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항복 미술관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 지음, 조서현 옮김 / 아트북프레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예술가로서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
첫째, 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해야 하는가?
둘째, 예술은 완성된 작품을 전시하는가, 아니면 사라져가는 흔적을 보존하는가?
《무조건 항복 미술관》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발칸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사회주의 연방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는 민족 갈등 속에서 붕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과 국적, 언어를 잃은 채 망명자가 되었다. 작가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 역시 이러한 시대를 겪으며 고국을 떠나 네덜란드에서 살아야 했다. 작품은 베를린을 무대로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과 현재를 겹쳐 놓으며 전쟁이 개인의 삶과 기억에 남기는 상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쟁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 편지, 오래된 물건, 가족의 기억,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얼기설기 이어 붙이며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한다. 줄거리를 따라가는 소설이라기보다 기억을 전시하는 미술관에 가깝다.
사실 서문부터 매우 강렬했다. 1961년 죽은 바다코끼리 '롤란드'의 위 속에서 발견된 수많은 물건들이 전시된다. 장난감, 열쇠, 병뚜껑, 플라스틱 조각…. 혐오스럽기보다 이상하게도 눈을 떼기 어렵다. 그 장면을 그려보니, 나는 사람들이 관심 두지 않는 버려진 사물 앞에서 오래 머무는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녹슨 쇳조각, 폐가의 흔적, 오래된 생활용품, 떨어진 머리카락, 버려진 가시들. 그것들은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이 응축된 흔적이었다.
사진에 관한 이야기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찍은 장면들이 그 여행에서 내가 기억하는 전부라는 것을."
이 문장을 읽으며 오래전 잦은 이사 끝에 사진 앨범이 든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린 일이 떠올랐다. 과거가 사라졌다는 허망함보다 더 이상했던 것은, 시간이 흐르자 내 기억조차 사진이 있었을 법한 순간의 장면으로만 남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실제를 기억하는 것일까, 사진을 기억하는 것일까.
소설은 이것을 '망각의 회색 지대'라고 부른다.
문득 언니가 자주 들려주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네다섯 살 무렵 관악산 계곡에서 찍은 내 사진이 있었다고 했다. 긴 머리를 한쪽으로 몰아 늘어뜨린 채 바위 위에 나체로 앉아 있던 모습이었다고 한다. 시집갈 때 주려고 숨겨 두었다가 결국 잃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그 사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수없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실제 사진을 본 것처럼 그 장면을 기억하게 되었다. 아마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타인의 언어가 만든 이미지일 것이다. 우리는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계속 편집하는 것은 아닐까?
4장에서 할머니를 떠올리는 장면에서 화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해 먹였던" 할머니를 기억하며 자신도 한 달에 한 번씩 그 방식을 따라 한다고 말한다. 그 대목에서 나는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 역시 평생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고 베풀며 사셨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밥을 사거나 작은 도움을 건네는 일이 있다. 그럴 때면 지금 내가 받는 도움 역시 어머니가 살아생전 쌓아 온 공덕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순환한다. 사람은 사라져도 삶의 방식은 다른 몸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가 보다.
이 책은 제목답게 예술가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 리처드 웬트워스의 작업과 롤란드의 위 속에서 발견된 물건들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소설은 예술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예술이란, 세상의 전체성, 그러니까 모든 것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결을 지켜내려는 노력이지."
이 문장은 내 작업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왜 나는 폐가를 기록하고, 오래된 물건을 모으며, 녹과 가시에 끌리는가. 아마도 그것들이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라 시간을 견뎌 온 존재들이고 그들과의 보이지 않는 연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모든 것이 귀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묘사될 거야. 시간이라는 나이를 부여받는 순간, 고귀해지고 정당화될 테니까."
바로 이것이 내가 버려진 사물에 매혹되는 이유였다. 하찮은 것이 귀해지는 것은 본래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그 안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리처드는 말한다.
"베를린은 애초에 장소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야. 이전과 이후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니까."
이 대목에서 이푸 투안이 말한 '장소'를 떠올렸다. 장소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경험과 의미가 축적된 곳이다. 그렇다면 베를린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여러 시대가 겹쳐 있는 거대한 기억의 층이다. 일반적으로 장소는 시간이 축적되면서 정체성을 갖지만 베를린은 20세기 동안 너무 많은 단절을 겪었다. 제국의 수도, 나치 독일의 수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고, 다시 동·서독 분단과 베를린 장벽, 독일 통일, 재개발과 세계도시로 이어진다.
도시는 계속 존재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체제와 가치, 기억은 반복해서 끊어졌다. 그래서 베를린에는 하나의 시간만 존재하지 않는가 보다.
특히 화자는 베를린 사람이 아니다. 고향을 잃은 망명자에게 베를린은 고향도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집도 아니다. 잠시 머무는 장소이면서도, 과거의 기억이 계속 따라오는 공간이다. 그래서 베를린은 하나의 안정된 '장소'가 아니라 기억들이 충돌하는 경계이다.
이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장소는 경험과 의미가 축적된 공간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그레시치는 오히려 “의미가 하나로 모이지 않는 공간도 장소일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베를린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서로 다른 상처를 갖고 서로 다른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의 장소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은 베를린은 장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베를린은 '하나의 장소'라고 부를 수 없는 도시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곳은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도시가 아니라, 마치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며 끝없이 기억을 다시 쓰는 장소로서, 시간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여러 번 덧쓰인 양피지)가 아닐까?
책을 덮으며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해야 하는가.
완성된 걸작만을 모으는 곳이라면 이 소설은 미술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기억과 상실, 의미없는 사진 한 장, 무용한 낡은 열쇠 하나, 누군가의 삶이 스며든 사소한 물건까지 수집할 수 있다면, 《무조건 항복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미술관이다.
그리고 예술은 무엇을 전시하는가.
나는 점점 완성된 결과보다 사라져 가는 흔적에 관심이 간다. 언젠가 녹이 되고, 먼지가 되고, 기억으로만 남게 될 것들. 예술은 그것들을 영원히 붙잡아 두는 일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순간을 잠시 머물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망명자의 삶의 기록이라기 보다, 기억과 시간, 그리고 흔적을 수집하는 예술가의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하나의 '미술관'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공간과 장소 -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그곳은 장소가 된다
이-푸 투안 지음, 윤영호 외 옮김 / 사이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공간과 장소들을 떠올렸다. 깊은 밤 텅 빈 4차선 신작로에서 느꼈던 광활함, 처음 경험한 바다의 깊이와 촉감, 햇빛 냄새가 밴 이불 속의 포근한 감각들. 그것들은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지금의 나를 형성한 장소 경험이었다. 투안의 말처럼 장소는 눈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몸, 오감 등 경험기억을 통해 생성된다. [공간과 장소]를 읽으며 공간은 관계를 기다리는 가능성이고, 장소는 관계 맺기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 말은 내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공간을 지나치지만, 그 안에 있는 기억과 감정, 관계의 흔적을 쉽게 의식하지 못한다. 어쩌면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소의 의미를 드러내고, 사소한 경험과 감각 속에 머물던 기억에 형태를 부여하는 일. 그런 점에서 나의 작업 역시 공간 속에 숨어 있던 관계의 흔적과 장소의 기억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되찾은 시간』을 덮으며 다시 찬찬히 표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게 산사나무는 꽃과 가시의 공존, 그리고 기억이 스스로를 수정해 가는 시간을 품은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진정한 낙원이란 바로 잃어버린 낙원”이기에 꽃으로만 가시로만 존재했을 때보다 그것들이 공존할 때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게르망트 쪽과 메제글리즈 쪽, 처음에는 서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두 개의 산책로가 꽃과 가시처럼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하나로 이어졌다. 어쩌면 우리가 되찾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거나 미처 보지 못했던 가시인지도 모른다. 평생 단 한 권의 책을 남긴 프루스트는 “사실 각각의 독자는 책을 읽을 때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독자이다”라고 하며 이 책을 통해 어떤 이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옅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잃어버린 시간과, 처음부터 꽃과 함께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보이는 나의 가시를 감각해 보며 책을 덮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 - 되찾은 시간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이 방대한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샤를뤼스 남작이라는 등장인물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이토록 오랫동안 중심을 차지할 줄은 미처 몰랐다. 초반의 그는 그저 오만하고 독설을 내뿜으며, 때로는 극도로 불쾌하고 역겹기까지 한 사교계의 괴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권의 책장을 덮는 순간, 화자인 마르셀을 제외하고 내 기억에 가장 강렬하고 인상 깊게 들어찬 인물은 다름 아닌 샤를뤼스였다. 그 불쾌함의 심연 속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거대한 이중성과 선악의 양립, 그리고 마침내 가닿게 되는 어떤 지독한 연민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중략)샤를뤼스 남작의 최후를 감히 '몰락'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타인을 온전히 소유하려다 부서진 영혼이 마침내 도달한, 자기 삶에 지독하리만큼 충실했던 종착지이자, 알베르틴이라는 유령의 방에서 방황하던 화자 마르셀의 손에 마침내 펜을 쥐여준 혹독한 불도장이었다. 남작이 자신의 몸과 삶 전체로 고통과 욕망의 시를 썼다면, 마르셀은 이제 그의 삶이라는 거울을 이정표 삼아 부서진 영혼의 파편들을 위대한 문학으로 재조립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샤를뤼스의 죽음은 한 인간의 비극적인 소멸을 넘어, 세상이 '악덕'이라 부르는 추함 속에서도 인간 고유의 가치와 미덕을 건져 올리는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을 알리는 가장 숭고한 서막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단정한 작별 - 돌보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남유림 지음 / 도서출판 독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유림 작가의 《단정한 작별》을 읽고 상실과 슬픔을 넘어, 인간 내면에 자리한 죄책감과 이기심, 그리고 관계의 본질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사유의 시간이었다.
이 책은 중증 장애를 지닌 딸 해든이의 10년 7개월을 지켜본 어머니의 기록이다. 열아홉 번의 전신마취와 처절한 치료 과정을 견뎌낸 아이를 향해 작가는 "살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염치없다"고 고백한다. 이 구절은 부모의 연명이 순수한 사랑인지, 아니면 상실의 절망과 죄책감이 두려워 아이의 고통을 외면한 이기심인지 묻는 윤리적 자각으로 다가왔다.
특히 책 전반을 관통하는 ‘돌봄 노동’이라는 표현과 아이가 떠난 뒤 찾아온 정체성의 혼란은 깊은 불편함을 남겼다.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에는 장애나 불행을 부모의 업보나 ‘근거 없는 원죄’로 받아들이는 유교적 부채감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내가 아이를 포기하면 나쁜 엄마가 된다"는 공포와 죄의식은 아이를 편히 보내주지 못하고 집착하게 만든 거대한 굴레였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생명을 놓지 못한 11년의 세월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했던 인간 본연의 이기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식을 먼저 보낸 비극 앞에서 타인이 감히 ‘이해’나 ‘위로’를 말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것이다. 아이가 죽은 후 작가는 요리나 제빵 자격증을 따며 자신으로서 살아가고자 애쓰는 모습은,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함이 아닌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치열한 ‘상실의 의식(Ritual)’으로 읽힌다.
결국 이 책은 숭고한 모성애라는 포장지 뒤에 숨은 한국적 원죄의식의 폭력성과 인간의 이기심을 정직하고 선명하게 들춰낸다. 동시에 끈적하고 질퍽한 그 죄책감의 늪을 통과해 마침내 자아를 분리하고 홀로 서려는 한 인간의 서글프고 단정한 뒤늦은 작별 인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