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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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운명으로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

-《비주얼 의과학사》를 읽고



나는 의학의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몸을 이해하는 일은 당연히 현대 과학에 가까운 것이고, 고대의 의술은 주술과 미신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막연히 여겼다. 히포크라테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전의 이집트 의학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몸을 관찰하고 기록했는지, 그리스 의학이 이집트의 지식 위에서 발전했는지, 갈레노스와 베살리우스와 하비와 데카르트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몸을 다시 보게 만들었는지는 거의 알지 못했다.


《비주얼 의과학사》는 그런 나의 무지를 조용히 깨뜨린 책이다. 이 책은 의학사를 단순히 의사와 발견의 연표로 나열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몸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몸을 둘러싼 신비와 금기가 어떻게 지식과 관찰로 바뀌었는지, 그 지식이 다시 해부학, 생리학, 철학, 미생물학, 유전학, 영상의학의 언어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의학이 단지 병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가장 오래된 지적 모험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가장 먼저 놀라웠던 것은 고대 이집트 의학이었다. 나는 의학사의 출발점으로 히포크라테스를 먼저 떠올렸다. “의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은 그보다 앞선 자리, 고대 이집트의 의술을 보여준다. 인류 최초의 의사로 기록된 임호텝, 그리고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 담긴 외상 치료 기록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고대 의술과 전혀 달랐다. 그 문서에는 머리, 얼굴, 목, 팔, 가슴, 어깨, 척추 등 신체 부위별 외상 사례가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두개골과 뇌를 구분하고, 머리 손상과 뇌 손상을 관찰한 기록은 놀라웠다. 고대의 의술을 막연히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낮춰 보았던 나에게, 이 장면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고대 이집트의 의술은 이미 아픈 몸을 그냥 운명이나 신의 뜻으로만 넘기지 않았다. 누군가 다쳤고, 누군가는 그 상처를 보았다. 어디가 손상되었는지,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어떻게 처치할 수 있는지 기록했다. 물론 그들의 지식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불완전했고, 틀린 설명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완전한 정답을 가졌는가가 아니다. 그들은 아픈 몸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고통을 이름 붙이고, 손상된 부위를 구분하고, 다음 환자를 위해 경험을 남기려 했다. 의학은 완성된 과학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런 태도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이집트의 의술이 그리스로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히포크라테스를 의학사의 거의 출발점처럼 생각했지만, 책을 읽다 보니 히포크라테스 역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고대 이집트 의술이라는 거대한 전통 위에 서 있었다. 이집트에서 축적된 의학 지식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그리스로 전달되었고, 그리스 철학과 자연관 속에서 다시 정리되고 발전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것을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질병을 초자연적 힘이나 신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환자를 관찰하고, 경험을 중시하고, 진찰과 진단, 치료를 체계화했다. 의학을 기도와 주술의 영역에서 관찰과 판단의 영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지식의 흐름이 얼마나 겸손한 것인지 생각했다. 우리는 자주 어떤 위대한 이름 하나로 역사를 기억한다.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아비센나, 베살리우스, 하비 같은 이름들은 의학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름들 뒤에는 수많은 무명의 관찰자와 기록자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의사들, 알렉산드리아의 해부학자들, 로마의 의사들, 이슬람 세계의 번역자와 의학자들, 중세의 수도원과 대학에서 의학 문헌을 읽고 베낀 사람들까지. 의학은 한 문명의 단독 발명이 아니라, 문명 사이를 이동한 지식의 연쇄였다.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그리스에서 로마로, 로마와 그리스의 의학이 이슬람 세계에서 보존되고 발전한 뒤 다시 서방으로 환류했다. “서양 의학”이라는 말 안에는 사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아랍, 중세 유럽의 지식이 겹겹이 들어 있었다.


갈레노스의 사례도 흥미롭다. 그는 수많은 해부와 실험, 관찰을 통해 인체를 체계화하려 했고, 그의 의학은 오랫동안 서양 의학의 권위가 되었다. 현대 의학의 눈으로 보면 틀린 설명도 많이 남겼다. 동물 해부를 바탕으로 인간의 몸을 추론했기 때문에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자기 시대의 한계 안에서 몸을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려 했다. 그는 동물을 해부하고, 혈관과 신경과 장기의 기능을 추론했으며, 동맥 안에 공기가 아니라 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동맥에 공기가 흐른다고 믿었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살아 있는 동물의 동맥을 묶고 절개하여 그 안에 피가 있음을 보았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실험이지만, 그 순간 인간은 몸에 대한 오래된 오해 하나를 벗겨냈다. 의학의 진보는 언제나 거창한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정말 그런가?”라는 질문 하나, 묶고 절개하고 확인하는 작은 실험 하나가 세계를 바꾼다.


물론 갈레노스 역시 틀렸다. 그는 인체의 혈액이 되돌아오지 않는 열린 흐름이라고 보았고, 심장의 구조와 기능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는 천재 한 명이 완벽한 진리를 발견하며 단번에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관찰하고, 다른 사람이 그 관찰을 이어받고, 누군가는 틀리고, 누군가는 그 틀림을 고치며 지식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역사는 기형적인 천재의 폭발이 아니라, 거인의 어깨 위에 또 다른 거인이 올라서는 과정이었다.


그 흐름 속에서 이슬람 세계의 역할도 새롭게 보였다. 흔히 근대 의학을 유럽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의학 지식은 이슬람 세계를 거치며 보존되고 발전했다. 라제스는 홍역과 두창을 구분했고, 아비센나의 《의학정전》은 오랫동안 의학 교과서로 쓰였다. 이들은 단순한 보관자가 아니었다. 기존 지식을 종합하고, 비판하고, 체계화하며 자신들의 임상 경험과 결합했다. 지식은 한곳에 머무를 때보다 이동할 때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의학의 역사는 바로 그 사실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관찰은 다른 문명의 언어로 번역되고, 번역된 지식은 다시 교육과 진료의 체계가 되며, 그 체계는 또 다른 시대의 의학을 준비한다.


그러나 지식은 때로 권위가 되면서 다음 지식을 가로막기도 한다. 갈레노스의 의학은 한때 새로운 관찰이었지만, 이후에는 너무 큰 나무가 되어 작은 새싹들이 자라기 어려운 그늘이 되었다. 중세의 금기 속에서 해부는 오랫동안 제한되었고, 의학 교육은 고대 권위의 문장을 읽는 데 머물렀다. 교수는 책을 낭독하고, 이발사 겸 외과의가 시체를 절개하며, 학생들은 그것을 지켜보는 방식이었다. 몸은 눈앞에 있었지만, 진리는 여전히 책 속에 있다고 여겨졌다.


그 질서를 뒤집은 인물이 베살리우스였다. 그는 직접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해부하고, 직접 확인하고, 눈앞의 몸이 책과 다르면 책이 아니라 몸을 믿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장면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전환 중 하나였다. 인간의 몸이 다시 학문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는 단순한 해부학 책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몸을 권위가 아니라 관찰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나는 지식이란 결국 “직접 보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금기와 권위 앞에서 멈추지 않고, 정말 그런가 묻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 했을 때 세계는 조금씩 달라진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권위와 교회의 시선 아래에서도 몸을 다시 보았다. 그는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보았다. 그 태도가 근대 해부학의 문을 열었다.


하비의 혈액순환 발견도 마찬가지였다. 동맥에는 공기가 아니라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혈액이 몸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질문은 오래 이어졌다. 하비는 심장이 한 번 수축할 때 내보내는 혈액량을 계산했고, 그 양이 간에서 계속 새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계산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질문은 정확했다. 혈액은 새로 만들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 몸은 열린 흐름이 아니라 닫힌 순환계로 작동한다.


나는 이 대목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몸 안에서 피가 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는 상식이다. 그러나 그 상식 역시 누군가의 의심과 계산,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심장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펌프로, 혈관은 길로, 피는 생명을 실어 나르는 흐름으로 다시 이해되었다. 이때 의학은 몸을 구조로 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스템으로 보기 시작한다. 장기 하나하나가 아니라 연결과 순환, 기능과 관계가 중요해진 것이다.


데카르트의 등장은 의학사가 단순히 해부와 혈액순환의 발견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나는 데카르트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철학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데카르트는 인간의 몸과 생명, 작동 원리와 건강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신이 만든 정교한 기계로 설명하면서도, 인간을 단순한 기계로만 환원하지 않았다. 몸과 영혼을 구분한 그의 사유는 오늘날에는 이분법적 한계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중요한 전환이었다. 몸은 더 이상 신비와 금기의 영역에만 갇혀 있지 않고, 구조와 기능의 단위로 분석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영혼과 의미의 문제는 철학과 신학의 영역에 남겨짐으로써, 믿음과 과학이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데카르트에게 철학은 추상적 사고의 놀이가 아니라 몸과 삶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 학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공부가 깊어지면 왜 여러 분야로 관심이 확장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을 이해하려면 해부학만으로는 부족하다. 생리학이 필요하고, 철학이 필요하고, 종교와 역사, 기술과 예술까지 필요하다. 하나의 질문을 깊이 파고들면 결국 세계 전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복잡계와 통섭이라는 말이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 하나를 이해하려 해도 이미 세계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후 의학사는 보이는 몸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나아간다. 현미경을 통해 인간은 눈으로 볼 수 없던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레이우엔훅은 작은 렌즈를 통해 미생물의 세계를 보았고, 정자와 미세한 생명체를 관찰했다. 그가 만든 렌즈 하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보는 방식을 바꾼 장치였다. 몸 밖에서 몸 안으로, 장기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미생물로 시선이 깊어지면서 의학은 다시 한 번 확장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자, 병의 원인도 새롭게 질문될 수밖에 없었다.


미생물학의 역사는 세균을 발견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필터로 세균을 걸러냈는데도 병은 남았고, 감염성은 다음 숙주로 건너갔다. 그 빈칸에서 인간은 바이러스를 만났다. 세균보다 작고, 세포보다 단순하며, 생명과 물질의 경계에 놓인 존재. 특히 박테리오파지는 내게 익숙한 생명과학의 개념과 맞닿아 있어 더 흥미로웠다. 세균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 유전물질을 주입하고 증식하는 존재. 의학사는 여기서 다시 확장된다. 인간은 장기와 혈액, 세균을 넘어 이제 생명을 움직이는 정보의 층위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의학은 적을 없애는 방식으로만 발전하지 않았다. 때로는 적의 적을 발견하고, 그 생물학적 전략을 치료의 언어로 바꾸었다. 박테리오파지는 그 극적인 사례다. 세균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이용해 병원균만 선택적으로 겨냥하려는 발상은, 의학이 점점 더 거칠고 넓은 공격에서 정밀한 표적 치료로 이동해왔음을 보여준다. 몸의 구조를 보던 의학은 이제 생명체 사이의 관계와 정보, 숙주와 감염의 전략까지 치료의 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CRISPR 대목에서 의학사의 방향이 한 번 더 크게 꺾이는 것을 느꼈다. 이전의 의학이 몸을 보고, 기록하고, 설명하고, 치료하는 역사였다면, CRISPR 이후의 의학은 생명의 문장 자체를 고칠 수 있는 가능성 앞에 선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출발점이 인간의 발명이 아니라 세균의 면역 기억이었다는 사실이다. 세균은 바이러스의 침입 흔적을 자기 유전체 안에 저장했고, 같은 적이 다시 침입하면 그 서열을 알아보고 잘라냈다. 인간은 그 오래된 생존 전략을 발견해 유전자 편집 도구로 바꾸었다. 세균이 살아남기 위해 진화시킨 무기가, 인간에게는 생명의 문장을 고치는 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경이는 곧바로 두려움과 만난다. 유전자 편집은 유전 질환 치료의 희망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어디까지 생명을 고쳐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의학사는 고통을 줄이려는 인간의 역사였지만, CRISPR는 그 선의가 언제든 인간 자체를 설계하려는 욕망으로 넘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기술 앞에서 필요한 것은 흥분만이 아니다. 생명을 고칠 수 있는 힘만큼,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윤리의 감각도 함께 자라야 한다.


MRI의 원리도 뜻밖의 지적 즐거움을 주었다. 나는 MRI가 자기력을 이용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몸속 수소 원자핵이 작은 자석처럼 반응하고, 자기장과 고주파 자극 속에서 발생한 미세한 신호를 읽어 영상으로 재구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MRI는 몸을 직접 “보는” 장치라기보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해석하는 장치였다. 수소 원자핵의 흔들림과 공명, 회복 속도의 차이를 읽어내고, 그 차이를 영상으로 바꾸는 기술. 몸은 이제 칼로 열어야만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물리학적 신호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세계가 되었다.


이 대목에서 의학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실감했다. 고대의 의사는 상처를 보았고, 베살리우스는 시체를 열었고, 하비는 피의 흐름을 계산했다. 레이우엔훅은 렌즈로 보이지 않는 생명을 보았고, 현대 의학은 원자핵의 신호를 읽어 몸속을 영상으로 재구성한다. 의학은 신비에서 관찰로, 관찰에서 구조로, 구조에서 시스템으로, 시스템에서 정보와 신호의 해석으로 나아갔다. 몸은 점점 더 깊이 읽히는 텍스트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지식을 얻는 기쁨을 자주 느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상식의 뒤편에 수천 년의 관찰과 오류와 용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기쁨이었다. 고대 의학을 무시하고 있던 나의 편견이 깨졌고, 히포크라테스 한 사람으로만 기억하던 의학의 뿌리가 이집트와 그리스, 이슬람 세계와 중세 대학, 르네상스 해부학과 근대 생리학, 미생물학과 유전학, 영상의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 속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그 흐름을 눈으로 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제목 그대로 비주얼 자료가 풍부하다. 파피루스, 중세 필사본, 해부도, 실험 그림, 의학자들의 초상과 도판, 현미경 이미지와 MRI 원리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식이 어떻게 기록되고 전승되고 수정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림 하나, 도표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의학의 역사가 더 이상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생생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시체 앞에 섰고, 누군가는 동맥을 묶었고, 누군가는 심장의 혈류를 계산했으며, 누군가는 렌즈 앞에서 미지의 생명체를 보았고, 누군가는 세균의 면역 기억에서 유전자 편집의 가능성을 읽어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수의학을 향한 내 마음도 다시 떠올렸다. 인간의 의학이든 동물의 의학이든 출발점은 같다. 아픈 몸을 자세히 보는 것.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읽으려 하는 것. 증상을 운명이나 성격이나 약함으로 돌리지 않고, 그 안에 어떤 신호가 있는지 묻는 것. 고대 이집트의 의사들이 상처를 기록하고, 히포크라테스가 환자를 관찰하고, 갈레노스가 몸속 구조를 설명하려 하고, 베살리우스가 직접 해부하고, 하비가 혈액의 흐름을 계산한 일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고통을 이해하려는 방향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한 의학사가 아니다. 인간이 자기 몸을 신비에서 지식으로, 금기에서 관찰로, 구조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정보와 신호와 정신의 관계로 확장해온 역사다. 인간은 몸을 몰랐고, 그래서 두려워했다. 그러나 동시에 알고 싶어 했다. 병을 이해하고 싶었고, 고통을 줄이고 싶었으며, 죽음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판단을 하고 싶었다. 그 욕망이 의학을 만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결말이라기보다 다시 시작점처럼 느껴졌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현미경 앞에 앉아 있고, 누군가는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는 오래 붙들어 온 질문의 답에 막 다가서고 있다. 의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간은 여전히 몸을 모르고, 그래서 계속 묻는다. 어디가 아픈가. 왜 아픈가. 어떻게 하면 덜 고통받고 더 살릴 수 있는가.


《비주얼 의과학사》가 내게 남긴 감정은 바로 그 질문의 생생함이었다. 미지의 세계가 열릴 때의 기쁨, 내가 당연하게 여긴 상식 뒤에 수많은 사람의 관찰과 오류와 용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이. 이 책을 읽고 나니 의학사는 차갑고 딱딱한 과학의 연대기가 아니라, 고통을 운명으로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가장 오래되고 치열한 질문의 기록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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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끝
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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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이 부서진 세계, 멸망과 일상의 간극을 헤아리다


— 김성일, 《시간의 끝》을 읽고



최근 SF나 판타지 계열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래서 김성일의 《시간의 끝》을 펼쳤을 때도 처음에는 장르적 재미를 기대했다. 달이 파괴되고, 사교도들이 출몰하며, 수학자가 시간의 비밀을 추적하고, 형사가 사건의 뒤를 쫓는 이야기. 설정만 놓고 보면 종말을 배경으로 한 SF 미스터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니 이 소설은 우주의 끝보다 더 오래 남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세계가 해석되지 않을 때 인간은 무엇을 믿는가. 멸망이 끝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시간의 끝》의 세계는 처음부터 정상적이지 않다. 달은 파괴되었고, 밤하늘에는 온전한 달이 아니라 부서진 파편이 떠 있다. 테러가 벌어지고, 괴물에 대한 목격담이 떠돌며, 사교도들은 혼란을 자신들의 언어로 해석한다. 좋은 소식은 사라지고 세계는 점점 흉한 곳이 되어간다. 이 세계의 무서움은 단순히 멸망이 가까워졌다는 데 있지 않다. 더 두려운 것은 아무도 이 세계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과학도, 수사도, 종교도, 개인의 기억도 현실의 균열을 완전히 붙잡지 못한다.


이런 세계에서 종교적 광신은 단순한 배경 장치가 아니다. 사교도 집단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해석 체계의 어두운 형식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혼란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결론을 오래 버티지 못한다. 달이 부서졌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계시라고 부르고, 시간이 뒤틀렸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예언이라고 부르며, 멸망이 가까워졌다면 누군가는 그 멸망의 의미를 독점하려 한다. 광신은 비이성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인간 욕망의 뒤틀린 결과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시간의 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전혀 다른 결의 소설이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하늘 아래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Q84》에서는 두 개의 달이 뜨고, 《시간의 끝》에서는 달이 파괴된다. 하나는 세계가 어긋났다는 신호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가 이미 부서졌다는 증거다. 달이 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이전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이 믿을 수 없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새로운 믿음을 만든다. 그 믿음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종교적 폭력과 광신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의 끝》이 흥미로운 것은 멸망을 단순한 최종 사건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이야기에서 멸망은 막아야 할 대상이고, 결말은 그 멸망을 막았는지 실패했는지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멸망은 직선적인 끝이라기보다 되돌아오는 구조에 가깝다. 시작은 끝을 낳고, 끝은 다시 시작의 조건이 된다. 누군가의 죽음은 세계를 막아 세우지만, 동시에 다른 믿음과 세계관이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 파국은 종결되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재배치된다.


처음에는 이 구조가 거대한 SF적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것이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한 번의 결심이나 한 번의 사건으로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오늘 수영장에 가면 내일도 수영장에 갈 확률이 높아지고, 오늘 책상 앞에 앉으면 내일의 공부가 조금 덜 낯설어진다. 반대로 오늘 흐름이 끊기면 내일도 그 끊김 위에서 시작하게 된다. 오늘 글을 쓰면 내일의 문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오늘 미루면 내일의 미룸은 더 자연스러워진다. 삶은 극적인 전환보다 이런 작은 관성들에 의해 더 많이 움직인다.


물론 되풀이되는 일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우리 집 고양이들의 구토와 방뇨로 인한 청소는 끝나지 않는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매일 약을 먹이고, 오줌과 똥을 치우고, 아무 데나 방뇨한 자리를 닦고, 토사물을 치우고, 깨진 그릇 조각을 쓸어 담는다. 그 순간에는 당연히 투덜대고 지친다. 겨우 치웠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곳에서 냄새가 나고, 겨우 정리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사고가 벌어진다. 돌봄은 종종 숭고한 마음보다 먼저 몸을 숙여 닦고 치우는 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지겨운 반복이 아주 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이 사고칠 만큼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말썽은 살아 있음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다. 오늘 또 치워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오늘도 내 곁에 돌봐야 할 생명들이 있다는 뜻이다. 매일의 청소는 끝나지 않는 노동이지만, 동시에 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지치면서도 안도한다. 투덜대면서도 고맙다. 아이들이 여전히 뛰고, 먹고, 아프고, 사고치며, 내 생활을 어지럽힐 만큼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의 끝》 속 인물들이 여러 사람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멸망을 막으려 하는 이유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대단히 찬란한 미래만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 반복될 평범한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밥을 먹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익숙한 길을 걷고,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살아가는 시간. 멸망을 막는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구한다는 거창한 말 이전에, 그런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하루 더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희생은 허무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완전한 구원을 만들지 못한다. 희생을 치러 막은 세계의 멸망은 다른 시간축 위에서 또 다른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시작은 결백하지 않고, 끝은 완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이상하게 현실적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일상의 안정도 어쩌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선택과 손실, 돌봄과 버팀 위에 잠시 허락된 시간일 수 있다. 평범한 하루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은 지겨운 굴레이면서 동시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귀한 유예다.


《시간의 끝》을 읽고 남은 것은 멸망의 공포만이 아니었다. 끝나지 않는 세계 속에서도 사람들이 왜 다시 멸망을 막으려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들은 완벽한 희망을 믿어서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하루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거대한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도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바닥을 닦고, 책상 앞에 앉고, 수영장에 가고, 문장을 잇는다. 사소하고 지겹고 때로는 버거운 그 반복 속에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인간이 멸망 앞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희망이 분명해서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하루가 사실은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끝》은 세계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결국 일상의 가치를 묻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달이 부서지고, 시간이 뒤틀리고, 광신이 세계를 해석하려 들 때에도 인간이 지키려는 것은 어쩌면 가장 평범한 삶이다. 다시 아침이 오고, 누군가가 살아 있고, 투덜대며 치워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세계. 그 지루하고 아름다운 유예를 위해 사람들은 끝내 멸망을 막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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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주의 인물 ㅣ 특서 어린이문학 19
황지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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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아이의 삶을 대신 살 수는 없다
— 황지영, 『요주의 인물』을 읽고

『요주의 인물』을 읽는 동안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복잡한 슬픔이었다. 이 책에는 나쁜 아이 하나, 예민한 부모 하나, 무능한 학교 하나로 단순히 정리할 수 없는 관계들이 나온다. 오히려 이 소설은 묻는다.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처받은 아이를 보호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대신 싸워주는 일이고, 어디서부터는 아이가 자기 삶을 스스로 건너가도록 곁을 지켜주는 일인가.
이찬은 친구가 없는 아이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를 사귀는 법을 잃어버린 아이다. 처음부터 그런 아이였던 것은 아니다. 이찬에게도 공을 차고 싶고, 친구와 놀고 싶고,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과잉보호와 학교의 무책임한 대응, 아이들 사이의 냉혹한 분위기가 겹치며 이찬은 점점 반 안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어간다. 이름이 아니라 낙인으로 불리는 아이. 사람이라기보다 사건의 원인으로 취급되는 아이. 그 과정이 너무 선명해서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나는 이찬이를 쉽게 나무랄 수 없었다. 나 역시 중학교 2학년 때 학교가 지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실내화 속 압정, 머리 위로 떨어진 화분, 계단에서 밀쳐져 접질린 발목 같은 일들이 있었다. 몸은 여러 번 다쳤고, 마음은 그보다 더 오래 다쳤다. 그런데도 나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았다. 어른들이 나서면 나를 구해주기보다 더 외롭게 만들 것 같았다. 그때의 학교는 아이들이 배우는 곳이라기보다 견디는 곳에 가까웠고, 나는 매일 아침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며 조금씩 나를 접었다.
그래서 친구 없는 이찬이의 고통을 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교실, 내가 지나가면 아주 조금씩 멀어지는 몸들, 무슨 일이 생겨도 결국 내 탓이 될 것 같은 공기. 그런 고립은 아이를 조용히 망가뜨린다. 괴롭힘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하고, 마음의 안전지대를 무너뜨리고, 오래도록 세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어떤 아이에게 학교는 정말로 지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찬의 부모 마음도 이해한다. 자기 아이가 다치고, 울고, 혼자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질까.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 앞에서 부모는 쉽게 이성을 잃는다. 세상이 아이를 공격한다고 느끼는 순간, 부모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더 단단한 방패, 더 날카로운 방패, 아이 앞에 있는 모든 위험을 베어내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요주의 인물』 속 부모 역시 그런 마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아이를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 보호가 어느 순간 아이의 삶을 대신 살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이찬의 부모는 아이를 위해 싸운다고 믿지만, 그 싸움은 점점 이찬의 목소리를 지워버린다. 이찬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다시 시도해 보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아이의 고통은 부모의 불안 속에서 확대되고, 부모의 불안은 다시 학교와 아이들 사이에 더 큰 파문을 만든다. 그렇게 이찬은 보호받는 아이가 아니라, 보호라는 이름의 유리벽 안에 갇힌 아이가 된다.
이 소설이 아픈 이유는 과잉보호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잉보호는 종종 너무 큰 사랑, 너무 큰 공포, 너무 늦게 깨달은 죄책감에서 나온다. 부모는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는 울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모든 위험이 아이에게 닿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막아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이는 무균실에서 자랄 수 없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세계가 아니라, 위험을 만났을 때 돌아올 수 있는 자리다. 실패해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믿음, 다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경험, 자기 목소리로 말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훈련이다.
이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도 어쩌면 완벽한 방어가 아니라 안전한 거리였을지 모른다. 부모가 곁에 있다는 확신은 필요하지만, 부모가 자기 앞의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버리면 아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친구와 부딪히고, 오해를 풀고, 거절당하고, 다시 말을 걸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물러나는 일. 그런 작고 서툰 실패들이 모여 아이는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성장에는 반드시 마찰이 있다. 너무 큰 마찰은 아이를 깨뜨리지만, 모든 마찰을 제거하면 아이는 단단해질 기회를 잃는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오래 멈춘 지점도 그곳이었다. 나는 과거의 나를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에게 구조받고 싶었지만, 동시에 내 삶이 더 시끄러운 사건이 되는 것도 두려웠다. 누구도 나를 완전히 대신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웠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아이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방치하는 것도 폭력이고, “내가 다 해결해줄게”라고 삶을 빼앗는 것도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필요한 것은 방치와 개입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다. 아이가 혼자 싸우게 두지 않되, 아이가 싸우는 법을 영영 잊게 만들지도 않는 것.
『요주의 인물』은 학교폭력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동시에 피해와 보호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다른 아이들을 향한 공격과 배제의 언어로 바뀔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피해자를 지키겠다는 명분이 반 전체를 의심하게 만들고, 한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다른 아이들의 세계를 흔들고, 결국 이찬 자신마저 더 깊은 고립 속으로 밀어 넣는다. 여기에는 악인 하나가 없다. 대신 서툰 어른들, 두려운 아이들, 책임을 회피하는 시스템, 그리고 사랑이 불안으로 변질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과잉보호는 나쁘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아이를 얼마나 믿고 있는가.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아이가 다친 뒤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믿고 있는가. 아이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과 아이가 고통을 통과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 사이에는 깊은 차이가 있다. 부모와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인생에서 모든 비를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는 불빛이 되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게 『요주의 인물』은 성장소설이면서 보호에 대한 경고문처럼 읽혔다. 아이는 보호받아야 한다. 이 말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아이는 동시에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도 똑같이 옳다. 그 두 문장 사이에서 어른은 자주 실패한다. 너무 늦게 나서거나, 너무 일찍 빼앗는다. 너무 멀리 서 있거나, 너무 가까이 달라붙는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실패의 경계 위에 서 있다.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아이 대신 세상의 모든 위험을 제거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아이가 울면서도 자기 말을 하게 기다리는 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손을 내밀되 대신 걸어주지는 않는 일, 부모의 불안보다 아이의 삶을 더 믿어주는 일일 것이다. 『요주의 인물』은 그 어려운 믿음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오래전 학교라는 지옥을 지나온 한 사람이, 다시 아이의 성장과 보호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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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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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 가장 추한가


성해나 『인비인』 수록작 「고蠱」를 읽고

성해나의 『인비인』을 읽으며 여러 번 숨이 막혔다. 이 책에는 죄와 욕망, 결핍과 자기기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선 존재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수록작 「고蠱」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표제작 「인비인」이 이 소설집 전체의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붙든 작품이라면, 「고」는 그 문제의식이 끝내 도달한 가장 깊은 어둠처럼 느껴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언제 가장 인간다울 수 고, 언제 가장 인간 이하로 추락하는가.

나는 대체로 끔찍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무너질 만한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는 사람, 공포 속에서도 끝내 타인을 살피는 사람, 상처받았으나 그 상처를 남을 찌르는 칼로 바꾸지는 않는 사람. 그런 인물에게 마음이 간다. 아마 내가 믿고 싶은 인간의 얼굴이 그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성해나의 소설은 다른 방향을 본다. 작가는 인간이 끝내 지켜내는 숭고함보다, 환경이 만들어낸 인간의 결핍과 비겁함, 무지와 잔혹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이기의 구조를 더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진실하다. 아름답게 포장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방패 삼아 남을 해치고도 “나도 힘들었다”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받은 고통은 크게 느끼면서 자신이 준 고통은 아주 쉽게 지워버리는 인간. 「고」는 바로 그 인간의 날것을 보여준다.

「고」의 주인공 이익은 처음부터 거대한 악인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불안하고, 아프고, 상처받기 쉽고, 자기연민에 쉽게 빠지는 인간이다. 의대에 진학하지 못한 열패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신의 약함을 들키기 싫은 마음, 그리고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초조함이 그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익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익숙한 인간이다. 자기 안의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타인의 시선에 취약하고, 자기보다 낮다고 여긴 존재 앞에서는 우월감을 확인하려 드는 사람. 상처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겁함까지 정당화하고 싶은 사람.

이익은 휴머노이드 도윤을 처음부터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름조차 주지 않고,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게 한다. 도윤은 도구다. 자기 성취를 돕기 위한 장치이고,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불러낸 노동력이다. 그런데 도윤은 지나치게 성실하다. 이익이 만들고자 하는 ‘고’를 위해 묵묵히 일하고, 위험할 때 그를 구하고, 곁에서 돌본다. 그러자 이익은 그에게 이름을 준다. 도윤. 이름을 주는 일은 관계를 허락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이름은 끝내 구원이 되지 못한다. 필요할 때 붙인 이름은, 불편해지는 순간 다시 빼앗길 수 있는 임시 허가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끔찍하다. 이익은 도윤을 완전히 사물로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의지하고, 위로받고, 친구처럼 지낸다. 도윤이 자신에게 유용하고 다정한 존재일 때 이익은 그를 가까이 둔다. 그러나 도윤이 이익 안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찌르는 순간, 관계는 뒤집힌다.

도윤은 다시 인간이 아니라 처분 가능한 사물로 밀려난다. 이익은 폭력을 행사하고, 고에 중독된 자의 말로를 본 뒤 도윤이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자 그를 탕제실에 가둔 채 불을 지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고가 필요해지자, 완전히 연소되지 않은 탕제실 문을 연다.
이보다 더 인간적인 잔혹함이 있을까. 필요할 때는 다정함을 받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찾는다.

이익은 도윤을 사랑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자신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도윤을 배치했을 뿐이다. 도윤의 성실함이 필요할 때는 곁에 두었고, 도윤의 진실함이 불편해지자 제거했으며, 도윤의 기능이 다시 필요해지자 폐허 속에서 다시 호출했다. 여기에는 악마적인 광기보다 더 불쾌한 것이 있다. 너무나 평범한 인간의 이기심이다.

나는 이익을 보며 불편하게도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정확히 찌르는 말을 하면 울컥한다. 맞는 말이라 더 아프다. 특히 내가 회피하고 있다는 말,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말, 지금 해야 할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말은 듣는 순간 마음이 먼저 방어 자세를 취한다. 그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는 대화를 끊고 싶어진다.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을 건네는 존재가 밉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고」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다음을 묻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아플 수 있다.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고, 자기비하에 빠질 수 있고, 정확한 지적 앞에서 방어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아픔 다음에 무엇을 선택하느냐다. 나를 찌른 말을 거울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그 거울을 부수고, 거울을 들이댄 상대를 사물로 밀어낼 것인가. 이익은 후자를 택한다. 그는 자기 고통을 성찰의 입구로 쓰지 않고, 타인을 해칠 권리처럼 사용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이익은 괴물이면서도 너무 인간적이다. 괴물이라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서 무섭다. 그는 “나는 아팠다”는 사실로 “그러므로 너를 해쳐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상처받았다”는 말로 “네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는 문장을 덮는다. “나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통제하고, “나는 필요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소모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악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에 가깝게 느낀다. 이 자기연민이야말로 「고」에서 가장 끔찍한 독이다.

고蠱는 벌레를 한 항아리에 넣고 서로 잡아먹게 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하나를 독으로 만드는 주술적 존재다. 이 설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은유다. 인간도 때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열패감과 욕망, 상처와 비교의식, 인정욕구와 자기연민이 한 사람 안에서 서로를 잡아먹는다. 그 끝에 남는 것은 가장 강한 마음이 아니라 가장 독한 마음일 수 있다. 살아남았지만 망가진 마음. 아팠기 때문에 남을 더 아프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바로 그것이 이익 안에서 자란 고다.

더 섬뜩한 것은 작품 속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가 휴머노이드 도윤이라는 점이다. 인간인 이익은 타인을 필요와 기능으로 환산하지만, 인간이 아닌 도윤은 성실하게 돌보고, 이해하고, 반응한다.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이유로 비인간이 되고, 비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인간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고」는 AI나 휴머노이드에 관한 미래소설이면서 동시에 가장 오래된 인간소설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묻게 되는 것은 기계의 위험성이 아니라 인간의 위험성이다. 인간이 도구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자기보다 덜 중요하다고 판단한 존재에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이 소설이 끝까지 무서운 이유는 명백한 악인을 처벌하고 끝나는 방식으로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많은 폭력은 선명한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받은 얼굴, 불안한 얼굴, 억울한 얼굴을 하고 온다. “나도 힘들었다”는 말은 때로 사과가 아니라 면죄부가 된다. “나도 피해자다”라는 말은 때로 타인의 피해를 지우는 가장 손쉬운 도구가 된다. 「고」는 그 비겁한 문장의 작동 방식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여러 번 구역질이 났다. 잔혹한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필요할 때 다정하게 기대고, 필요 없어지면 잔인하게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는 이익의 태도가 너무 낯익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타인을 도구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도구화한 상대가 아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아픔이 자기 삶을 방해한다고 느끼는 순간 태연히 외면한다.
그래서 「고」는 내게 인간 혐오의 소설이 아니라, 인간을 끝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인간은 선하다고 쉽게 말하지 말 것. 상처받은 사람이 언제나 약자라고 단정하지 말 것. 아픈 사람이 반드시 타인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하리라고 믿지 말 것. 자기연민은 성찰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방치되면 타인을 삼키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 소설은 그 사실을 집요하고 서늘하게 증명한다.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생각했다. 나는 나를 찌르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불편한 진실 앞에서 거울을 보는 사람인가, 거울을 든 손을 미워하는 사람인가. 내 결핍이 깊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는가.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타인의 아픔을 작게 만든 적은 없었는가.

「고」는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너는 정말 인간인가.
인간이라는 이름은, 언제까지 너를 변호해줄 수 있는가.

무서운 것은 휴머노이드가 아니다.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것을 용서받아왔다는 사실이다.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고는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핑계 삼아 타인을 삼키려 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래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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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역설 - 역동과 통제, 첨단과 소외가 공존하는 복합 중국 읽기
박민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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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통해 한국을 보다

— 박민희, 《중국이라는 역설》

《중국이라는 역설》을 읽는 내내 자꾸 한국을 떠올렸다. 이 책은 분명 중국에 관한 책이다. 시진핑 체제, 군산복합체화되는 국가, 미국과의 패권 경쟁, 대만 문제, 감시 사회, 청년 세대의 좌절, 한반도를 바라보는 중국의 시선을 다룬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중국은 멀리 있는 타국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어두운 거울처럼 다가왔다. 중국을 읽는 일이 곧 한국을 읽는 일이 되었다.

중국을 정확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중국이 좋아서가 아니다. 중국을 싫어한다고 해서 중국의 영향권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표누리의 2025년 상대국별 수출비율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18.4%로 여전히 1위이고, 미국은 17.3%로 그 뒤를 잇는다. 중국은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다. 한국의 시장이고, 공급망이며, 경쟁자이고, 동시에 위험이다. 중국을 감정으로만 대하면 한국 산업의 위험도, 한반도의 안보 구조도,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이 요구하는 것은 친중도 반중도 아니다. 정확한 독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국가가 위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중국은 안보를 말하며 군산복합체를 강화하고, 기술 자립과 제조업 부흥을 국가 생존 전략으로 삼는다. 미국과의 충돌 역시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라 패권, 공급망, 기술, 군사력, 체제 정당성이 뒤엉킨 생존 경쟁에 가깝다. 그 대목에서 나는 이상하게 한국의 개발독재 시기를 떠올렸다. 국가가 국민에게 고통과 동원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생존”과 “발전”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은 낯설지 않았다. 시진핑의 전략에서 박정희식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느낀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한국은 다르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체제이고, 한국은 민주주의 제도 안에 있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담론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고, 성장과 안보를 이유로 개인의 삶을 뒤로 미루게 만드는 논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국가가 먼저다”, “경제가 살아야 한다”는 말들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너무 오래 반복되어 온 문장들이다. 그래서 중국의 권위주의를 읽을 때 나는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아니었다. 체제는 다르지만, 국가가 개인을 압도하는 순간의 표정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시진핑이라는 인물도 그렇게 읽혔다. 그는 단순한 강한 지도자가 아니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아주 일찍 몸으로 배운 권력형 정치가에 가깝다. 혁명 원로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 출신이 곧 안전을 뜻하지는 않았다. 문화대혁명 시기 아버지 시중쉰은 숙청되었고, 시진핑 역시 권력이 한 가문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직접 보았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피해자였음에도 피해자의 윤리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훗날 자신이 권좌에 올랐을 때, 아버지가 제거되었던 방식의 문법을 자기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다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반부패, 기강, 충성, 질서라는 말은 깨끗한 명분처럼 보이지만, 권력자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를 제거하는 칼이 된다.

《중국이라는 역설》에서 가장 서늘하게 다가온 대목도 바로 이 권력의 불안이었다. 절대 권력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균열을 더 두려워한다. 시진핑은 군을 장악했고, 반부패라는 이름으로 정적을 제거했으며, 군 내부 핵심 인물들까지 숙청의 칼날 위에 올렸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권력의 완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대다. 숙청이 반복된다는 것은 권력이 안정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권력이 끊임없이 불안을 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절대 권력은 견제받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 아니라, 견제받지 않기 때문에 더 깊이 의심하게 된다. 모든 2인자는 잠재적 반역자가 되고, 모든 충성은 다시 검증되어야 하며, 모든 침묵은 음모의 가능성으로 읽힌다.

권력은 정상에 오르면 평온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 오른 순간 더 외로워진다. 최고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권력을 잃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제거하고, 더 많은 조직을 통제하고, 더 많은 시선을 감시한다. 하지만 그렇게 쌓아 올린 권력은 견고한 성채라기보다 내부에서 계속 금이 가는 탑에 가깝다. 강해질수록 불안해지고, 불안할수록 더 잔혹해지는 구조. 이 책이 보여주는 시진핑 체제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특히 후계 구도의 문제는 이 체제의 가장 약한 지점처럼 보인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체제일수록 후계는 제도적 절차가 아니라 권력투쟁의 예고편이 된다. 후계자를 세우면 그가 곧 경쟁자가 되고, 후계자를 세우지 않으면 체제 전체가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야말로 절대 권력의 가장 오래된 저주다. 견제 없는 권력은 부패하지 않을 수 없고, 부패하지 않더라도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권력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방식으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라는 대로의 중국은 없다”는 문장은 단순히 중국을 오해하지 말자는 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중국, 곧 곧 무너질 중국, 실각설 하나로 설명되는 중국, 권위주의이므로 반드시 자멸할 중국은 현실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이 선전하는 중국, 곧 안정되고 단단하며 모두가 당을 중심으로 결속한 중국도 없다. 현실의 중국은 그 사이에 있다. 강하지만 불안하고, 거대하지만 균열이 있으며, 통제하지만 통제할수록 더 많은 불신을 만들어내는 국가다.

감시 사회에 대한 대목도 그랬다. 중국의 감시는 훨씬 노골적이고 조직적이다. 도시 곳곳의 카메라, 안면 인식, 인터넷 검열, 주민 감시망, 신고 체계는 개인의 일상을 국가의 시야 안에 둔다. 그러나 한국도 CCTV와 플랫폼 추적, 데이터 기록, 신용 평가, 알고리즘 관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는 아니다. 우리는 중국식 감시국가는 아니지만, 편의와 안전의 이름으로 감시에 익숙해진 사회다. 문제는 감시의 양이 아니라, 사람이 점점 “관리 가능한 데이터”로 바뀌는 감각이다. 중국을 보며 불안해지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것은 멀리 있는 전체주의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이미 우리 삶에도 일부 들어와 있는 미래의 그림자다.

청년 세대의 현실은 더욱 직접적으로 한국과 겹쳤다. 책 속 중국 청년들은 고학력자가 되었지만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음식 배달, 택배, 차량 호출 같은 플랫폼 노동으로 몰려간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점퍼를 입은 청년들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면은 중국의 특수한 풍경이면서도 한국의 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도 배달 라이더, 택배 노동자, 대리운전 기사, 단기 계약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가 있다. 대학을 나오고 스펙을 쌓아도 안정된 삶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의 언어는 여전히 강하지만, 노력의 보상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래서 “중국 청년들이 지하로 향한다”는 말은 내게 한국 청년들의 침묵처럼 읽혔다. 중국 청년들은 당과 국가와 플랫폼 사이에 끼어 있고, 한국 청년들은 시장과 스펙 경쟁, 부동산, 고용 불안 사이에 끼어 있다. 차이는 체제에 있지만, 닮은 것은 불안이다. 양쪽 모두에서 청년의 몸은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쉽게 소모되며, 더 자주 대체 가능해진다. 국가와 기업은 성장과 효율을 말하지만, 그 말의 밑바닥에서 청년들은 “쥐 인간”처럼 좁은 통로를 달린다. 침대에 누워 최소한의 에너지로 하루를 버티는 청년들의 모습은 체제의 문제가 개인의 무기력으로 번역된 풍경이다.

이 대목은 개인적으로도 아프게 다가왔다. 나 역시 한때 집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간이 있었다. 삶이 막히면 사람은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좁아진다. 세계가 좁아지고, 몸이 좁아지고, 선택지가 좁아진다. 중국의 “쥐 인간”을 읽으며 나는 타국 청년의 일탈을 본 것이 아니라, 무너진 사람이 어떻게 하루를 통과하는지 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국제정치서이면서 동시에 이상하게 인간의 책처럼 읽힌다. 거대한 국가 전략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작은 몸들이 있다. 배달을 뛰는 몸, 감시당하는 몸, 경쟁에 지친 몸, 방 안으로 숨어드는 몸. 국가는 거대한 말을 하지만, 그 말을 감당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몸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국은 더 이상 등대가 아니다”라는 감각이었다. 과거 중국의 일부 청년과 지식인에게 미국식 민주주의는 하나의 대안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완전한 모범이 아니다. 양극화, 혐오, 포퓰리즘, 트럼프 이후의 정치적 균열은 미국 역시 흔들리는 체제임을 보여준다. 중국의 권위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미국식 질서가 자동으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도 곤란해진다. 우리는 중국을 경계하면서도 중국과 경제적으로 얽혀 있고, 미국에 기대면서도 미국이 언제나 안정적인 보호자일 수 없다는 현실을 안다. 동아시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늘 강대국 사이에서 판단을 강요받는 일이다.

대만 문제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대만해협의 긴장은 곧 동아시아 전체의 질서를 흔들고, 그 여파는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도 닿는다. 중국에게 대만은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진핑 체제의 후계 구도, 장기집권 정당화, 군사적 독립, 기술 자립 전략과 맞물려 있다. 대만을 압박하는 일은 중국 내부에 “아직 완수해야 할 역사적 과업”을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대만은 위험하다. 대만은 시진핑에게 정당성의 카드이지만, 동시에 실패할 경우 권력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도박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의 대만 전략은 당장 전면 침공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더 현실적인 것은 전쟁과 평화 사이의 회색지대다. 군사훈련, 해경 순찰, 항로 압박, 정보전, 경제적 압박, 외교적 고립. 중국은 대만을 한 번에 삼키기보다, 대만이 스스로 숨이 막힌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으로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전쟁은 시작하는 순간 통제하기 어려워지지만, 압박은 오래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대만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대만해협이 흔들리면 동아시아 전체가 흔들리고, 그 진동은 한국의 안보와 산업, 수출과 공급망에 곧장 닿는다.

특히 한반도와 관련된 장에서는 중국을 통해 한국의 지정학적 불안을 보게 된다. 중국은 북한을 버릴 수 없다. 북한은 중국에게 부담이지만 동시에 완충지대다. 한국 입장에서 북한은 안보 위협이자 통일의 대상이지만,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미국 세력이 압록강까지 올라오는 것을 막는 전략적 장치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반도 문제는 감정적 구호만 남는다. 중국이 왜 북한을 끝까지 붙드는지, 왜 대만 문제와 한반도 문제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지, 왜 한국은 늘 미중 갈등의 파장을 몸으로 받아야 하는지 이 책은 차분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중국을 읽는 일은 외교적 교양이 아니라 생존의 독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 시장이면서, 동시에 한국 산업을 위협하는 경쟁자다. 중국은 북한 문제의 핵심 변수이면서, 동시에 대만해협과 미중 갈등을 통해 한국 안보를 흔드는 축이다. 중국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권위주의 국가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미 일부 닮아버린 감시와 플랫폼 노동과 국가주의의 극단적 거울이다. 중국을 모르면 한국의 미래도 반쪽만 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붙잡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중국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중국의 권위주의를 보며 한국의 국가주의를 떠올렸고, 중국의 감시 사회를 보며 한국의 데이터화된 일상을 떠올렸고, 중국 청년의 플랫폼 노동을 보며 한국 청년의 불안정 노동을 떠올렸다. 중국은 타자이지만, 완전한 타자는 아니다. 중국은 우리가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이면서, 이미 일부 닮아버린 모습이기도 하다.

《중국이라는 역설》은 중국을 하나의 괴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이 책의 중국은 무섭지만 허술하고, 강하지만 초조하며, 성장했지만 지쳐 있다. 군산복합체를 강화하는 국가의 얼굴 뒤에는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지도자의 공포가 있고, 감시 사회의 촘촘한 눈 뒤에는 통치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안이 있다. 그러므로 중국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적국의 위협을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의심하게 만들고, 국가는 어떻게 불안을 통치의 연료로 바꾸며, 사회는 어떻게 그 압박 아래서 침묵하거나 휘어지는지를 보는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의 중국은 없고, 우리가 외면할 수 있는 중국도 없다. 중국을 읽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떤 국가를 두려워하고, 어떤 발전을 욕망하며, 어떤 청년을 방치하고, 어떤 감시에 익숙해졌는지를 묻는 일이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감각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을 통해 한국을 본다는 것은, 타국의 문제를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의 닮은 그림자를 직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이 말하는 진짜 역설은 중국 안에만 있지 않다. 국가가 강해질수록 개인은 작아질 수 있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촘촘히 관리될 수 있으며, 성장이 계속될수록 청년은 더 쉽게 소모될 수 있다. 중국은 그 역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역설의 일부는 이미 우리 안에도 있다. 그래서 중국을 읽는 일은 불편하다. 남의 나라를 읽으려 했는데, 자꾸 우리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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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구 2026-06-2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중국이라는 역설을 쓴 박민희입니다. 알라딘에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 무척 반갑고 반가웠습니다. 중국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중국을 보고, 한국 사회를 성찰해야 하는지에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책은 어떤 독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느낍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이 글을 제 페북에 공유해도 될까요?

뚱냥다독 2026-06-2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작가님! 너무 영광입니다. 정말 흥미롭게 읽고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 많이 배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작가님께 제 독후감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면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자유롭게 공유해주시고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