 억척스러움, 촌스러움, 성적 비가시성, 민폐성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아줌마”라는 말을 들을 때 묘하게 기분이 나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이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좀처럼 중립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한 여성을 한 사람으로 부르는 말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중년 여성의 낡은 이미지 안으로 밀어 넣는 말처럼 들린다.


나는 내 나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이 하나로 해석되고 싶지 않다. 나는 아줌마이기 전에 독자이고, 작가이고, 강사이고, 수험생이고,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이 멸칭은 이 모든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우고, 사람을 하나의 연령 이미지로 단순화한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연령차별의 핵심이다. 나이는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인데, 사회는 자꾸 나이를 그 사람 전체처럼 다룬다.


더 불편한 것은 긍정적인 말조차 쉽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뀐다는 점이다. 40대가 자기 관리를 하고, 시대 변화에 적응하고, 감각을 유지하려 하면 본래는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젊은 척한다”는 조롱으로 번역된다. “영포티”라는 말이 그렇다. 젊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자기 삶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는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지 않는다. 40대가 아직 자기 삶의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욕망을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중년에게 허락된 자리가 너무 좁기 때문이다. 중년은 위로부터는 아직 젊다며 더 일하라고 요구 받고, 아래로부터는 이미 기성세대라며 책임을 요구 받는다. 제도적으로는 청년 지원에서 밀려나고, 사회적으로는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되며, 노동시장에서는 변화에 뒤처지지 말라고 압박받는다. 그러나 정작 다시 배우고,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 구조적 지원은 충분하지 않다.


내가 청년 지원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속상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특혜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배울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회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이미 청년이 아닌 사람”으로 분류했고, 그 분류는 생각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청년이 아니면 무엇인가. 중년인가. 그렇다면 중년은 이미 자기 앞가림을 끝낸 사람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중년의 불안과 욕망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이 묻는 사회』가 중요한 이유는 이런 질문을 개인의 예민함으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나이에 관한 멸칭과 농담이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와 제도와 관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언어는 생각의 껍데기가 아니다. 언어는 생각의 길이다. “아줌마”, “아재”, “영포티”, “꼰대” 같은 말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개별 인간을 보기 전에 연령 이미지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이미지는 고용, 관계, 정책, 미디어 재현 속에서 다시 차별을 강화한다.


차별은 늘 게으른 사고와 손잡는다. 한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오래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삶, 직업, 몸, 실패, 배움, 변화 가능성을 봐야 한다. 그러나 멸칭은 빠르다. “아줌마”라고 부르면 생활감과 촌스러움이 따라오고, “영포티”라고 부르면 젊은 척하는 중년의 이미지가 따라오고, “꼰대”라고 부르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는 판정이 따라온다. 구조를 분석하는 일은 어렵고 느리지만, 사람을 조롱하는 일은 쉽고 빠르다. 그래서 불안한 사회일수록 언어는 짧아지고, 짧아진 언어는 다시 인간을 작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중년 혐오가 단순히 젊은 세대가 중년을 싫어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각 세대가 자기 자리를 잃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불안이 서로를 향한 칼날이 된 결과에 가깝다. 청년은 시작할 자리가 없다고 느끼고, 중년은 다시 시작할 권리를 잃었다고 느끼며, 노년은 쓸모없는 존재로 밀려난다고 느낀다. 그런데 분노는 구조가 아니라 가까운 타 연령대에게 향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로 오해한다.


나이는 원래 그렇게 서로를 밀어내기 위한 기준이 아니어야 한다. 나이는 삶의 한 과정이고, 각 시기마다 다른 욕망과 가능성과 취약성을 가진다. 청년에게는 출발의 지원이 필요하고, 중년에게는 전환의 지원이 필요하며, 노년에게는 존엄한 지속의 지원이 필요하다. 어느 한 세대의 몫을 다른 세대가 빼앗는 방식이 아니라, 각 생애 단계가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청년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배움과 전환의 권리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줌마로 불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이름과 꿈과 능력과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읽고, 쓰고, 배우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나이묻는 사회』는 나이를 지우자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우리 삶을 얼마나 깊이 규정하는지 똑바로 보자고 말하는 책이다. 나이를 숫자로만 여기자는 말은 위로가 될 수 있지만, 현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이는 숫자 이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이 하나로 사람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나이가 아니라, 나이를 사람보다 먼저 보는 습관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사회는 단순하다. 청년이 아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중년이어도 배울 수 있으며, 노년이어도 존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회. 나이로 사람을 닫아 버리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라면,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이해해 보려고 애쓸 수 있을 것이다.


#도서제공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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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비밀이야 특서 어린이문학 18
박현숙 지음, 김진아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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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는 마음을 다루는 법

— 《그러니까 비밀이야》를 읽고


《그러니까 비밀이야》는 처음엔 단순한 생활동화처럼 보였다. 비밀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아이, 그 말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끝내 “비밀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단순히 입조심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밀이 관계 안에서 어떤 힘을 가지는지, 폭로가 얼마나 쉽게 권력적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른의 말이 아이에게 어떤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이클 슬레피언의 《비밀의 심리학》이 떠올랐다. 슬레피언은 비밀을 단순히 “말하지 않은 정보”가 아니라 “숨기려는 의도가 담긴 정보”로 설명한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모든 것이 비밀은 아니다. 어떤 것은 프라이버시이고, 어떤 것은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이며, 어떤 것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침묵이다. 하지만 그 안에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생기고, 그 의도가 관계 안에서 긴장과 부담을 만들 때 비로소 비밀은 마음의 사건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비밀이야》 속 장수의 행동은 단순한 “입이 가벼운 아이”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장수는 작품 속에서 남의 말을 전하고 비밀을 폭로하는 버릇 때문에 자주 관계의 곤란을 겪는다. 그런데 장수의 첫 문제는 아이 개인의 결함만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장수는 자기 엄마가 민지네 엄마를 흉보는 말을 듣고, 그 말을 민지에게 전한다. 이후 그 말이 민지 엄마에게 알려지자 장수 엄마는 자신이 아이들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점은 돌아보지 않고, 말을 전한 아들 장수를 탓한다.


나는 이 대목이 가장 먼저 불편했다. 아이는 어른의 말을 그대로 흡수하고, 아직 그 말의 무게와 파장을 계산할 만큼 성숙하지 않다. 그런데 어른이 아이 앞에서 누군가를 험담해 놓고, 그 말이 밖으로 나갔을 때 아이만 꾸짖는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 아이가 말을 전한 것은 분명 문제일 수 있지만, 그 말을 아이 앞에 먼저 놓은 사람은 어른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장수가 입이 가볍다”는 설명에 앞서, 어른의 말이 얼마나 쉽게 아이의 관계를 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힌다. 말의 책임은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 앞에서 말하는 어른에게도 있다.


장수는 이후에도 비밀 앞에서 흔들린다. 어느 날 장수는 민지가 “나는 동민이 네가 좋아”라는 메시지가 적힌 선물을 포장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민지는 장수에게 자신이 아끼는 수입 필통과 연필을 선물하며, 어차피 동민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을 거라며 그 일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다. 장수는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약속을 하지만, 그 비밀을 품은 뒤 얼굴이 누렇게 뜰 만큼 괴로워한다. 비밀은 장수에게 신뢰의 증표라기보다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으로 작동한다.


결국 장수는 전학 온 홍기에게 민지의 비밀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수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밀을 말하는 행위는 관계 안에서 힘을 가진다. 누군가의 좋아하는 마음, 부끄러운 마음, 아직 세상 밖으로 꺼낼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약한 부분을 공공의 장에 내놓는 일이다. 장수는 홍기가 그 말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비밀은 더 이상 장수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 홍기는 그 말을 떠들어대고, 민지는 모든 것을 알게 된 동민에게 모욕적인 거부를 당한다. 결국 민지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밀려나고, 아이들의 오해를 산 채 울음을 터트린다.


이 장면에서 《비밀의 심리학》의 문제의식이 다시 떠오른다. 비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관계적 행위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입을 다무는 기술만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내 흥밋거리나 거래 수단으로 쓰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반대로 폭로는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다. 사실이어도, 그것이 누군가의 약점을 드러내고 관계 안에서 그 사람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폭력에 가까워진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는 말은 종종 가장 무책임한 변명이다. 사실은 말하는 순간, 방향과 맥락을 얻는다. 그리고 그 방향은 누군가를 지킬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장 멋진 인물은 민지다. 민지는 자기 마음을 폭로당했고, 좋아하던 동민이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난처해졌다. 장수는 당연히 민지가 자신을 엄마에게 일러바칠 거라고 예상한다. 어쩌면 그것은 장수가 익숙하게 배워 온 관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잘못하면 고발하고, 말하고, 관계의 벌을 받게 하는 방식, 장수는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민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민지는 비밀을 폭로한 장수를 용서한다. 그리고 이 용서는 단순히 착해서 가능한 행동이 아니다. 민지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대신, 관계를 다시 선택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민지가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민지는 완벽하게 성숙한 아이가 아니다. 상처받고, 울고, 부끄러워하고, 화도 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상처를 타인의 파괴로 갚지 않는다. 자신이 폭로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식으로 장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것은 어린아이에게 매우 어려운 소프트스킬이다. 자기감정을 알아차리는 능력, 억울함을 즉각적인 공격으로 바꾸지 않는 능력,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그 사람 전체를 폐기하지 않는 능력, 관계를 끝내기보다 다시 조율하는 능력. 이런 능력은 어른에게도 쉽지 않다.


민지의 용서 앞에서 장수도 변한다. 장수는 민지의 멋짐과 자신의 미안함을 느끼고, 선물을 건넨다. 민지도 답례 선물을 하며 둘은 친구가 된다. 이 결말이 좋은 이유는 장수가 단순히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서가 아니다. 장수는 말이 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동시에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누군가에게 다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다. 관계는 처벌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때로는 용서받은 사람이 비로소 자기 잘못의 무게를 배운다.


창작 노트에 담긴 작가의 자전적 고백도 이 작품을 더 깊게 만든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도 남의 비밀을 말해 버리는 습관이 있었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았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이 고백은 작품의 태도를 바꾼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위에서 내려다보며 “비밀을 지켜야 해”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자신도 한때 말의 무게를 몰랐던 아이였음을 먼저 밝힌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목소리는 “너희는 조심해”가 아니라 “나도 그랬고, 그래서 이제는 함께 배워보자”에 가깝다. 그 자기반성 덕분에 이 이야기는 생활 교훈을 넘어 관계에 대한 사려 깊은 동화가 된다.


《그러니까 비밀이야》는 비밀을 무조건 지키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비밀이 관계 안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어떤 비밀은 누군가를 지키는 울타리가 되지만, 어떤 비밀은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된다. 어떤 폭로는 진실을 밝히는 일이지만, 어떤 폭로는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사용하는 권력 행위가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이 말이 누구를 지키고, 누구를 다치게 하는가.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약한 마음을 내 손에 쥐고 흔드는 일인가. 이 질문이 비밀을 다루는 윤리의 출발점이다.


결국 이 책이 남기는 문장은 이것이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는 기술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리고 좋은 관계란 모든 것을 즉시 말해 버리는 관계가 아니라, 말해도 되는 것과 기다려야 하는 것을 함께 배워가는 관계다. 장수는 그 어려움을 배워가는 아이이고, 민지는 그 배움이 가능하도록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지 않는 아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비밀 그 자체가 아니라, 비밀 이후에도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는 마음의 힘이다.


#도서협찬 #특별한서재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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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 - 대한민국 부동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홍춘욱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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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고


  1. 구조 분석 : 부동산 불패 신화는 ‘기회의 독점’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으며 내가 가장 선명하게 붙잡은 것은 이것이다.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단순히 집값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 기회, 금융, 개발, 기억이 한 공간에 응축되는 방식의 역사다. 사람들은 집을 욕망한 것이 아니라, 집이 품고 있는 기회를 욕망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지나치게 한곳에 몰렸기 때문에, 한국의 부동산은 거주 공간을 넘어 생존 전략이 되었다.


조선 시대 한양은 이미 하나의 클러스터였다. 왕과 궁궐, 의정부와 육조, 과거와 성균관, 양반 네트워크와 혼맥, 정보와 관직의 가능성이 한양에 모여 있었다. 한양에 산다는 것은 단지 좋은 동네에 산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흐름을 더 빨리 듣고, 교육과 인맥에 접근하고, 가문의 재기 가능성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한양 10리 밖을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그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부동산 투자자라기보다, 공간이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사실을 아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한양의 집값은 단순한 땅값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앙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오늘의 서울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한양의 클러스터가 정치·관료·문화 자본 중심이었다면, 오늘의 서울은 정치, 금융, 교육, 의료, 기업 본사, 문화산업, 정보, 네트워크가 겹겹이 쌓인 초대형 복합 클러스터다. 사람들은 서울의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서울이 품고 있는 가능성에 값을 치른다.


그래서 한국의 집값은 땅의 가격이라기보다 기회의 밀도에 가깝다. 서울 집값이 오른 것은 서울의 공기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국가의 자원, 일자리, 학교, 병원, 교통, 문화, 정보가 그곳에 쌓였기 때문이다. 중심에 들어가면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기고, 중심 밖으로 밀려나면 삶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결국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집이 부족한가”만이 아니라, 왜 모두가 특정한 공간에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고 느끼는가에 있다.


이 책이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지점은, 그 집중이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국가와 권력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이다. 강남 개발은 우연히 생긴 도시 확장이 아니었다. 한강의 흐름을 바꾸고, 공유수면을 매립하고, 다리와 도로를 놓고, 그 위에 아파트와 경기장과 신도시를 세운 국가 주도 프로젝트였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종합운동장과 아시아선수촌 일대도 원래부터 단단한 땅이 아니라, 한강의 물길과 모래, 범람과 매립 위에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어린 시절의 동네는 내게 그저 생활의 배경이었다. 토끼와 산책하던 길, 종합운동장역 근처의 익숙한 풍경, 아시아선수촌의 나무와 길.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그 장소 밑에는 한강 개발, 강남 형성, 공유수면 매립, 개발이익, 정치자금, 국가 주도 성장의 역사가 깔려 있었다. 도시는 처음부터 도시가 아니었다. 누군가 강의 흐름을 바꾸고, 땅을 메우고, 교통망을 놓고, 그 위에 가격을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집을 얻었고, 누군가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누군가는 그곳을 자신의 유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여기서 부동산은 단순한 주거가 아니다. 그것은 개발 자금 조달 장치였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통로였고, 도시 권력을 재편하는 방식이었다. 정부는 사회간접자본을 만들 명분으로 땅을 개발했고, 건설사는 공유수면 위에 아파트를 세워 이익을 얻었고, 정치인과 관료는 개발 정보와 인허가 권한을 통해 이익의 중심에 접근했다. 시민은 그 결과로 만들어진 도시를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오래도록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부동산에 이토록 몰렸을까. 답은 단순히 “한국인은 집을 좋아한다”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부동산 집착은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였다. 은행에 돈을 넣으면 물가에 녹고, 채권은 충분한 실질수익을 주지 못하고, 주식은 기업의 성과가 주주에게 제대로 돌아온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다. 대주주 중심 경영, 낮은 배당, 소액주주 보호 부족, 불투명한 지배구조는 주식을 장기 동업권이 아니라 불안정한 단기 매매판처럼 느끼게 했다.


반면 부동산은 눈에 보였다. 땅은 사라지지 않고, 아파트는 실물이며, 서울의 땅은 정부가 도로와 학교와 지하철과 병원으로 계속 밀어주는 자산이었다. 전세를 끼면 레버리지까지 가능했다. 예금, 채권, 주식이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결국 집으로 향했다. 부동산이 가장 훌륭한 자산이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자산들이 믿을 만한 피난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동산이 국민적 자산 축적 수단이 된 것이다.


여기에 화폐와 금융 질서의 문제도 겹친다. 금본위제든, 은본위제든, 원화 가치 고평가든, 금융 억압이든, 화폐 제도는 결코 중립적인 기술이 아니었다. 돈의 기준을 누가 정하고, 통화의 가치를 어떻게 묶고, 누구에게 유리한 금융 환경을 만드느냐에 따라 자산의 흐름은 달라졌다. 물가가 오르고, 돈의 가치가 흔들리고, 금융상품이 믿음을 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더 강하게 실물자산을 붙잡는다. 한국에서 그 실물자산의 최종 이름이 부동산이었다.


그래서 한국 부동산 불패 신화는 부동산 시장 하나가 만든 신화가 아니다. 그것은 중심에 집중된 기회, 국가 주도 개발, 금융시장에 대한 불신, 화폐 가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서울이라는 클러스터의 압도적 힘이 함께 만든 결과다. 집값은 오직 수요와 공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그 집을 사야만 한다고 느끼는지, 왜 그 공간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삶의 추락처럼 느끼는지까지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부동산 대책이 매번 실패하는 이유도 선명해진다. 정부가 정말 집값을 잡고 싶다면 집의 숫자만 볼 것이 아니라, 기회의 배치 자체를 바꿔야 한다. 지방에서도 존엄하게 살 수 있어야 하고, 좋은 일자리와 교육과 의료와 문화가 흩어져야 한다. 주식시장은 장기 투자자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고, 금융시장은 실질적인 자산 형성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시 서울의 아파트로 몰릴 것이다. 그것은 탐욕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다는 구조적 공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내게 보여준 것은 한국 부동산의 역사가 “집값이 왜 올랐는가”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왜 어떤 공간에는 기회가 쌓이고, 어떤 공간은 주변으로 밀려나는가의 역사다. 조선의 한양에서 오늘의 서울까지, 중심은 늘 사람을 끌어당겼고, 사람은 다시 중심의 가격을 밀어 올렸다. 문제는 클러스터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클러스터가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처럼 작동할 때다. 중심이 너무 강하면 주변은 선택지가 아니라 유배지가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부동산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 집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집은 권력에 가까워지는 통로이고, 미래를 보험 드는 방식이며, 불안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붙잡은 마지막 안전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집은 누군가를 계속 중심 밖으로 밀어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집값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회의 지도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문제다. 그리고 그 기울어진 지도 위에서 사람들은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을 가능성을 사고 있었다.


2. 생활인의 측면에서 본 부동산, 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고 세종시를 다시 보다


《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고 가장 섬뜩했던 것은 앞서 분석했듯 부동산 문제가 단순히 집값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집값은 언제나 도로, 철도, 행정기관, 산업, 상권, 인구 이동과 함께 움직였다. 저자는 서울과 강남 개발의 역사를 통해 교통 인프라가 어떻게 특정 지역의 가치를 밀어 올리고, 도시의 방향을 바꾸며, 부동산 가격의 토대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사는 세종시가 떠올랐다.


세종시는 행정수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체감하는 세종은 자족도시라기보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거대한 주거 실험장에 가깝다. 생활권은 1생활권에서 6생활권까지 계속 넓어졌고, 아파트는 끊임없이 들어섰다. 하지만 도시가 넓어진 만큼 활기도 함께 번졌는가 묻는다면, 대답은 쉽지 않다. 세종 전역에서 그나마 활기가 있다고 느껴지는 상권은 나성동 정도다. 다른 생활권의 상가는 비어 있거나,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새 건물 1층은 반짝 깨끗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공실의 얼굴을 갖는다.


문제는 상가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가는 너무 많다. 문제는 그 상가를 먹여 살릴 소비층이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세종에는 안정적 행정 수요는 있지만, 도시 전체를 지속적으로 순환시킬 만큼의 생산인구와 민간 산업 기반이 약하다. 많은 주민은 공무원 계층이거나, 아파트에 영끌한 하우스푸어이거나, 이미 생존을 고민하는 자영업자다. 소비를 폭발적으로 감당할 계층이 두텁지 않다. 그런데도 상가는 계속 분양되고, 아파트는 계속 공급되며, 생활권은 계속 확장된다. 수요를 먼저 읽은 도시가 아니라, 공급을 먼저 밀어붙인 도시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저자가 지적한 교통 인프라 분석이 날카롭게 들어온다. 도시의 가치는 교통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교통은 단순히 길을 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길은 사람을 모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도 있다. 세종의 도로와 고속도로는 행정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내가 매일 체감하는 출근길은 조금 다르게 말한다. 아침이면 정안IC와 대전 방향이 꽉 막힌다. 많은 사람이 세종에서 자고, 다른 도시로 일하러 나간다. 도시는 사람을 붙잡아야 하는데, 세종의 교통은 매일 아침 사람들을 밖으로 흘려보낸다.


이 장면은 단순한 교통 체증이 아니다. 세종시가 자족도시가 아니라 베드타운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이 그 도시에서 자고, 다른 도시에서 일하고, 다시 돌아와 잠만 잔다면 그 도시의 상권은 살아나기 어렵다. 낮 시간의 소비와 노동과 관계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도시가 살아 있으려면 출근하는 사람만 있어서는 안 된다. 머무는 사람, 돈을 쓰는 사람, 일하는 사람, 걷는 사람, 저녁에도 불을 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종은 많은 구역에서 아파트의 불빛은 있어도 거리의 밀도는 약하다.


특히 내가 입주자로서 가장 강하게 느끼는 문제는 상가 분양이 실제 구매 수요층을 전혀 타겟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권은 단순히 “입주민이 몇 명이다”라는 숫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어떤 소득 구조를 가졌는지, 하루 중 어디에 머무는지, 어떤 소비를 반복하는지, 도보로 움직이는지 차량으로 이동하는지까지 보아야 한다. 그런데 세종의 많은 상가는 이런 생활 동선을 읽지 못한 채 분양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걸어 다니지 않는 곳에 점포를 놓고, 소비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 과도한 상업 면적을 배치하고, 이미 나성동 같은 중심 상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비 흐름을 무시한다.


그 결과는 공실이다. 아파트는 늘어나지만 상가는 비고, 건물은 새것인데 거리는 낡아 보인다. 막 지은 상가가 몇 년 지나지 않아 유령 건물처럼 변하는 장면은 세종시의 가장 아픈 풍경 중 하나다. 도시가 성장한다면 새 건물에는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세종에서는 새 건물이 먼저 생기고, 그 건물을 채울 생활은 뒤따라오지 못한다. 이는 도시계획의 실패이자, 부동산 공급 논리의 오만이다.


조치원에서 계획되던 800세대 민간 아파트 분양이 시작도 전에 엎어진 일이나, 1300세대 규모의 아파트가 모델하우스만 남긴 채 사업 개발 없이 방치된 사례도 이 흐름 속에서 읽힌다. 이것은 단순한 개별 사업의 부진이 아니다. “세종이면 된다”는 믿음이 더 이상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행정수도 프리미엄, 정부 이전 기대, 수도권 대체지라는 말만으로 모든 주택 수요가 흡수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결국 묻는다. 여기서 일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장사할 수 있는가. 여기서 아이를 키우고, 늙고, 병원에 가고, 걸어서 소비하고, 삶을 꾸릴 수 있는가.


그런데도 세종의 집값은 정부 이전 이슈와 행정수도 기대를 먹고 4억, 5억을 넘는다. 이 기형성이 나를 답답하게 한다. 도시의 생활경제는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는데, 주택 가격은 정치적 기대를 선반영한다. 상권은 지방 중소도시처럼 마르는데, 아파트 가격은 수도권의 꿈을 따라간다. 이때 부동산은 주거가 아니라 기대의 증권이 된다.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언젠가 더 비싸질지도 모른다는 믿음의 단위가 된다.


그러나 도시는 믿음만으로 살아나지 않는다. 도시에는 일자리가 필요하고, 산업이 필요하고, 걸을 수 있는 거리와 소비할 수 있는 계층과 머무를 이유가 필요하다. 행정기관은 도시의 중심 기능이 될 수 있지만, 행정기관만으로 도시 전체가 살아나지는 않는다. 공무원 도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간 기업, 연구기관, 대학, 병원, 문화시설, 생산 노동, 청년 창업, 지역 상권이 함께 돌아야 도시가 숨을 쉰다.


저자의 분석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부동산 가격은 허공에서 오르지 않는다. 도로가 놓이고, 철도가 연결되고, 행정 기능이 이전하고, 개발 이익이 기대되고, 사람이 몰리며 오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요한 질문이 빠지면 도시는 병든다. 그 인프라가 사람을 머물게 하는가, 아니면 빠져나가게 하는가. 그 아파트가 실제 삶의 수요인가, 아니면 분양을 위한 숫자인가. 그 상가가 소비자를 만나는가, 아니면 투자자를 속이는 상품인가. 그 도시는 자족하는가, 아니면 정치적 구호 위에 세워진 거대한 베드타운인가.


내가 세종을 보며 느끼는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종은 도시를 만들었다기보다, 아파트 단지를 넓게 펼쳐놓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생활권은 확장되었지만 생활은 충분히 밀도 있게 형성되지 못했고, 교통망은 연결되었지만 그 연결은 도시 내부의 활력을 키우기보다 사람들을 외부로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었다. 상가는 공급되었지만 소비자는 부족하고, 집값은 올랐지만 삶의 체감은 그만큼 따라오지 않는다.


이것은 세종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국 부동산의 오래된 습관이 세종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먼저 땅을 정하고, 길을 놓고, 아파트를 짓고, 상가를 분양하면 도시가 생길 것이라고 믿는 습관. 그러나 도시는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는 것이다. 콘크리트가 올라간다고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머물고, 일하고, 소비하고, 관계 맺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질 때 비로소 도시는 도시가 된다.


그래서 나는 세종의 문제를 단순히 “집값이 비싸다”거나 “상권이 약하다”는 말로만 보고 싶지 않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세종은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 이 도시는 행정기관을 위한 도시인가, 아파트 분양을 위한 도시인가, 아니면 실제로 살아가는 주민을 위한 도시인가. 만약 주민을 위한 도시라면, 더 이상 아파트 숫자와 생활권 확장만으로 성장을 말해서는 안 된다. 생산인구, 민간 일자리, 소비력, 교통 동선, 상권 밀도, 보행 가능성, 지역 내 순환 경제를 함께 보아야 한다.


집값은 오를 수 있다. 아파트 역시 팔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도시는 성공하지 않는다. 공실이 늘고, 출근길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상권이 한두 곳에만 몰리고, 주민들이 대출을 갚느라 소비를 줄이는 도시라면 그곳은 성장하는 도시가 아니라 버티는 도시다.


세종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 도시는 아직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방식으로는 위험하다. 행정수도라는 이름만으로 도시경제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아파트 공급만으로 생활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통 인프라만으로 자족성은 생기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집들을 떠받칠 삶의 구조가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동산의 역사는 결국 도시의 역사이고, 도시의 역사는 사람이 어디에서 일하고 어디에서 살며 어디에서 소비하는가의 역사다. 세종시가 정말 살아 있는 도시가 되려면, 이제는 더 많은 아파트가 아니라 더 깊은 생활의 밀도를 물어야 한다. 집값이 아니라 도시의 숨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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