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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평점 :
나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기 위하여
— 『나이 묻는 사회』 를 읽고
제2의 커리어를 제대로 쌓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막연한 전환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설계하고 싶었다. 공부하고, 배우고, 다른 직업의 가능성을 열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지역 커뮤니티 센터나 각종 교육 지원 제도를 찾아보면 나는 자주 ‘대상자’가 아니었다. 34세 미만 청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묘하게 서러웠다. 내가 늙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느끼는 시기였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청년이 아니라고 잘라냈고, 사회는 동시에 나를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했다. 다시 배우고 싶은 사람, 새 커리어를 만들고 싶은 사람, 아직 자기 삶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 사람으로는 좀처럼 읽어 주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였다. 나이는 사회가 사람을 분류하고, 가능성을 배분하고, 지원 자격을 끊어 내는 현실의 장치다.
『나이묻는 사회』는 바로 이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듣기에는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나이가 결코 숫자에 머물지 않는다. 나이는 취업 가능성, 정책 지원, 관계의 서열, 호칭, 농담, 멸칭, 심지어 한 사람의 매력과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노년 혐오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연령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고, 평가하고, 배제하는 방식이다.
특히 내게 강하게 와닿은 것은 중년 혐오의 결이었다. 우리는 노인 혐오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말한다. ‘틀딱’, ‘연금충’, ‘노인 민폐’ 같은 말의 폭력성은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그러나 중년을 향한 혐오는 더 애매한 얼굴로 온다. 그것은 농담처럼, 유행어처럼, 세대 감각의 평가처럼 등장한다. ‘아재’, ‘개저씨’, ‘아줌마’, ‘영포티’, ‘스윗 영포티’ 같은 말들은 처음에는 가벼운 호칭이나 조롱처럼 보이지만, 반복될수록 중년이라는 나이대를 특정한 이미지 안에 가둔다.
중년 남성은 쉽게 무능하고 권위적이며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묶인다. 중년 여성은 생활감, 억척스러움, 촌스러움, 성적 비가시성, 민폐성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아줌마”라는 말을 들을 때 묘하게 기분이 나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이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좀처럼 중립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한 여성을 한 사람으로 부르는 말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중년 여성의 낡은 이미지 안으로 밀어 넣는 말처럼 들린다.
나는 내 나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이 하나로 해석되고 싶지 않다. 나는 아줌마이기 전에 독자이고, 작가이고, 강사이고, 수험생이고,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이 멸칭은 이 모든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우고, 사람을 하나의 연령 이미지로 단순화한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연령차별의 핵심이다. 나이는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인데, 사회는 자꾸 나이를 그 사람 전체처럼 다룬다.
더 불편한 것은 긍정적인 말조차 쉽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뀐다는 점이다. 40대가 자기 관리를 하고, 시대 변화에 적응하고, 감각을 유지하려 하면 본래는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젊은 척한다”는 조롱으로 번역된다. “영포티”라는 말이 그렇다. 젊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자기 삶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는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지 않는다. 40대가 아직 자기 삶의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욕망을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중년에게 허락된 자리가 너무 좁기 때문이다. 중년은 위로부터는 아직 젊다며 더 일하라고 요구 받고, 아래로부터는 이미 기성세대라며 책임을 요구 받는다. 제도적으로는 청년 지원에서 밀려나고, 사회적으로는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되며, 노동시장에서는 변화에 뒤처지지 말라고 압박받는다. 그러나 정작 다시 배우고,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 구조적 지원은 충분하지 않다.
내가 청년 지원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속상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특혜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배울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회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이미 청년이 아닌 사람”으로 분류했고, 그 분류는 생각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청년이 아니면 무엇인가. 중년인가. 그렇다면 중년은 이미 자기 앞가림을 끝낸 사람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중년의 불안과 욕망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이 묻는 사회』가 중요한 이유는 이런 질문을 개인의 예민함으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나이에 관한 멸칭과 농담이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와 제도와 관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언어는 생각의 껍데기가 아니다. 언어는 생각의 길이다. “아줌마”, “아재”, “영포티”, “꼰대” 같은 말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개별 인간을 보기 전에 연령 이미지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이미지는 고용, 관계, 정책, 미디어 재현 속에서 다시 차별을 강화한다.
차별은 늘 게으른 사고와 손잡는다. 한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오래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삶, 직업, 몸, 실패, 배움, 변화 가능성을 봐야 한다. 그러나 멸칭은 빠르다. “아줌마”라고 부르면 생활감과 촌스러움이 따라오고, “영포티”라고 부르면 젊은 척하는 중년의 이미지가 따라오고, “꼰대”라고 부르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는 판정이 따라온다. 구조를 분석하는 일은 어렵고 느리지만, 사람을 조롱하는 일은 쉽고 빠르다. 그래서 불안한 사회일수록 언어는 짧아지고, 짧아진 언어는 다시 인간을 작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중년 혐오가 단순히 젊은 세대가 중년을 싫어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각 세대가 자기 자리를 잃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불안이 서로를 향한 칼날이 된 결과에 가깝다. 청년은 시작할 자리가 없다고 느끼고, 중년은 다시 시작할 권리를 잃었다고 느끼며, 노년은 쓸모없는 존재로 밀려난다고 느낀다. 그런데 분노는 구조가 아니라 가까운 타 연령대에게 향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로 오해한다.
나이는 원래 그렇게 서로를 밀어내기 위한 기준이 아니어야 한다. 나이는 삶의 한 과정이고, 각 시기마다 다른 욕망과 가능성과 취약성을 가진다. 청년에게는 출발의 지원이 필요하고, 중년에게는 전환의 지원이 필요하며, 노년에게는 존엄한 지속의 지원이 필요하다. 어느 한 세대의 몫을 다른 세대가 빼앗는 방식이 아니라, 각 생애 단계가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청년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배움과 전환의 권리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줌마로 불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이름과 꿈과 능력과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읽고, 쓰고, 배우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나이묻는 사회』는 나이를 지우자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우리 삶을 얼마나 깊이 규정하는지 똑바로 보자고 말하는 책이다. 나이를 숫자로만 여기자는 말은 위로가 될 수 있지만, 현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이는 숫자 이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이 하나로 사람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나이가 아니라, 나이를 사람보다 먼저 보는 습관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사회는 단순하다. 청년이 아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중년이어도 배울 수 있으며, 노년이어도 존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회. 나이로 사람을 닫아 버리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라면,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이해해 보려고 애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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