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스 - 선의 인류학
팀 잉골드 지음, 김지혜 옮김 / 포도밭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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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의 뒤틀린 정신, 범죄자의 삐뚤어진 정신, 사기꾼의 곧지 못한 정신, 머저리의 오락가락한 정신”
곧음은 바름과 정직함을, 뒤틀림과 삐뚤어짐은 잘못과 일탈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너무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공간적 은유를 잘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말에도 이런 표현이 상당히 많다. ‘마음이 곧다’, ‘성품이 곧다’, ‘바른길을 걷다’, ‘정도(正道)를 가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삐뚤어진 생각’, ‘뒤틀린 심성’, ‘꼬인 사람’, ‘탈선하다’, ‘선을 넘다’라고 말한다. 공간적 형태나 움직임을 설명하던 말이 어느 순간 사람의 정신과 행동을 평가하는 말이 된다. 곧고 바른 것은 좋은 것이 되고, 휘어지고 뒤틀린 것은 잘못된 것이 된다.
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에서는, 인간의 신체에서 왼쪽과 오른쪽은 기본적으로 대칭을 이루지만, 거의 모든 문화에서 두 방향에는 서로 다른 가치가 부여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오른쪽은 신성하고 바르고 정당한 것, 강하고 영광스러운 것과 연결되고, 왼쪽은 불순하고 약하며 불길한 것과 연결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처럼 오히려 왼쪽을 영광스러운 방향으로 여기는 문화도 있다는 점이다. 결국 오른쪽이나 왼쪽 자체에 선악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공간의 차이에 문화적 의미를 부여해온 것이다. 즉 우리는 공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치가 부여된 공간을 경험한다.
투안의 글과 함께 생각하면, 잉골드가 직선과 곡선을 이야기하는 방식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잉골드는 직선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곡선이 더 자연스럽고 좋은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선의 형태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가치와 의미를 이미 덧씌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직선과 곡선의 차이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에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해 왔는가이다.
잉골드는 곧 선의 형태에서 선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시선을 옮긴다. 손으로만 선을 그리는 것과 자를 이용하여 선을 그리는 것의 차이를 그는 행로(wayfaring)와 운송(transport)의 차이와 연결한다. 자를 이용해 두 점을 연결하면 선을 긋기도 전에 경로가 결정된다. 두 점에 자를 맞추는 순간 연필이 지나갈 길이 미리 정해진다. 여행으로 말하면 출발하기 전에 이미 경로가 정해져 있고, 여행자는 그 경로를 실행하는 셈이다.
반면 손으로 선을 그을 때는 다르다. 연필을 움직이는 동안 계속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에 따라 방향을 조정해야 한다. 그래서 손으로 그은 선에는 어느 정도의 뒤틀림이나 구부러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잘못된 선이 아니라 선이 움직이는 동안 일어나는 일의 흔적이다.
그런데 잉골드는 여기에서도 단순한 대립으로 끝내지 않는다. 자를 대고 그은 선 역시 완벽하게 곧을 수는 없고 자가 미끄러질 수도 있고 손이 흔들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아무리 경로를 미리 정해놓더라도 실제 행위 속에서는 몸과 물질, 환경과 우연이 개입한다. 결국 직선과 곡선, 계획과 무계획, 자와 손은 완전히 분리된 두 세계가 아니다.
나는 아침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시를 한두 편 읽는다. 좋은 문장이나 마음에 들어오는 단어에는 밑줄을 긋고, 때로는 압화를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라인스』를 읽은 이후로 시를 읽고 난 뒤 시의 빈 여백에 선을 그리는 작은 습관이 생겼다. 아무 의미도 없는, 무엇을 그릴지도 정하지 않고 계획도 없다. 연필을 쥔 손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나도 알 수 없다. 선은 가다가 멈추고, 주춤하고, 돌아가고, 다시 이어진다. 때로는 한곳을 맴돌고, 때로는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그저 따라간다. 그리고 다 그리고 난 후에 그 선을 바라본다. 어떤 날에는 동심원처럼 보이고, 어떤 날에는 흐르는 비처럼 보인다. 또 어떤 날에는 나무의 뿌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동심원이라고, 비라고, 뿌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것을 그리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재현한 그림이 아니라, 선이 지나온 흔적이다.
방황하는 선, 주저하는 선, 주춤하는 선, 망설이는 선.
필압이 강한 날에는 선이 거칠고 무겁다. 어떤 날에는 가늘고 연약한 선이 이어진다. 끊어질듯하지만 오래 이어진 선도 있다. 망설이다가 방향을 바꾼 흔적도 있고, 같은 자리를 반복하거나 겹쳐 지나간 흔적도 있다. 무심코 그린 선인데도 그 안에 내 심상이 보인다. 나는 선을 그렸지만, 그 선이 나를 드러낸다.
나는 그동안 왜 드로잉을 망설였을까. 아마도 망설이고 주저하는 선을 나 스스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선이 곧게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하거나 방향을 바꾸면 그것을 좋은 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얀 백지는 자백을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를 그리려면 무엇을 그릴지 먼저 정해야 하고, 선은 그 의도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이 흔들리면 그것을 고쳐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워야 했다.
하지만 망설임은 선의 결함이 아니었고 주저함은 잘못된 방향이 아니었다. 주춤함은 실패가 아니었고 방황한다고 해서 길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선이 움직이는 동안 일어난 사건이고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차를 마시고, 익숙한 일을 하고, 비슷한 길을 오간다. 겉으로 보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하루도 같은 날은 없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날의 몸과 마음은 다르고, 같은 장소를 지나도 바라보는 풍경은 달라진다.
내가 매일 그리는 선도 같은 연필을 들고, 같은 여백에, 비슷한 크기의 선을 그리지만 하루도 같은 선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선이 무엇을 닮았는지보다 선이 어떻게 지나왔는지를 보게 된다. 어디에서 멈추었는지, 어디에서 힘을 주었는지, 어디에서 가늘어졌는지, 어디에서 방향을 바꾸었는지를 본다. 그 안에서 그날의 나를 읽는다.
잉골드는 글을 마치며 이렇게 말한다.
“선은, 삶처럼 끝이 없다. 삶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길을 따라 일어나는 그 모든 흥미로운 일들이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당신이 갈 수 있는 더 먼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종 목적지가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목적지는 오히려 인간에게 안정감을 준다. 우리는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그래서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점을 보고, 사주를 보고, 타로를 보고, 저축을 하고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결국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금이라도 잠재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는 것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목적지가 필요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고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잉골드의 말을 목적지를 세우지 말라는 뜻이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오히려 목적지를 세우되 그 목적지가 바뀌었을 때, 계획에 오차가 생겼을 때, 혹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도착했을지라도 그것을 실패나 좌절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말로 읽고 싶다.
자를 대고 선을 그어도 손이 떨리고 자가 미끄러질 수도 있으니까.
우리 삶은 목적지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 삶은 목적이 없어도 목적이 바뀌어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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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된 할망 - 설문대루트, 신의 길을 찾아 나선 물음표의 순례
한진오 지음 / 한그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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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덕앚인밧, 엉장메코지, 홍릿물, 청산, 덩개빌레, 두럭산, 진질깍, 소로기통... 발음도 어렵거니와 도대체 글자만으로는 그 의미도 모르겠는 지명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지도나 검색 같은 이성적 매체로는 찾을 수 없는 지명들로 그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부록에 지도라도 넣어 표기하면 얼마나 좋을까 불만을 품었지만, 읽을수록 저자가 왜 직접 발로 걸으며 설문대를 찾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이 아무리 출중한들 직접 보고, 한 번 찾아 가는 것만 하랴. 특히 설문대 흔적과 온기를 가만히 자리에 앉아 느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제주라는 섬을 마주할 때 우리는 대개 설문대할망의 거대한 몸에 매료되곤 한다. 한라산을 베개 삼고 발가락이 닿아 파인 구멍이 범섬의 해식동굴이 되었다는 등 거신에 대한 상상력은 압도적이고 유쾌 발랄하다. 그러나 한진오의 《섬이 된 할망》은 이 거대함의 프레임을 단숨에 깨트리며, 신화의 진짜 온기가 어디서 숨 쉬고 있는지를 직접 걸으며 짚어준다.
저자가 제주 해안가와 마을 곳곳에 흩어진 '공깃돌 바위' 앞에서 얻은 통찰은 가히 경이롭다. 둔중하고 차가운 거석(巨石)들 앞에서 어릴 적 공기놀이를 떠올린 저자는 그 놀이가 다름 아닌 '시간을 만들어가는 놀이'였음으로 해석한다. '일 년, 이 년, 한 살, 두 살….' 공깃돌을 집어 올리며 점수를 세던 언어는 찰나의 놀이에 우주의 세월을 대입하는 신성한 주술과도 같다. 설문대할망이 던지고 놀던 그 거대한 공깃돌들은 단지 신화 속 소품이 아니라, 제주의 옛사람들이 거친 삶 속에서도 여유와 해학을 잃지 않고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의 마디들이자 삶의 축적이었던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신의 '배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음식을 먹고 다시 토해내고 배설을 하는 보잘것없는 생리현상만으로도 창조의 권능을 발휘한다." (p.96)
우리는 흔히 창조와 신성을 매끄럽고 고결하며 정제된 영역에 놓아두려 한다. 그러나 설문대할망의 신화는 우스울 정도로 적나라한 생리현상으로 가득 차 있다. 오줌을 누어 바닷물을 가르거나 방귀를 뀌어 바위를 만들고 샘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지극히 원초적이다.
저자의 말처럼, 살아있는 존재가 숨을 쉬고, 먹고, 배설하고, 흔적을 남기는 이 지극히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야말로 세상을 만들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창조의 능력이다.
삶의 부산물과 흔적이 모여 땅이 되고 바다가 되는 신화적 상상력은, 제주의 모진 세월을 버텨낸 민초들의 땀과 눈물, 배설 같은 노동의 흔적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신성함 그 자체였음을 깨닫게 한다.
설문대할망은 멀리 있는 관념의 신이 아니라 저마다의 가슴속에서 숨 쉬며, 매일의 삶을 묵묵히 버텨내고 자신만의 시간(공깃돌)을 쌓아 올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거대한 바위와 오름 속에서 유머러스하면서도 숭고한 삶의 흔적을 읽어내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 덕분에, 나 역시 내 안의 ‘설문대’를 새로이 찾아보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나의 하루와 콧구멍을 통해 들고 나는 호흡조차도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거대한 창조적 흔적일 수 있음을, 《섬이 된 할망》이 나지막이 일러주고 있다.
이 책은 설문대를 정의하거나 단정짓지 않는다. 정답을 찾거나 고집하지도 않는다. 해석은 자유고 신분고하, 남녀노소 따질 것 없이 저마다 마음 속에 신 한 분쯤은 모실 수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을 천천히 함께 따라간다.
"설문대는 하나야. 하나이며 여럿이고 여럿이며 하나인 할망이야. 제주의 옛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자신만의 설문대를 간직하고 있었어."
저자의 물음표는 마침표로 끝나지 않고 느낌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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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정신분석 신화 종교 상징 총서 6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이학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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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정신분석』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불이라는 물질성에 대한 정신분석이라고 생각했다. 불의 물성이나 역사, 혹은 불에 대한 인문학을 다룬 책쯤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내가 읽고 있는 것은 불에 관한 책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관한 철학이었다.
바슐라르는 불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왜 불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신성시하고 욕망하는지를 연구한다. 불은 그에게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인간 정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불을 통해 인간 사고의 원형을 들여다보고, 상상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탐구한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불의 정신분석'이 아니라 '인간 상상력의 정신분석'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흥미로운 책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오래전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불을 다시 만났다.
어릴 적 언니는 방문 창호지의 작은 구멍 위에 촛불을 올려두었다. 촛불은 순식간에 창호지로 옮겨 붙었고 방 안에는 불길이 번졌다. 다행히 곁에 어른이 있어 큰 화재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장면은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았다.
또 한 번은 플라스틱 소꿉놀이 냄비와 프라이팬을 연탄불 위에 올려놓았는데, 나는 까만 연탄에서 불이 나온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예쁜 보라색 냄비는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매캐한 냄새만 남았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연탄가스 중독도 경험했다. 언니가 나를 억지로 끌고 나와 부엌에서 동치미를 마시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집 사촌 언니는 결혼을 앞두고 같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어릴적 나에게 불은 언제나 두려운 존재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성냥을 켤 때면 손끝이 닿을까 봐 최대한 나무 끝을 붙잡고 겨우 불을 붙였다. 바슐라르가 말한 프로메테우스의 용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작가가 된 이후, 특히 도시를 떠나 강화도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불을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취미처럼 불을 피우면서 나는 불꽃보다도 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불을 피우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한다. 꽃을 말리고 향기로운 허브도 말린다. 쑥을 말아 작은 다발을 만들고 솔가지도 가다듬어 모은다. 귤껍질과 계피를 갈아 콘 모양의 향을 만들기도 한다. 불은 라이터를 켜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된다.
불은 준비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불이 붙기 시작하면 나는 오래 바라본다. 솔가지가 타들어가는 모습은 놀라울 만큼 아름답다.
말린 수국 한 송이는 마치 불 속에서 다시 꽃을 피우는 것처럼 보인다. 불은 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나는 타들어가는 그 장면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치 불나방처럼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하나되는 바슈라르가 말한 ‘몽상’과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가 이런 것이구나 싶다.
그러고 보니 내 작업 속에도 이미 불이 있었다. 종이가 불에 타들어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본 적이 있다. 단순히 종이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불이 종이 속으로 서서히 침투하며 하얀 종이가 까맣게 되어가는 과정이 너무 흥미로웠다. 종이마다 불꽃의 색도 조금씩 달랐고, 타들어간 흔적 역시 제각각 모두 달랐다. 나는 그 불의 흔적을 작품으로 만들어 전시했다.
또 다른 작업인 〈잡초를 위한 의식〉에서는 전시가 끝난 잡초들을 하얀 종이에 말아 팔뚝만 한 다발로 만들고, 그것을 캠프파이어 장작처럼 높이 쌓아 불을 붙였다. 그 퍼포먼스는 폐기가 아니라 의식이었다. 잡초는 재가 되었지만, 동시에 또 다른 순환의 시작이 되었다.
그때는 그것이 '불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불의 정신분석』을 읽으며 이미 불을 작업의 중요한 매개로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슐라르는 불이 인간 상상력의 가장 근원적인 원형이라고 말한다. 불은 동시에 따뜻함과 위험, 생명과 죽음, 파괴와 정화를 함께 품는다. 그래서 그는 불을 가장 변증법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책에서 특히 놀랍고 흥미로웠던 것은 '노발리스 콤플렉스'였다. 마찰에 의해 불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성적(性的)인 상상력과 생명의 탄생에 관한 원형적 사고와 연결된다는 설명은 생각지 못한 놀라움이었다.
"불은 두 나뭇조각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는 질문은, "어째서 불은 태어나기 무섭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삼켜버리는가."
불은 언제나 자신을 낳은 것을 태운다. 생성은 곧 소멸을 품고 있다. 소멸은 또 다른 생성을 준비한다. 그 순환은 내 작업을 오래 관통해 온 질문과도 닮아 있었다.
채호기 詩 「부패는 생각의 힘이다」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죽음 이후는 어떤 열기의 시작이다.죽음은 반드시 부패라는 문턱을 넘는다.부패는 생의 반응이고 멸의 느낌이다.부패는 생각의 힘이다.
모든 있는 것의 생각은 열기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부패와 불이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죽음은 차가움이 아니라 또 다른 열기의 시작이며, 부패는 끝이 아니라 생성의 조건이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오행 역시 흥미롭게 겹쳐진다. 목생화(木生火) 즉, 나무는 불을 낳는다.
화생토(火生土) 즉, 불은 재를 만들고, 재는 흙이 된다.
불은 무엇인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건너가게 하는 통로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어린 시절의 공포와 지금의 즐거움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통제할 수 없는 불을 경험했다. 불은 갑자기 번졌고, 생명을 위협했으며, 설명할 수 없는 무지와 공포였다. 지금의 나는 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땔감을 정성껏 준비하고, 불을 즐기고, 불이 물질을 변형시키는 과정을 바라본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이란 현실을 재현하는 능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미지를 변형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먼저 정신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작업은 잡초를 잡초로 본 적이 없었고, 녹을 단순한 부식으로 본 적도 없었다. 가시는 상처가 아니라 생명의 형식이었고, 부패는 죽음이 아니라 생성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제 불 역시 파괴가 아니라 변형과 순환의 과정으로 다가온다.
나는 자연을 재현하려 하기보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순간과 경계, 그 사이 그리고 흔적을 탐구한다.
『불의 정신분석』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묻는 책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내가 만들어 온 작업들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불은 태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낸다.
불은 끝내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킨다.
나는 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불을 통해 생성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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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항복 미술관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 지음, 조서현 옮김 / 아트북프레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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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예술가로서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
첫째, 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해야 하는가?
둘째, 예술은 완성된 작품을 전시하는가, 아니면 사라져가는 흔적을 보존하는가?
《무조건 항복 미술관》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발칸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사회주의 연방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는 민족 갈등 속에서 붕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과 국적, 언어를 잃은 채 망명자가 되었다. 작가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 역시 이러한 시대를 겪으며 고국을 떠나 네덜란드에서 살아야 했다. 작품은 베를린을 무대로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기억과 현재를 겹쳐 놓으며 전쟁이 개인의 삶과 기억에 남기는 상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쟁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 편지, 오래된 물건, 가족의 기억,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처럼 사소한 파편들을 얼기설기 이어 붙이며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한다. 줄거리를 따라가는 소설이라기보다 기억을 전시하는 미술관에 가깝다.
사실 서문부터 매우 강렬했다. 1961년 죽은 바다코끼리 '롤란드'의 위 속에서 발견된 수많은 물건들이 전시된다. 장난감, 열쇠, 병뚜껑, 플라스틱 조각…. 혐오스럽기보다 이상하게도 눈을 떼기 어렵다. 그 장면을 그려보니, 나는 사람들이 관심 두지 않는 버려진 사물 앞에서 오래 머무는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녹슨 쇳조각, 폐가의 흔적, 오래된 생활용품, 떨어진 머리카락, 버려진 가시들. 그것들은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이 응축된 흔적이었다.
사진에 관한 이야기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찍은 장면들이 그 여행에서 내가 기억하는 전부라는 것을."
이 문장을 읽으며 오래전 잦은 이사 끝에 사진 앨범이 든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린 일이 떠올랐다. 과거가 사라졌다는 허망함보다 더 이상했던 것은, 시간이 흐르자 내 기억조차 사진이 있었을 법한 순간의 장면으로만 남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실제를 기억하는 것일까, 사진을 기억하는 것일까.
소설은 이것을 '망각의 회색 지대'라고 부른다.
문득 언니가 자주 들려주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네다섯 살 무렵 관악산 계곡에서 찍은 내 사진이 있었다고 했다. 긴 머리를 한쪽으로 몰아 늘어뜨린 채 바위 위에 나체로 앉아 있던 모습이었다고 한다. 시집갈 때 주려고 숨겨 두었다가 결국 잃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그 사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수없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실제 사진을 본 것처럼 그 장면을 기억하게 되었다. 아마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타인의 언어가 만든 이미지일 것이다. 우리는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계속 편집하는 것은 아닐까?
4장에서 할머니를 떠올리는 장면에서 화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해 먹였던" 할머니를 기억하며 자신도 한 달에 한 번씩 그 방식을 따라 한다고 말한다. 그 대목에서 나는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 역시 평생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고 베풀며 사셨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밥을 사거나 작은 도움을 건네는 일이 있다. 그럴 때면 지금 내가 받는 도움 역시 어머니가 살아생전 쌓아 온 공덕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순환한다. 사람은 사라져도 삶의 방식은 다른 몸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가 보다.
이 책은 제목답게 예술가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 리처드 웬트워스의 작업과 롤란드의 위 속에서 발견된 물건들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소설은 예술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예술이란, 세상의 전체성, 그러니까 모든 것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결을 지켜내려는 노력이지."
이 문장은 내 작업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왜 나는 폐가를 기록하고, 오래된 물건을 모으며, 녹과 가시에 끌리는가. 아마도 그것들이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라 시간을 견뎌 온 존재들이고 그들과의 보이지 않는 연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모든 것이 귀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묘사될 거야. 시간이라는 나이를 부여받는 순간, 고귀해지고 정당화될 테니까."
바로 이것이 내가 버려진 사물에 매혹되는 이유였다. 하찮은 것이 귀해지는 것은 본래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그 안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리처드는 말한다.
"베를린은 애초에 장소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야. 이전과 이후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니까."
이 대목에서 이푸 투안이 말한 '장소'를 떠올렸다. 장소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경험과 의미가 축적된 곳이다. 그렇다면 베를린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여러 시대가 겹쳐 있는 거대한 기억의 층이다. 일반적으로 장소는 시간이 축적되면서 정체성을 갖지만 베를린은 20세기 동안 너무 많은 단절을 겪었다. 제국의 수도, 나치 독일의 수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고, 다시 동·서독 분단과 베를린 장벽, 독일 통일, 재개발과 세계도시로 이어진다.
도시는 계속 존재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체제와 가치, 기억은 반복해서 끊어졌다. 그래서 베를린에는 하나의 시간만 존재하지 않는가 보다.
특히 화자는 베를린 사람이 아니다. 고향을 잃은 망명자에게 베를린은 고향도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집도 아니다. 잠시 머무는 장소이면서도, 과거의 기억이 계속 따라오는 공간이다. 그래서 베를린은 하나의 안정된 '장소'가 아니라 기억들이 충돌하는 경계이다.
이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장소는 경험과 의미가 축적된 공간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그레시치는 오히려 “의미가 하나로 모이지 않는 공간도 장소일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베를린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서로 다른 상처를 갖고 서로 다른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의 장소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은 베를린은 장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베를린은 '하나의 장소'라고 부를 수 없는 도시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곳은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도시가 아니라, 마치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며 끝없이 기억을 다시 쓰는 장소로서, 시간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여러 번 덧쓰인 양피지)가 아닐까?
책을 덮으며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해야 하는가.
완성된 걸작만을 모으는 곳이라면 이 소설은 미술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기억과 상실, 의미없는 사진 한 장, 무용한 낡은 열쇠 하나, 누군가의 삶이 스며든 사소한 물건까지 수집할 수 있다면, 《무조건 항복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미술관이다.
그리고 예술은 무엇을 전시하는가.
나는 점점 완성된 결과보다 사라져 가는 흔적에 관심이 간다. 언젠가 녹이 되고, 먼지가 되고, 기억으로만 남게 될 것들. 예술은 그것들을 영원히 붙잡아 두는 일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순간을 잠시 머물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망명자의 삶의 기록이라기 보다, 기억과 시간, 그리고 흔적을 수집하는 예술가의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하나의 '미술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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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장소 -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그곳은 장소가 된다
이-푸 투안 지음, 윤영호 외 옮김 / 사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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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나는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공간과 장소들을 떠올렸다. 깊은 밤 텅 빈 4차선 신작로에서 느꼈던 광활함, 처음 경험한 바다의 깊이와 촉감, 햇빛 냄새가 밴 이불 속의 포근한 감각들. 그것들은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지금의 나를 형성한 장소 경험이었다. 투안의 말처럼 장소는 눈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몸, 오감 등 경험기억을 통해 생성된다. [공간과 장소]를 읽으며 공간은 관계를 기다리는 가능성이고, 장소는 관계 맺기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 말은 내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공간을 지나치지만, 그 안에 있는 기억과 감정, 관계의 흔적을 쉽게 의식하지 못한다. 어쩌면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소의 의미를 드러내고, 사소한 경험과 감각 속에 머물던 기억에 형태를 부여하는 일. 그런 점에서 나의 작업 역시 공간 속에 숨어 있던 관계의 흔적과 장소의 기억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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