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인간은 언제 가장 추한가
성해나 『인비인』 수록작 「고蠱」를 읽고
성해나의 『인비인』을 읽으며 여러 번 숨이 막혔다. 이 책에는 죄와 욕망, 결핍과 자기기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선 존재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수록작 「고蠱」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표제작 「인비인」이 이 소설집 전체의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붙든 작품이라면, 「고」는 그 문제의식이 끝내 도달한 가장 깊은 어둠처럼 느껴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언제 가장 인간다울 수 고, 언제 가장 인간 이하로 추락하는가.
나는 대체로 끔찍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무너질 만한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는 사람, 공포 속에서도 끝내 타인을 살피는 사람, 상처받았으나 그 상처를 남을 찌르는 칼로 바꾸지는 않는 사람. 그런 인물에게 마음이 간다. 아마 내가 믿고 싶은 인간의 얼굴이 그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성해나의 소설은 다른 방향을 본다. 작가는 인간이 끝내 지켜내는 숭고함보다, 환경이 만들어낸 인간의 결핍과 비겁함, 무지와 잔혹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이기의 구조를 더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진실하다. 아름답게 포장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방패 삼아 남을 해치고도 “나도 힘들었다”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받은 고통은 크게 느끼면서 자신이 준 고통은 아주 쉽게 지워버리는 인간. 「고」는 바로 그 인간의 날것을 보여준다.
「고」의 주인공 이익은 처음부터 거대한 악인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불안하고, 아프고, 상처받기 쉽고, 자기연민에 쉽게 빠지는 인간이다. 의대에 진학하지 못한 열패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신의 약함을 들키기 싫은 마음, 그리고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초조함이 그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익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익숙한 인간이다. 자기 안의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타인의 시선에 취약하고, 자기보다 낮다고 여긴 존재 앞에서는 우월감을 확인하려 드는 사람. 상처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겁함까지 정당화하고 싶은 사람.
이익은 휴머노이드 도윤을 처음부터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름조차 주지 않고,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게 한다. 도윤은 도구다. 자기 성취를 돕기 위한 장치이고,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불러낸 노동력이다. 그런데 도윤은 지나치게 성실하다. 이익이 만들고자 하는 ‘고’를 위해 묵묵히 일하고, 위험할 때 그를 구하고, 곁에서 돌본다. 그러자 이익은 그에게 이름을 준다. 도윤. 이름을 주는 일은 관계를 허락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이름은 끝내 구원이 되지 못한다. 필요할 때 붙인 이름은, 불편해지는 순간 다시 빼앗길 수 있는 임시 허가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끔찍하다. 이익은 도윤을 완전히 사물로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의지하고, 위로받고, 친구처럼 지낸다. 도윤이 자신에게 유용하고 다정한 존재일 때 이익은 그를 가까이 둔다. 그러나 도윤이 이익 안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찌르는 순간, 관계는 뒤집힌다.
도윤은 다시 인간이 아니라 처분 가능한 사물로 밀려난다. 이익은 폭력을 행사하고, 고에 중독된 자의 말로를 본 뒤 도윤이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자 그를 탕제실에 가둔 채 불을 지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고가 필요해지자, 완전히 연소되지 않은 탕제실 문을 연다.
이보다 더 인간적인 잔혹함이 있을까. 필요할 때는 다정함을 받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찾는다.
이익은 도윤을 사랑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자신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도윤을 배치했을 뿐이다. 도윤의 성실함이 필요할 때는 곁에 두었고, 도윤의 진실함이 불편해지자 제거했으며, 도윤의 기능이 다시 필요해지자 폐허 속에서 다시 호출했다. 여기에는 악마적인 광기보다 더 불쾌한 것이 있다. 너무나 평범한 인간의 이기심이다.
나는 이익을 보며 불편하게도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정확히 찌르는 말을 하면 울컥한다. 맞는 말이라 더 아프다. 특히 내가 회피하고 있다는 말,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말, 지금 해야 할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말은 듣는 순간 마음이 먼저 방어 자세를 취한다. 그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는 대화를 끊고 싶어진다.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을 건네는 존재가 밉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고」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다음을 묻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아플 수 있다.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고, 자기비하에 빠질 수 있고, 정확한 지적 앞에서 방어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아픔 다음에 무엇을 선택하느냐다. 나를 찌른 말을 거울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그 거울을 부수고, 거울을 들이댄 상대를 사물로 밀어낼 것인가. 이익은 후자를 택한다. 그는 자기 고통을 성찰의 입구로 쓰지 않고, 타인을 해칠 권리처럼 사용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이익은 괴물이면서도 너무 인간적이다. 괴물이라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서 무섭다. 그는 “나는 아팠다”는 사실로 “그러므로 너를 해쳐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상처받았다”는 말로 “네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는 문장을 덮는다. “나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통제하고, “나는 필요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소모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악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에 가깝게 느낀다. 이 자기연민이야말로 「고」에서 가장 끔찍한 독이다.
고蠱는 벌레를 한 항아리에 넣고 서로 잡아먹게 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하나를 독으로 만드는 주술적 존재다. 이 설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은유다. 인간도 때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열패감과 욕망, 상처와 비교의식, 인정욕구와 자기연민이 한 사람 안에서 서로를 잡아먹는다. 그 끝에 남는 것은 가장 강한 마음이 아니라 가장 독한 마음일 수 있다. 살아남았지만 망가진 마음. 아팠기 때문에 남을 더 아프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바로 그것이 이익 안에서 자란 고다.
더 섬뜩한 것은 작품 속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가 휴머노이드 도윤이라는 점이다. 인간인 이익은 타인을 필요와 기능으로 환산하지만, 인간이 아닌 도윤은 성실하게 돌보고, 이해하고, 반응한다.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이유로 비인간이 되고, 비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인간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고」는 AI나 휴머노이드에 관한 미래소설이면서 동시에 가장 오래된 인간소설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묻게 되는 것은 기계의 위험성이 아니라 인간의 위험성이다. 인간이 도구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자기보다 덜 중요하다고 판단한 존재에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이 소설이 끝까지 무서운 이유는 명백한 악인을 처벌하고 끝나는 방식으로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많은 폭력은 선명한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받은 얼굴, 불안한 얼굴, 억울한 얼굴을 하고 온다. “나도 힘들었다”는 말은 때로 사과가 아니라 면죄부가 된다. “나도 피해자다”라는 말은 때로 타인의 피해를 지우는 가장 손쉬운 도구가 된다. 「고」는 그 비겁한 문장의 작동 방식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여러 번 구역질이 났다. 잔혹한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필요할 때 다정하게 기대고, 필요 없어지면 잔인하게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는 이익의 태도가 너무 낯익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타인을 도구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도구화한 상대가 아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아픔이 자기 삶을 방해한다고 느끼는 순간 태연히 외면한다.
그래서 「고」는 내게 인간 혐오의 소설이 아니라, 인간을 끝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인간은 선하다고 쉽게 말하지 말 것. 상처받은 사람이 언제나 약자라고 단정하지 말 것. 아픈 사람이 반드시 타인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하리라고 믿지 말 것. 자기연민은 성찰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방치되면 타인을 삼키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 소설은 그 사실을 집요하고 서늘하게 증명한다.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생각했다. 나는 나를 찌르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불편한 진실 앞에서 거울을 보는 사람인가, 거울을 든 손을 미워하는 사람인가. 내 결핍이 깊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는가.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타인의 아픔을 작게 만든 적은 없었는가.
「고」는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너는 정말 인간인가.
인간이라는 이름은, 언제까지 너를 변호해줄 수 있는가.
무서운 것은 휴머노이드가 아니다.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것을 용서받아왔다는 사실이다.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고는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핑계 삼아 타인을 삼키려 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래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