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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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 신을 기리며

—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을 읽고



이 책은 현대 남성성의 위기를 카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그중에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프리즘으로 읽어낸다. 남성 안의 여성성, 여성 안의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뜻밖에도 지금의 이 시대에 더 절실하게 들린다.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고, 테토녀, 에겐남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언어로 일상에 파고들 만큼 성별의 경계와 역할의 감각이 빠르게 재편되는 시대에 남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답을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저자 고혜경 박사는 그 답을 제도나 규범이 아니라 신화의 무의식 속에서 찾는다. 헤파이스토스, 아폴론,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하데스, 제우스. 여섯 남신을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억압한 내면의 원형으로 복원하는 이 작업이 지금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헤파이스토스에게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이 서평을 책 전체를 고르게 조망하기 보다는, 내 마음 속에 깊게 파고든 헤파이스토스라는 한 원형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쓰고자 한다.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을 읽다가 문득 내가 왜 헤파이스토스라는 존재에 이렇게 오래 시선이 머무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나는 오래전부터 상처 입은 영혼에 민감했다. 특히 겉으로는 제 몫을 다하며 살아가지만, 가장 깊은 자리에는 한 번 밀려난 기억을 품고 있는 존재들에게 자꾸 마음이 갔다. 나는 그런 존재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유능함과 성실함의 표면 아래, 사랑받지 못한 슬픔이 숨어 있는 얼굴을 보면 오래 시선이 머문다. 헤파이스토스는 바로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불과 기술의 신이기 전에, 먼저 버려진 아이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 이유는 내게도 낯익은 감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엄마의 트로피였지, 사랑하는 자식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첫 취업에 실패하며 자랑거리를 잃은 나는 오랜 세월 가족 안에서 투명한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다. 기대에 부응할 때만 환영받고, 그렇지 않을 때는 존재가 흐려지는 관계. 내가 아는 부모의 사랑은 처음부터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헤라와 제우스의 거부는 내게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헤파이스토스의 상처는 먼 신화 속 비극이 아니라,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감각의 언어처럼 읽혔다.


저자는 헤파이스토스를 단순한 기술의 신으로 읽지 않는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버지의 질서 속으로 입문하는 과정이라면, 헤파이스토스는 그 경로를 온전히 밟지 못한 신이다. 그는 중심의 질서에 진입하지 못한 채 불과 금속, 용광로와 공방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이 해석 방식은 우리에게 친근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전혀 다르게 보게 만든다. 그의 기술은 단순한 생산 능력이 아니라, 버려진 존재가 살아남기 위해 발명한 창조의 형식이 된다. 그는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영웅이 아니라, 중심에서 밀려난 자리에서 끝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신화 속에서 나는 제우스보다 헤라가 더 잔인하다고 느꼈다. 제우스에게 헤파이스토스는 헤라가 혼자 만들어낸 아들이고, 그의 배제는 냉혹하지만 적어도 신화적 권력 질서의 언어로 읽힐 여지가 있다. 그러나 헤라는 다르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존재를 기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밀어낸다. 이 장면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처럼 읽힌다.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네가 바로 잘못이라는 선언, 그 낙인이 헤파이스토스의 영혼에 새겨져 있다. 


헤파이스토스의 상처는 세상과 싸우다 패배한 상처가 아니다. 세상에 나가기 전, 가장 먼저 사랑받아야 할 자리에서 이미 환영받지 못했다는 상처다. 그 상처는 후천적인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뿌리에 새겨진 추방의 감각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부모의 사랑조차 결코 무조건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만큼은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힘이기를 바란다. 세상 어디에서도 조건 없는 수용을 얻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그 자리만큼은 예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신화는 그런 믿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은 기대와 투사, 실망과 수치심에 의해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다. 자식이 기대에 맞지 않을 때, 사랑은 흔들리고 심지어 거절의 얼굴을 띠기도 한다. 헤파이스토스의 이야기가 유독 잔인한 것은 그가 적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품어주어야 할 존재들에게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파이스토스가 용광로 앞에서 새로운 사물을 빚어내는 장면은 내게는 단순한 제작 행위로 읽히지 않았다. 그것은 상처를 형태로 바꾸는 작업처럼 보였다. 사랑받지 못한 자가 파괴 대신 창조를 선택한 셈이다. 이 점에서 헤파이스토스는 아주 현대적인 인물처럼 다가온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한 자리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종종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한다. 존재만으로는 환영받지 못했기에, 기능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 한다. 더 잘 만들고, 더 잘 일하고, 더 쓸모 있는 존재가 되면 마침내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헤파이스토스의 기술 역시 그런 절박함의 언어처럼 읽힌다. 그래서 그의 불은 권력의 불꽃이라기보다 결핍의 열기처럼 느껴진다.


제임스 힐먼의 말처럼 인간의 내면이 단일하지 않고 다중심적이라면, 헤파이스토스에게 오래 머무는 나의 시선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한 신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오래 소외되어 온 어떤 원형을 알아보는 일에 가깝다. 버려진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 신이 내게 오래 남는 이유는, 그 신이 내 안 어딘가에서도 아직 완전히 제 몫의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용광로 앞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처를 파괴로 돌리지 않고 끝내 무언가를 만들려는 충동,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쓸모와 창조로 번역해내려는 몸부림이 내게도 아주 낯설지는 않기 때문이다.


헤파이스토스는 영웅이 아니다. 가장 먼저 밀려난 자리에서 자기만의 공방을 세운 존재이다. 그의 위대함은 상처가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상처를 끝내 세계를 부수는 방향으로 돌리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고 남기는 방향으로 견뎌냈다는 데 있다. 어떤 영혼들은 사랑받지 못한 자리에서 파괴를 배우고, 어떤 영혼들은 그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다. 헤파이스토스는 후자에 속하는 신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아픈 신이고, 그런 까닭에 더욱 찬란한 신이다. 앞으로도 내게 그는 기술의 신이라기보다,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끝내 창조의 언어로 바꾸어낸 위대한 영혼으로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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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장의 고백
조승리 지음 / 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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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장의 고백>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켜야 했다. 화자인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이 아닌 내 기억의 연장선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차별, 당연하게 여겨지는 책임의 전가, 그리고 끝내 한 사람에게만 쏠리는 삶의 무게는 내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작중 주인공의 태도가 못내 갑갑했다. 70살이 넘도록 모든 것을 감당하려는 주인공의 태도, 누군가는 그것을 숭고한 '희생'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 이면의 구조가 보인다. 더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끝까지 버티고, 더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짐을 짊어지는 방식. 하지만 그 구조의 끝에는 오직 한 사람의 처절한 소진만이 남는다. 소설은 그 과정을 집요할 만큼 사실적으로 추적하는 느낌이었다.

 

맨 처음에는 내가 죽어야만 이 고통이 끝날 것 같기에 죽기를 소원하고, 그 다음에는 고통의 직접적인 원천인 모친이 죽기를 희망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나는 슬프도록 여실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길이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결국 가족이란 이름의 천형을 벗고 스스로 살기를 선택하는 그 아프고 처절한 선택마저도 이해한다. 아니, 내 자신이 그 과정을 겪었기에, 아니 아직도 그 굴레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했기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주인공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를 죽이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족은 이 세상에 없노라고 말이다.

 

주인공은 남편과 함께 하며 인연을 끊었던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평생토록 가족에 얽매여 살아왔지만, 나는 주인공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책임을 감당해왔지만, 더 이상 타인의 삶을 위해 나를 지우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 남지 않기로 했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내가 선택한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가족은, 나의 탄생은 결코 내 의지가 들어 있지 않는 결과였다. 이 단순하고도 엄중한 원칙을 깨닫기까지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돌아왔다.

 

작중 주인공은 고통스러울 때마다 교회로 가 신에게 기도한다. 그를 둘러싼 교회의 지인들은 주님이 믿음에 응답할 것이라고 응원하며, 실제로 주인공이 요양원에 보낸 모친이 화재로 죽음으로써 그의 기도가 응답 받은 것 같은 장면이 나오나, 나는 여전히 기도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모친의 죽음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결국 모친과 떨어져 자신의 길을 걷기로 택한 행위의 결과였다. 어머니를 끝까지 모셨다면, 용궁장의 화재가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그러하기에 이 소설의 구조는 내게 여실히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이 삶을 바꾸는 것은 막연한 염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택과 행동이란 사실을.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 나는 내 삶의 크기를 스스로 키우고, 그것을 다시 나눈다. 나눠주어 작아지면 다시 키우면 그만이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문법이다.

 

<용궁장의 고백>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가. 이 책을 읽은 지금은 단호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책임지고, 그 경계 밖에서는 멈출 것이라고. 나를 무너뜨리는 책임은 더 이상 책임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란 걸 알기에. 그 멈춤의 자리 위에서, 온전한 나를 다시 만들어갈 참이다.

 

#용궁장의고백 #조승리 #소설 ##독파 #도서제공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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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요떠요 할머니 특서 어린이문학 15
오미경 지음, 김다정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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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요 떠요 할머니>는 특서주니어에서 출간된 신간 어린이 동화이다. 이 이야기는 발표 도중 잘못된 피드백으로 상처를 입어 말을 잃게 된 소녀 오단풍과, 친구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기 위해 나서는 아이들의 작은 모험을 담고 있다. 이야기 속에는 마녀라는 판타지적 요소와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보는 어른들의 따뜻한 시선이 함께 놓여 있다. 어린이 소설다운 상상력과 모험,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지지하는 부드러운 어른의 개입이 인상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십대 초반, 명작 동화를 탐독하던 내 유년기의 감각이 문득 되살아났다. 변성기 이전의 나는 발표를 좋아하는 활달한 아이였다. 그러나 변성기 무렵 목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목소리가 변한 뒤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반 친구들의 비웃음 이후 말을 잃어버린 단풍이의 모습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어린이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지만, 그 장면은 어른이 된 지금의 나에게도 오래된 기억을 건드렸다.

단풍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동물에 대한 장점을 떠올리며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반에서 강아지를 키우자고 제안한다. 물론 동물권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제안이 얼마나 무책임한 발상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아이에게 그 말은 단순한 제안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애정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 그러나 아이들의 교실에서 흔히 보이는 잔혹한 무지함은 그 마음을 비웃음으로 돌려준다. 그 순간 단풍이는 목소리를 잃는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이란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존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특히 좋았던 이유는 상처가 생긴 자리와 그것을 극복하는 자리 모두가 친구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단풍이는 때로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해 주려는 활달한 장미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그 마음을 곡해하지 않는다. 친구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겠다며 마니토 상자에 개구리를 넣어 보내고,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놀라게 하는 짓궂은 장난을 반복하는 재윤 역시 단풍이에게는 단순한 괴롭힘의 존재로 남지 않는다. 단풍이는 그 행동 뒤에 있는 친구의 마음을 읽어낸다. 이런 장면들은 아이들의 순수가 세상살이에 닳은 어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이 이야기에는 멋진 어른이 등장한다. 뜨개방의 ‘떠요 떠요 할머니’다. 재윤은 할머니를 마녀라고 믿지만, 할머니는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는다. 대신 친구를 돕고 싶어 하는 재윤의 마음과, 스스로 한계를 넘고 싶어 하는 단풍이를 위해 마녀인 척 마법의 주문을 가르쳐 준다.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무능하거나 무심한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의 세계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조용히 힘을 보태는 어른이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따뜻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함께 주문을 외우고 마침내 단풍이가 목소리를 되찾는 결말은 단단히 닫힌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게 그 장면은 끝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단풍이와 재윤, 장미는 앞으로도 수많은 시련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 상처를 견디고 다시 목소리를 찾는 법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어른인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렇게, 누군가와 함께 목소리를 되찾는 법을 배워 왔는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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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인문학 : 철학 - 철학이 묻고 역사가 답하다 우리 집 인문학
박시몽 지음, 임기환 감수 / 상상스퀘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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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을 읽을 때면 늘 한 가지에 주목하게 된다. 각각의 사상가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오늘 처음 진도를 나가는 서양 철학사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유를 읽으며, 나는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감상평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인간에 대한 관심이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사유는 조금 다르다. 연혁적으로 보면 인간에 대한 탐구보다 세계에 대한 이해가 먼저 등장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대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흥미롭게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수많은 신들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카오스에서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태어나고, 바다와 밤과 운명이 신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자연을 의미로 묶어내려는 시도였다. 번개는 제우스의 분노였고, 바다는 포세이돈의 호흡이었다. 그러나 항해와 농경, 별의 관찰이 축적되면서 자연 현상이 신의 변덕에 달려 있다기보다 일정한 질서를 지닌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났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화적 설명은 자연철학으로 서서히 변모한다.
내가 그리스 철학을 접하며 흥미롭게 바라본 점은 중세와의 차이였다. 중세의 종교가 종종 신에 반하는 사상을 억압했던 것과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화와 자연철학, 더 나아가 수학적·과학적 설명이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이유 역시 분명하다. 신화는 세계의 의미를 이야기로 설명하고, 철학은 세계의 원리를 개념으로 탐구하며, 과학은 세계의 작동 방식을 관찰과 이론으로 해석한다.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을 다루고 있었기에 공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 사회는 각 자연현상을 담당하는 신들이 존재하는 다신교 사회였다. 그런 세계에서 자연은 무질서한 혼돈이라기보다 조화로운 질서, 곧 코스모스였다. 인간의 호기심이 그 질서를 지탱하는 근원을 찾으려는 방향으로 향했던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근원이 바로 아르케(archē), 만물의 시작과 원리였다.
아르케를 찾는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등장한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보았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끊임없는 변화를 세계의 본질로 보았다. 서로 다른 답이지만 그들의 시도는 공통된 방향을 지닌다. 세계의 복잡한 현상들을 하나의 근원적 질서로 이해하려는 통섭적 사유였다.
그러나 이 흐름을 뒤흔드는 사상가가 등장한다. 바로 파르메니데스다. 그는 변화 자체를 부정한다.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논리 때문이다. 그의 사유는 자연철학의 논의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다. 세계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작은 입자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보는 변화는 이 불변의 입자들이 끊임없이 결합하고 분리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논의의 철학적 함의는 단순하지 않다. 원자는 단지 작은 물질적 입자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신화나 조물주의 의지 없이도 설명할 수 있다는 거대한 사유의 전환을 의미한다. 자연과 세계가 신화의 영역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내려오는 순간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철학적 의미가 더욱 또렷해지는 것은 데모크리토스 이후 약 한 세기 뒤 등장한 에피쿠로스에 이르러서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철학의 관심은 자연의 구조에서 인간의 삶으로 이동한다. 소피스트를 거치며 철학은 “세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인간은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불안을 세계의 불확실성에서 찾았다. 신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끝없는 욕망. 그는 이러한 불안을 해체하기 위한 철학적 도구로 원자론을 선택했다. 다만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엄격한 기계적 결정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clinamen, 즉 ‘편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원자들은 단순히 직선으로 낙하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세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은 편향은 단순한 물리적 가설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완전히 필연적인 기계적 질서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선택과 행위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작은 틈을 마련한다. 에피쿠로스에게 원자론은 자연 설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공포에서 해방시키는 철학이었다.
그는 인간의 영혼 역시 원자의 집합으로 보았다. 따라서 죽음은 원자의 해체일 뿐이며, 감각 역시 그와 함께 사라진다. 죽음 이후의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후 세계 역시 두려워할 대상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번개나 지진 같은 자연 현상도 신의 분노가 아니라 자연의 운동일 뿐이다. 이렇게 세계를 이해할 때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많은 공포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불안을 제거한 자리에서 에피쿠로스가 주목한 것은 인간의 감각이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흔히 생각하는 자극적인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 정신적 평정이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은 후대 스토아 철학의 절제와도 어딘가 닮은 인상을 남긴다.
이렇게 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세계 이해가 인간 이해보다 먼저 등장한 이유도 분명해진다. 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삶을 둘러싼 공포와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은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세계가 어떤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지 이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고대 그리스 철학이 끊임없이 우주를 바라보았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길고 긴 시간을 건너 그들의 사유를 읽고 이해하려 하는 것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세계로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는 철학적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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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번은 벽돌책
장강명 지음 / 글항아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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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소설을 엄청나게 좋아하는데다 벽돌책에 깊은 로망이 있던 내게, 살면서 한 번은 벽돌책이란 제목의 도서 소개 책은 제목 자체가 유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500쪽이 넘으면 심정적으로 난 벽돌책을 읽고 있어, 라고 생각하는 인간이지만, 이 티저북을 읽게 되면서 벽돌책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흔히 벽돌책은 두께와 페이지 수로 정해지곤 한다. 일단 무게감이 남다르고,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완독 자체가 하나의 정신적 훈장처럼 다가오는 책들. 그런 게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벽돌책의 대중적 이미지가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 기준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걸 느꼈다. 어쩌면, 벽돌책이란, 단지 두꺼운 책이 아니라, 읽는 동안 사고의 구조가 바뀌는 책이어야 그 이름에 걸맞는 책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저자는 왜 벽돌책에 꽂혔을까. 왜 수많은 독서 리뷰 중에서 벽돌책 칼럼을 십년 넘게 써왔을까. 서문을 읽다 보면 연재 초기에 이미 읽어둔 벽돌책은 다 소진하고 그 다음에는 마치 오기라도 부리듯 도서관에서 온갖 벽돌책을 섭렵하며 이 책을 낸 것 같은데 나는 그 모습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퍽 감동적이었다. 어쩌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책 읽기 버거워하는 현대의 독자들의 머리에 잠재적인 서고를 설치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읽지 않은 책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안티 라이브러리(antilibrary)란 개념을 말한 바 있었다. 이 책의 용도 역시 우리 머릿속에 아직 읽지 않은 안티 라이브러리를 설치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가 없었다. 실제로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권의 읽고 싶은 벽돌책이 생겨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저자의 글은 달필이라 페이지는 거침없이 넘어갔지만, 저자의 주장 가운데 몇 가지 논쟁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감상평을 빙자해서 조금 써보고자 한다. 저자는 벽돌책 완독은 다른 행위로 대체하기 어려운 독자의 사고체계에 가해지는 일종의 충격이라고 말하며, 700쪽 이상인 책을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이후 모든 텍스트를 대하는 기준이 달라진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내 독서 경험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열권이 넘는 대하소설을 탐독해 왔다. 나는 하지만 내게 벽돌책의 독파가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느낌은 없었다. <토지>를 읽는 동안 고구마를 수천 개 물도 없이 씹고 있는 것 같은 인물의 답답함에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던 느낌이 아직도 선하고, 태백산맥를 통해 알게 된 해방직후의 빨치산과 이념투쟁은 이후 내가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었으며, 아리랑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민중의 고통과 독립 운동의 처절함을, 임꺽정을 통해 조선 중후기의 민초들의 고달픈 삶을 읽는 감각이 생겼으며, <구 대망-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를 읽으며 일본 전국시대의 시대상과 임진왜란의 탄생 배경을 읽게 되었고 <삼국지>를 통해서 중국의 고대사에 대한 이해와 인간 군상의 욕망을 읽게 되었지만, 이 모든 책들이 준 가르침은, 단권이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다른 책들이 준 영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수천 페이지가 족히 넘는 책들을 읽어내려간 건 단순히 재미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하루에 두 세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가장 큰 동기도 재미 때문이다. 그 책이 벽돌책이든 아니든, 내게 있어 내 머릿 속의 사고의 구조를 단 한 권의 책이 설치해준다는 말은 내게 자칫 위험하게 들린다. 내 사유 근육을 만들어낸 건 수많은 책들의 학제간, 혹은 통섭적 연쇄 작용 때문이다. 내게 독서는 그렇기에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과정이고 그에 대해 쉼없이 답을 내리는 과정이다. 어떤 책은 그 과정을 좀더 쉽게 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질문의 단초를 던져주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내가 읽어온 무수한 책들 모두가 시간이라는 거대한 마그마 속에서 녹아들어 내 삶 전체를 통해 조금씩 구현되는 게 사고력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또 달리 말하자면, 좋아하는 책은 있어도 이 책이 네 삶을 바꾸었다고 말할 단 한 권의 인생책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아직 그에 즉각적으로 답할 만큼 확고한 인생책을 못만난 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벽돌책의 기준을 두께가 아니라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미래의, 내 사유의 지도를 개편할 책으로 정의하고 싶다. 읽는 동안 생각이 흔들리고, 때로는 저자와 속으로 논쟁하게 만들며, 책을 덮은 뒤에도 질문이 남는 책. 그런 책이라면 설령 얇다 해도 내게는 충분히 벽돌책일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독서였다.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조용히 논쟁하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은 책이란 결국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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