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의 주문 - 일하는 여자들을 지탱하는 언어와 관계, 그리고 마음, 개정증보판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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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말하기 전에 미움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

—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을 읽고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바른 말을 잘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상한 말을 이상하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부당한 말, 누군가를 함부로 낮추는 말 앞에서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러나 친인척들은 그런 나를 똑똑하다고 부르지 않았다. 솔직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싸가지 없는 년”으로 통했다.

어른들은 자주 말했다. 여자가 그렇게 따지고 들면 남편 사랑 못 받는다. 미움받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그 말들이 내게 가르친 것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었다. 여자는 말해도 되지만, 너무 정확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자는 생각해도 되지만, 그 생각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만큼 또렷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자는 틀린 말을 바로잡기 전에, 먼저 자신이 미움받지 않을지를 계산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때 몰랐다. 내가 미움받은 것은 말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여자인 내가 너무 똑바로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다혜의 《출근길의 주문》을 읽으며 가장 오래 멈춘 지점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 책은 일하는 여성들의 언어와 관계, 마음과 커리어를 다룬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은 어떻게 말해야 미움받지 않는가.

여성은 너무 세게 말하면 안 된다. 너무 똑똑한 척해도 안 된다. 너무 감정적이면 안 되고, 너무 차가워도 안 된다. 질문을 많이 하면 나댄다고 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소극적이라고 한다. 부드럽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다고 하고, 단호하게 말하면 무섭다고 한다. 남성이 직설적으로 말하면 시원하다, 결단력 있다, 리더답다고 할 수 있는 말이 여성이 하면 예민하다, 까칠하다, 피곤하다는 말로 돌아온다. 그러니 여성은 말하기 전에 먼저 배운다. 미움받지 않는 법을. 자기 말의 모서리를 미리 깎는 법을.

책에서 말하는 쿠션어의 문제는 그래서 단순한 화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쿠션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는데”,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같은 말은 때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말에도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 정직하되 무례하지 않은 말, 정확하되 상대를 함부로 찌르지 않는 말은 분명 좋은 언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완충 장치가 유독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된다는 데 있다.

여성은 자기 의견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과를 배운다. 요구를 해도 부탁처럼 들리게 만들고, 반박을 해도 질문처럼 포장하고, 불쾌함을 말할 때도 상대가 무안하지 않도록 여러 겹의 완충재를 깐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말의 내용보다 말의 태도가 더 크게 심판받는다.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어떻게 말했느냐가, 더 나아가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냐가 문제가 된다.

나는 대학 글쓰기 수업에서 그 이상한 감각을 또렷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그 수업에는 우수 글쓰기 학생에게 일부 수업을 면제하고 논문으로 A+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중간에 그 제도를 받았다. 익명으로 진행된 논설문 쓰기에서 내 글은 주장하는 바가 선명하고 논거가 튼튼한, 남성적인 글쓰기의 전형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2차 익명 수필 쓰기에서는 문체가 수려하고 정서가 아름다운 글쓰기이나 주장하는 바가 약한 게 아쉽고,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쓰는 경향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둘 다 내가 쓴 글이었다.

나는 남자처럼 쓴 것도, 여자처럼 쓴 것도 아니었다. 논설문은 논설문답게 썼고, 수필은 수필답게 썼을 뿐이다. 장르에 맞춰 문체와 구조를 바꾼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글들은 곧장 성별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 주장이 선명하면 남성적이고, 정서가 아름다우면 여성적이라는 식의 분류. 그때 나는 알았다. 글조차 성별로 읽히는구나. 말뿐 아니라 문장에도 성별이 덧씌워지는구나.

그래서 나는 일부러 논문 주제를 산업노동자의 법적 권리와 실태로 잡았다. 젊은 여자는 노동문제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볼 수 있고, 어떤 논리로 말할 수 있으며, 어떤 문제에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내 글이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가 아니라, 내가 세계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출근길의 주문》은 이런 장면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일하는 여성이 겪는 곤란은 단순히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 그 능력이 태도로 심판받기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잘 말하면 건방지고, 조심하면 약하고, 정확하면 차갑고, 부드러우면 만만하다. 여성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말이 놓인 자리까지 함께 평가받는다.

이 문제는 직장에만 있지 않다. 가족 안에도 있다. 시댁에서도 있다. 나는 시댁에 가면 꽤 다른 사람이 된다. 남편에게 깍듯하게 존대하고, 언성을 높이지 않으며, 부탁은 눈빛으로만 한다. 시부모님이 무어라 하시든 대개 “네”라고 답한다. 그러면 나는 참한 며느리가 된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예뻐하신다.

조금 웃기고, 조금 씁쓸하다. 그 “네”가 내 속내의 항복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남편도 안다. 나는 동의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과 쿠션어, 여성성을 활용해 관계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시부모님은 편찮으시고, 시아버님은 파킨슨과 치매가 심하시다. 남편은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부모 간병의 무게를 안고 있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매번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어떤 전투는 이겨도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말의 칼을 칼집에 넣는다. 속내는 타협하지 않지만, 표현은 조절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회가 그 전략을 순함으로 읽는다는 점이다. 내가 “네”라고 말하면 참하다고 한다. 내가 싸우지 않으면 착하다고 한다. 내가 반박하지 않으면 좋은 며느리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성에게 요구되는 좋은 말이란 때때로 좋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침묵이다. 말하지 않는 여성이 사랑받는다. 부드럽게 웃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성이 관계를 망치지 않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렇다고 나는 모든 자리에서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시댁에서는 관계비용을 낮추기 위해 “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터에서는 그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나는 강사였고, 내게는 교육관이 있었다. 이전에 초중등 대상 대형학원에서 일할 때, 학생들의 학력 수준에 맞지 않는 천편일률적인 교육 스케줄에 반발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수준은 달랐고, 필요한 보강도 달랐다. 나는 보강자료를 따로 만들고, 개별 맞춤 수업을 진행했다. 내 판단으로는 그것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자 남자 원장이 말했다. 왜 내 수업에만 들어간 아이들은 반 배정에 따른 강사 교체를 싫어하느냐고. 여자 선생이 학원 방침을 거스르고 그렇게 나대는 거 보기 좋지 않다고 했다. 그 학원에서 나는 왕따였다. 같은 여자 선생들도 나를 미워했다. 그러나 학교별 분반 수업을 주장한 남자 대학생 강사의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그때 나는 뼈아프게 보았다. 같은 개선안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을 얻는다는 것을. 남자가 말하면 건의가 되고, 여자가 말하면 반항이 된다. 남자가 교육 방식의 문제를 지적하면 현장 의견이지만, 여자가 학생에게 맞는 자료를 만들고 수업을 조정하면 나댐이 된다. 내가 한 일의 핵심은 학생의 학습권과 수업의 질이었지만, 그들에게 먼저 보인 것은 “학원 방침을 거스르는 여자 선생”이었다.

말은 내용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누가 말했는지가 평가를 바꾼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아프게 다가온 진실이었다.

스몰토크에 관한 대목도 그래서 불편했지만 정확했다. 한국 사회의 스몰토크는 종종 친근함을 가장한 개인정보 요구가 된다. 나이, 결혼 여부, 자녀 여부, 사는 곳, 학교, 직장, 수입, 배우자의 직업, 자산, 인맥. 이런 질문들은 가벼운 대화처럼 시작되지만 쉽게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표가 된다. 특히 여성은 이런 질문 앞에서 더 자주 해명하는 위치에 선다. 결혼했는가, 아이는 있는가,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시댁에는 잘하는가, 일을 계속할 것인가. 말은 어느새 대화가 아니라 심문이 된다.

좋은 대화는 상대를 빨리 알아내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자신을 드러내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친근함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침범한다. 더 나쁜 것은 그 질문 뒤에 자기 과시가 따라붙는 경우다. 자산, 투자, 수입, 자녀의 성취, 배우자의 직업. 이런 말들은 스몰토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위를 확인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대화가 싫다. 그 불편함은 예민함이 아니라 정당한 경계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에 관한 부분도 오래 남았다. 여성들만 있을 때는 질문이 활발하지만, 남성과 여성이 섞여 있을 때는 여성이 첫 질문자로 나설 확률이 낮아진다는 대목은 많은 것을 말한다. 질문은 단순히 모르는 것을 묻는 행위가 아니다. 질문은 “나도 이 논의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선언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성은 어릴 때부터 질문하는 몸짓조차 조심스럽게 훈련받는다. 너무 나서지 말 것. 분위기를 끊지 말 것. 똑똑한 척하지 말 것. 괜히 말대꾸하지 말 것.

나는 내 말이 잘리는 경험도 자주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결론을 내버리는 일. 내 말을 다 듣기 전에 “그러니까 네 말은 이런 거지”라고 요약해버리는 일. 내가 말하려던 핵심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훨씬 쉽게 받아들여지는 일. 내 문장이 끝까지 갈 권리를 빼앗기는 느낌. 말이 잘린다는 것은 단순한 대화 방해가 아니다. 그것은 내 사고가 완성될 권리를 빼앗기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언어의 문제는 여성에게 더 예쁘게 말하라는 조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이 자기 말의 주도권을 어떻게 잃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언제 쿠션어를 쓸 것인가. 언제 단호하게 말할 것인가. 언제 침묵할 것인가. 언제 “잠시만요,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것인가. 이 구분이 필요하다.

간접화법에 관한 대목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흥미로웠다. 간접화법은 때로 우아하다. 특히 권력관계나 상류층 인사, 조직 내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에서는 말의 힘이 정면충돌보다 우회로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소설에서 권력관계와 상류층 인사를 자주 묘사하기 때문인지, 이 지점은 익숙했다. 내 캐릭터들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지 않는다. 예의와 호칭과 침묵과 시선 속에 진짜 뜻을 숨긴다. 우아한 언사는 힘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힘의 형태를 바꾼다.

하지만 현실의 간접화법은 늘 우아하지만은 않다. 그것이 약자에게만 강요될 때, 간접화법은 배려가 아니라 자기축소가 된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게 만들고, 정확히 요구해야 할 때 부탁처럼 만들며, 분노해야 할 때 미소 짓게 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품위가 아니라 억압이다. 그러므로 좋은 말하기는 무조건 부드러운 말하기가 아니다. 필요한 순간에는 정확해야 하고, 가능한 순간에는 품위 있어야 한다. 상대를 해치지 않되, 진실을 흐리지 않아야 한다.

‘여성적 리더십’에 관한 대목도 답답했다. 왜 여성에게만 리더십 앞에 ‘여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가. 남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면 그냥 리더십인데, 여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면 여성적 리더십이 된다. 이 말은 얼핏 칭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리더십의 표준을 남성으로 두는 오래된 습관이 숨어 있다. 여성 리더가 단호하면 독하다고 하고, 부드러우면 약하다고 한다. 남성이 실패하면 개인의 실패지만, 여성이 실패하면 여성 리더십의 한계처럼 말해진다. 이것은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유리천장만큼이나 유리절벽도 무섭다. 여성에게 높은 자리가 주어지는 순간이 종종 조직이 위태로울 때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평소에는 기회를 주지 않다가, 위기 상황에서 책임을 맡긴다. 성공하면 조직의 성과가 되고, 실패하면 여성의 한계로 기록된다. 여성은 올라가도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다른 방식의 검열대 위에 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같은 생각으로 돌아왔다. 여성적 리더십이 아니라 리더십이면 충분하다. 여성적 말하기가 아니라 말하기면 충분하다. 정확하고 품위 있는 말. 필요할 때 질문하고, 부당할 때 반박하고, 관계비용이 너무 클 때는 전략적으로 침묵하며, 그러나 속내까지는 내어주지 않는 말하기.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는 “네”라고 말하는 참한 며느리가 되었고, 어떤 자리에서는 “그 방식은 학생에게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나대는 여자 선생이 되었다. 이상한 것은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붙이는 이름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같은 사람의 같은 판단력도 어떤 관계 안에서는 참함이 되고, 어떤 관계 안에서는 나댐이 된다. 그러니 문제는 내 말 하나에만 있지 않다. 그 말을 듣는 세계의 귀에도 있다.

《출근길의 주문》은 내게 일하는 여성의 처세서로만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말에 덧씌워진 오래된 명령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책이었다. 부드러워라. 튀지 마라. 너무 똑똑해 보이지 마라. 상대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동시에 유능해라. 리더가 되어라. 질문해라. 성과를 내라. 이 모순된 요구들 속에서 여성은 매일 자기 말을 조율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말의 모서리를 전부 깎아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무례해지고 싶지도 않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되, 사람을 함부로 다치게 하지 않는 언어다. 예의를 지키되 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말이다. 침묵하더라도 그것이 굴복인지 선택인지 아는 태도다.

어쩌면 여성이 말하기 전에 미움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회의 오래된 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나를 지우는 말이 아니라, 나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말. 쿠션어가 필요할 때는 쓰되, 쿠션 속에 내 생각까지 묻어버리지는 않는 말. 질문할 수 있고, 거절할 수 있고, 필요하면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

이 책이 내게 남긴 주문은 결국 이것이었다.

말하라.

그러나 네 말의 주인을 잃지 말라.

배려하라.

그러나 네 자리를 내어주지는 말라.

침묵하라.

그러나 그것이 굴복인지 선택인지 알고 침묵하라.

질문하라.

네가 이 자리에 있음을 스스로에게도 증명하라.

나는 아직도 때때로 “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그 “네”의 의미를 안다. 그것은 언제나 동의가 아니다. 때로는 전쟁을 미루는 말이고, 때로는 나를 아끼는 말이고, 때로는 더 중요한 곳에 힘을 남겨두기 위한 말이다. 그리고 정말 말해야 할 순간이 오면, 나는 더 이상 내 문장을 지나치게 작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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