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내내 나는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공간과 장소들을 떠올렸다. 깊은 밤 텅 빈 4차선 신작로에서 느꼈던 광활함, 처음 경험한 바다의 깊이와 촉감, 햇빛 냄새가 밴 이불 속의 포근한 감각들. 그것들은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지금의 나를 형성한 장소 경험이었다. 투안의 말처럼 장소는 눈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몸, 오감 등 경험기억을 통해 생성된다. [공간과 장소]를 읽으며 공간은 관계를 기다리는 가능성이고, 장소는 관계 맺기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 말은 내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공간을 지나치지만, 그 안에 있는 기억과 감정, 관계의 흔적을 쉽게 의식하지 못한다. 어쩌면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소의 의미를 드러내고, 사소한 경험과 감각 속에 머물던 기억에 형태를 부여하는 일. 그런 점에서 나의 작업 역시 공간 속에 숨어 있던 관계의 흔적과 장소의 기억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되찾은 시간』을 덮으며 다시 찬찬히 표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게 산사나무는 꽃과 가시의 공존, 그리고 기억이 스스로를 수정해 가는 시간을 품은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진정한 낙원이란 바로 잃어버린 낙원”이기에 꽃으로만 가시로만 존재했을 때보다 그것들이 공존할 때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게르망트 쪽과 메제글리즈 쪽, 처음에는 서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두 개의 산책로가 꽃과 가시처럼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하나로 이어졌다. 어쩌면 우리가 되찾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거나 미처 보지 못했던 가시인지도 모른다. 평생 단 한 권의 책을 남긴 프루스트는 “사실 각각의 독자는 책을 읽을 때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독자이다”라고 하며 이 책을 통해 어떤 이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옅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잃어버린 시간과, 처음부터 꽃과 함께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보이는 나의 가시를 감각해 보며 책을 덮는다.
처음 이 방대한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샤를뤼스 남작이라는 등장인물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이토록 오랫동안 중심을 차지할 줄은 미처 몰랐다. 초반의 그는 그저 오만하고 독설을 내뿜으며, 때로는 극도로 불쾌하고 역겹기까지 한 사교계의 괴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권의 책장을 덮는 순간, 화자인 마르셀을 제외하고 내 기억에 가장 강렬하고 인상 깊게 들어찬 인물은 다름 아닌 샤를뤼스였다. 그 불쾌함의 심연 속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거대한 이중성과 선악의 양립, 그리고 마침내 가닿게 되는 어떤 지독한 연민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중략)샤를뤼스 남작의 최후를 감히 '몰락'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타인을 온전히 소유하려다 부서진 영혼이 마침내 도달한, 자기 삶에 지독하리만큼 충실했던 종착지이자, 알베르틴이라는 유령의 방에서 방황하던 화자 마르셀의 손에 마침내 펜을 쥐여준 혹독한 불도장이었다. 남작이 자신의 몸과 삶 전체로 고통과 욕망의 시를 썼다면, 마르셀은 이제 그의 삶이라는 거울을 이정표 삼아 부서진 영혼의 파편들을 위대한 문학으로 재조립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샤를뤼스의 죽음은 한 인간의 비극적인 소멸을 넘어, 세상이 '악덕'이라 부르는 추함 속에서도 인간 고유의 가치와 미덕을 건져 올리는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을 알리는 가장 숭고한 서막이 된다.
남유림 작가의 《단정한 작별》을 읽고 상실과 슬픔을 넘어, 인간 내면에 자리한 죄책감과 이기심, 그리고 관계의 본질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사유의 시간이었다.이 책은 중증 장애를 지닌 딸 해든이의 10년 7개월을 지켜본 어머니의 기록이다. 열아홉 번의 전신마취와 처절한 치료 과정을 견뎌낸 아이를 향해 작가는 "살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염치없다"고 고백한다. 이 구절은 부모의 연명이 순수한 사랑인지, 아니면 상실의 절망과 죄책감이 두려워 아이의 고통을 외면한 이기심인지 묻는 윤리적 자각으로 다가왔다.특히 책 전반을 관통하는 ‘돌봄 노동’이라는 표현과 아이가 떠난 뒤 찾아온 정체성의 혼란은 깊은 불편함을 남겼다.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에는 장애나 불행을 부모의 업보나 ‘근거 없는 원죄’로 받아들이는 유교적 부채감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내가 아이를 포기하면 나쁜 엄마가 된다"는 공포와 죄의식은 아이를 편히 보내주지 못하고 집착하게 만든 거대한 굴레였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생명을 놓지 못한 11년의 세월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했던 인간 본연의 이기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그럼에도 자식을 먼저 보낸 비극 앞에서 타인이 감히 ‘이해’나 ‘위로’를 말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것이다. 아이가 죽은 후 작가는 요리나 제빵 자격증을 따며 자신으로서 살아가고자 애쓰는 모습은,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함이 아닌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치열한 ‘상실의 의식(Ritual)’으로 읽힌다. 결국 이 책은 숭고한 모성애라는 포장지 뒤에 숨은 한국적 원죄의식의 폭력성과 인간의 이기심을 정직하고 선명하게 들춰낸다. 동시에 끈적하고 질퍽한 그 죄책감의 늪을 통과해 마침내 자아를 분리하고 홀로 서려는 한 인간의 서글프고 단정한 뒤늦은 작별 인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행동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디자인 전략을 소개하는 실용서이다. 셀프 트래킹, 넛지, 사회적 증거, 가치 연결, 커뮤니티, 재미 등 행동유도디자인의 핵심 개념을 풍부한 사례와 함께 설명하며, 각 이론의 한계와 부작용까지 함께 다루려는 균형감이 돋보인다.책을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행동이 ‘무지-인지-준비-행동-습관’의 단계를 거쳐 형성된다는 설명이었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불교의 ‘12연기(緣起)’가 생각났다. 하나의 행동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조건과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다. 우리의 사고 체계가 합리적으로 작동하기 보다는 빠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행동유도디자인은 우리의 사고체계와 습관을 변화시키는 영리하면서 무서운 툴인 셈이다.저자가 두통의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던 경험은, 최근 내가 AI 튜터와 함께 대화 습관을 점검하고 언어를 교정하는 과정을 떠오르게 했다. 기록과 데이터는 결국 자신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부분은 상당히 공감되었다.다만 책이 행동유도디자인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는 충실하지만, 독자가 직접 실천해 볼 수 있는 워크북이나 실습 프로그램까지 제안했다면 더 강력한 ‘트리거’가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행동의 배후에 어떤 설계가 작동하는지 발견하게 만드는 유용한 입문서다. 특히 공동체와 참여의 힘을 강조하는 부분은 과정 중심의 작품과 관객 참여형 예술 작업을 고민하는 나에게도 그것을 전달하는 툴(방식) 면에서 고려해볼 만한 시사점을 남겼다#디자인트리거 #윤재영 #안그라픽스 #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