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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끝
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이 부서진 세계, 멸망과 일상의 간극을 헤아리다
— 김성일, 《시간의 끝》을 읽고
최근 SF나 판타지 계열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래서 김성일의 《시간의 끝》을 펼쳤을 때도 처음에는 장르적 재미를 기대했다. 달이 파괴되고, 사교도들이 출몰하며, 수학자가 시간의 비밀을 추적하고, 형사가 사건의 뒤를 쫓는 이야기. 설정만 놓고 보면 종말을 배경으로 한 SF 미스터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니 이 소설은 우주의 끝보다 더 오래 남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세계가 해석되지 않을 때 인간은 무엇을 믿는가. 멸망이 끝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시간의 끝》의 세계는 처음부터 정상적이지 않다. 달은 파괴되었고, 밤하늘에는 온전한 달이 아니라 부서진 파편이 떠 있다. 테러가 벌어지고, 괴물에 대한 목격담이 떠돌며, 사교도들은 혼란을 자신들의 언어로 해석한다. 좋은 소식은 사라지고 세계는 점점 흉한 곳이 되어간다. 이 세계의 무서움은 단순히 멸망이 가까워졌다는 데 있지 않다. 더 두려운 것은 아무도 이 세계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과학도, 수사도, 종교도, 개인의 기억도 현실의 균열을 완전히 붙잡지 못한다.
이런 세계에서 종교적 광신은 단순한 배경 장치가 아니다. 사교도 집단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해석 체계의 어두운 형식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혼란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결론을 오래 버티지 못한다. 달이 부서졌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계시라고 부르고, 시간이 뒤틀렸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예언이라고 부르며, 멸망이 가까워졌다면 누군가는 그 멸망의 의미를 독점하려 한다. 광신은 비이성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인간 욕망의 뒤틀린 결과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시간의 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전혀 다른 결의 소설이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하늘 아래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Q84》에서는 두 개의 달이 뜨고, 《시간의 끝》에서는 달이 파괴된다. 하나는 세계가 어긋났다는 신호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가 이미 부서졌다는 증거다. 달이 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이전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이 믿을 수 없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새로운 믿음을 만든다. 그 믿음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종교적 폭력과 광신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의 끝》이 흥미로운 것은 멸망을 단순한 최종 사건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이야기에서 멸망은 막아야 할 대상이고, 결말은 그 멸망을 막았는지 실패했는지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멸망은 직선적인 끝이라기보다 되돌아오는 구조에 가깝다. 시작은 끝을 낳고, 끝은 다시 시작의 조건이 된다. 누군가의 죽음은 세계를 막아 세우지만, 동시에 다른 믿음과 세계관이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 파국은 종결되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재배치된다.
처음에는 이 구조가 거대한 SF적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것이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한 번의 결심이나 한 번의 사건으로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오늘 수영장에 가면 내일도 수영장에 갈 확률이 높아지고, 오늘 책상 앞에 앉으면 내일의 공부가 조금 덜 낯설어진다. 반대로 오늘 흐름이 끊기면 내일도 그 끊김 위에서 시작하게 된다. 오늘 글을 쓰면 내일의 문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오늘 미루면 내일의 미룸은 더 자연스러워진다. 삶은 극적인 전환보다 이런 작은 관성들에 의해 더 많이 움직인다.
물론 되풀이되는 일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우리 집 고양이들의 구토와 방뇨로 인한 청소는 끝나지 않는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매일 약을 먹이고, 오줌과 똥을 치우고, 아무 데나 방뇨한 자리를 닦고, 토사물을 치우고, 깨진 그릇 조각을 쓸어 담는다. 그 순간에는 당연히 투덜대고 지친다. 겨우 치웠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곳에서 냄새가 나고, 겨우 정리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사고가 벌어진다. 돌봄은 종종 숭고한 마음보다 먼저 몸을 숙여 닦고 치우는 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지겨운 반복이 아주 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이 사고칠 만큼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말썽은 살아 있음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다. 오늘 또 치워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오늘도 내 곁에 돌봐야 할 생명들이 있다는 뜻이다. 매일의 청소는 끝나지 않는 노동이지만, 동시에 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지치면서도 안도한다. 투덜대면서도 고맙다. 아이들이 여전히 뛰고, 먹고, 아프고, 사고치며, 내 생활을 어지럽힐 만큼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의 끝》 속 인물들이 여러 사람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멸망을 막으려 하는 이유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대단히 찬란한 미래만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 반복될 평범한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밥을 먹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익숙한 길을 걷고,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살아가는 시간. 멸망을 막는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구한다는 거창한 말 이전에, 그런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하루 더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희생은 허무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완전한 구원을 만들지 못한다. 희생을 치러 막은 세계의 멸망은 다른 시간축 위에서 또 다른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시작은 결백하지 않고, 끝은 완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이상하게 현실적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일상의 안정도 어쩌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선택과 손실, 돌봄과 버팀 위에 잠시 허락된 시간일 수 있다. 평범한 하루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은 지겨운 굴레이면서 동시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귀한 유예다.
《시간의 끝》을 읽고 남은 것은 멸망의 공포만이 아니었다. 끝나지 않는 세계 속에서도 사람들이 왜 다시 멸망을 막으려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들은 완벽한 희망을 믿어서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하루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거대한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도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바닥을 닦고, 책상 앞에 앉고, 수영장에 가고, 문장을 잇는다. 사소하고 지겹고 때로는 버거운 그 반복 속에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인간이 멸망 앞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희망이 분명해서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하루가 사실은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끝》은 세계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결국 일상의 가치를 묻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달이 부서지고, 시간이 뒤틀리고, 광신이 세계를 해석하려 들 때에도 인간이 지키려는 것은 어쩌면 가장 평범한 삶이다. 다시 아침이 오고, 누군가가 살아 있고, 투덜대며 치워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세계. 그 지루하고 아름다운 유예를 위해 사람들은 끝내 멸망을 막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