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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주의 인물 ㅣ 특서 어린이문학 19
황지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6월
평점 :
아이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아이의 삶을 대신 살 수는 없다
— 황지영, 『요주의 인물』을 읽고
『요주의 인물』을 읽는 동안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복잡한 슬픔이었다. 이 책에는 나쁜 아이 하나, 예민한 부모 하나, 무능한 학교 하나로 단순히 정리할 수 없는 관계들이 나온다. 오히려 이 소설은 묻는다.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처받은 아이를 보호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대신 싸워주는 일이고, 어디서부터는 아이가 자기 삶을 스스로 건너가도록 곁을 지켜주는 일인가.
이찬은 친구가 없는 아이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를 사귀는 법을 잃어버린 아이다. 처음부터 그런 아이였던 것은 아니다. 이찬에게도 공을 차고 싶고, 친구와 놀고 싶고,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과잉보호와 학교의 무책임한 대응, 아이들 사이의 냉혹한 분위기가 겹치며 이찬은 점점 반 안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어간다. 이름이 아니라 낙인으로 불리는 아이. 사람이라기보다 사건의 원인으로 취급되는 아이. 그 과정이 너무 선명해서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나는 이찬이를 쉽게 나무랄 수 없었다. 나 역시 중학교 2학년 때 학교가 지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실내화 속 압정, 머리 위로 떨어진 화분, 계단에서 밀쳐져 접질린 발목 같은 일들이 있었다. 몸은 여러 번 다쳤고, 마음은 그보다 더 오래 다쳤다. 그런데도 나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았다. 어른들이 나서면 나를 구해주기보다 더 외롭게 만들 것 같았다. 그때의 학교는 아이들이 배우는 곳이라기보다 견디는 곳에 가까웠고, 나는 매일 아침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며 조금씩 나를 접었다.
그래서 친구 없는 이찬이의 고통을 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교실, 내가 지나가면 아주 조금씩 멀어지는 몸들, 무슨 일이 생겨도 결국 내 탓이 될 것 같은 공기. 그런 고립은 아이를 조용히 망가뜨린다. 괴롭힘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하고, 마음의 안전지대를 무너뜨리고, 오래도록 세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어떤 아이에게 학교는 정말로 지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찬의 부모 마음도 이해한다. 자기 아이가 다치고, 울고, 혼자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질까.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 앞에서 부모는 쉽게 이성을 잃는다. 세상이 아이를 공격한다고 느끼는 순간, 부모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더 단단한 방패, 더 날카로운 방패, 아이 앞에 있는 모든 위험을 베어내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요주의 인물』 속 부모 역시 그런 마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아이를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 보호가 어느 순간 아이의 삶을 대신 살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이찬의 부모는 아이를 위해 싸운다고 믿지만, 그 싸움은 점점 이찬의 목소리를 지워버린다. 이찬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다시 시도해 보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아이의 고통은 부모의 불안 속에서 확대되고, 부모의 불안은 다시 학교와 아이들 사이에 더 큰 파문을 만든다. 그렇게 이찬은 보호받는 아이가 아니라, 보호라는 이름의 유리벽 안에 갇힌 아이가 된다.
이 소설이 아픈 이유는 과잉보호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잉보호는 종종 너무 큰 사랑, 너무 큰 공포, 너무 늦게 깨달은 죄책감에서 나온다. 부모는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는 울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모든 위험이 아이에게 닿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막아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이는 무균실에서 자랄 수 없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세계가 아니라, 위험을 만났을 때 돌아올 수 있는 자리다. 실패해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믿음, 다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경험, 자기 목소리로 말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훈련이다.
이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도 어쩌면 완벽한 방어가 아니라 안전한 거리였을지 모른다. 부모가 곁에 있다는 확신은 필요하지만, 부모가 자기 앞의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버리면 아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친구와 부딪히고, 오해를 풀고, 거절당하고, 다시 말을 걸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물러나는 일. 그런 작고 서툰 실패들이 모여 아이는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성장에는 반드시 마찰이 있다. 너무 큰 마찰은 아이를 깨뜨리지만, 모든 마찰을 제거하면 아이는 단단해질 기회를 잃는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오래 멈춘 지점도 그곳이었다. 나는 과거의 나를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에게 구조받고 싶었지만, 동시에 내 삶이 더 시끄러운 사건이 되는 것도 두려웠다. 누구도 나를 완전히 대신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웠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아이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방치하는 것도 폭력이고, “내가 다 해결해줄게”라고 삶을 빼앗는 것도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필요한 것은 방치와 개입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다. 아이가 혼자 싸우게 두지 않되, 아이가 싸우는 법을 영영 잊게 만들지도 않는 것.
『요주의 인물』은 학교폭력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동시에 피해와 보호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다른 아이들을 향한 공격과 배제의 언어로 바뀔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피해자를 지키겠다는 명분이 반 전체를 의심하게 만들고, 한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다른 아이들의 세계를 흔들고, 결국 이찬 자신마저 더 깊은 고립 속으로 밀어 넣는다. 여기에는 악인 하나가 없다. 대신 서툰 어른들, 두려운 아이들, 책임을 회피하는 시스템, 그리고 사랑이 불안으로 변질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과잉보호는 나쁘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아이를 얼마나 믿고 있는가.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아이가 다친 뒤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믿고 있는가. 아이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과 아이가 고통을 통과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 사이에는 깊은 차이가 있다. 부모와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인생에서 모든 비를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는 불빛이 되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게 『요주의 인물』은 성장소설이면서 보호에 대한 경고문처럼 읽혔다. 아이는 보호받아야 한다. 이 말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아이는 동시에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도 똑같이 옳다. 그 두 문장 사이에서 어른은 자주 실패한다. 너무 늦게 나서거나, 너무 일찍 빼앗는다. 너무 멀리 서 있거나, 너무 가까이 달라붙는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실패의 경계 위에 서 있다.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아이 대신 세상의 모든 위험을 제거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아이가 울면서도 자기 말을 하게 기다리는 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손을 내밀되 대신 걸어주지는 않는 일, 부모의 불안보다 아이의 삶을 더 믿어주는 일일 것이다. 『요주의 인물』은 그 어려운 믿음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오래전 학교라는 지옥을 지나온 한 사람이, 다시 아이의 성장과 보호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