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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스 - 선의 인류학
팀 잉골드 지음, 김지혜 옮김 / 포도밭출판사 / 2024년 3월
평점 :
“변태의 뒤틀린 정신, 범죄자의 삐뚤어진 정신, 사기꾼의 곧지 못한 정신, 머저리의 오락가락한 정신”
곧음은 바름과 정직함을, 뒤틀림과 삐뚤어짐은 잘못과 일탈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너무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공간적 은유를 잘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말에도 이런 표현이 상당히 많다. ‘마음이 곧다’, ‘성품이 곧다’, ‘바른길을 걷다’, ‘정도(正道)를 가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삐뚤어진 생각’, ‘뒤틀린 심성’, ‘꼬인 사람’, ‘탈선하다’, ‘선을 넘다’라고 말한다. 공간적 형태나 움직임을 설명하던 말이 어느 순간 사람의 정신과 행동을 평가하는 말이 된다. 곧고 바른 것은 좋은 것이 되고, 휘어지고 뒤틀린 것은 잘못된 것이 된다.
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에서는, 인간의 신체에서 왼쪽과 오른쪽은 기본적으로 대칭을 이루지만, 거의 모든 문화에서 두 방향에는 서로 다른 가치가 부여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오른쪽은 신성하고 바르고 정당한 것, 강하고 영광스러운 것과 연결되고, 왼쪽은 불순하고 약하며 불길한 것과 연결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처럼 오히려 왼쪽을 영광스러운 방향으로 여기는 문화도 있다는 점이다. 결국 오른쪽이나 왼쪽 자체에 선악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공간의 차이에 문화적 의미를 부여해온 것이다. 즉 우리는 공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치가 부여된 공간을 경험한다.
투안의 글과 함께 생각하면, 잉골드가 직선과 곡선을 이야기하는 방식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잉골드는 직선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곡선이 더 자연스럽고 좋은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선의 형태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가치와 의미를 이미 덧씌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직선과 곡선의 차이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에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해 왔는가이다.
잉골드는 곧 선의 형태에서 선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시선을 옮긴다. 손으로만 선을 그리는 것과 자를 이용하여 선을 그리는 것의 차이를 그는 행로(wayfaring)와 운송(transport)의 차이와 연결한다. 자를 이용해 두 점을 연결하면 선을 긋기도 전에 경로가 결정된다. 두 점에 자를 맞추는 순간 연필이 지나갈 길이 미리 정해진다. 여행으로 말하면 출발하기 전에 이미 경로가 정해져 있고, 여행자는 그 경로를 실행하는 셈이다.
반면 손으로 선을 그을 때는 다르다. 연필을 움직이는 동안 계속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에 따라 방향을 조정해야 한다. 그래서 손으로 그은 선에는 어느 정도의 뒤틀림이나 구부러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잘못된 선이 아니라 선이 움직이는 동안 일어나는 일의 흔적이다.
그런데 잉골드는 여기에서도 단순한 대립으로 끝내지 않는다. 자를 대고 그은 선 역시 완벽하게 곧을 수는 없고 자가 미끄러질 수도 있고 손이 흔들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아무리 경로를 미리 정해놓더라도 실제 행위 속에서는 몸과 물질, 환경과 우연이 개입한다. 결국 직선과 곡선, 계획과 무계획, 자와 손은 완전히 분리된 두 세계가 아니다.
나는 아침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시를 한두 편 읽는다. 좋은 문장이나 마음에 들어오는 단어에는 밑줄을 긋고, 때로는 압화를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라인스』를 읽은 이후로 시를 읽고 난 뒤 시의 빈 여백에 선을 그리는 작은 습관이 생겼다. 아무 의미도 없는, 무엇을 그릴지도 정하지 않고 계획도 없다. 연필을 쥔 손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나도 알 수 없다. 선은 가다가 멈추고, 주춤하고, 돌아가고, 다시 이어진다. 때로는 한곳을 맴돌고, 때로는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그저 따라간다. 그리고 다 그리고 난 후에 그 선을 바라본다. 어떤 날에는 동심원처럼 보이고, 어떤 날에는 흐르는 비처럼 보인다. 또 어떤 날에는 나무의 뿌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동심원이라고, 비라고, 뿌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것을 그리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재현한 그림이 아니라, 선이 지나온 흔적이다.
방황하는 선, 주저하는 선, 주춤하는 선, 망설이는 선.
필압이 강한 날에는 선이 거칠고 무겁다. 어떤 날에는 가늘고 연약한 선이 이어진다. 끊어질듯하지만 오래 이어진 선도 있다. 망설이다가 방향을 바꾼 흔적도 있고, 같은 자리를 반복하거나 겹쳐 지나간 흔적도 있다. 무심코 그린 선인데도 그 안에 내 심상이 보인다. 나는 선을 그렸지만, 그 선이 나를 드러낸다.
나는 그동안 왜 드로잉을 망설였을까. 아마도 망설이고 주저하는 선을 나 스스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선이 곧게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하거나 방향을 바꾸면 그것을 좋은 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얀 백지는 자백을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를 그리려면 무엇을 그릴지 먼저 정해야 하고, 선은 그 의도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이 흔들리면 그것을 고쳐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워야 했다.
하지만 망설임은 선의 결함이 아니었고 주저함은 잘못된 방향이 아니었다. 주춤함은 실패가 아니었고 방황한다고 해서 길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선이 움직이는 동안 일어난 사건이고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차를 마시고, 익숙한 일을 하고, 비슷한 길을 오간다. 겉으로 보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하루도 같은 날은 없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날의 몸과 마음은 다르고, 같은 장소를 지나도 바라보는 풍경은 달라진다.
내가 매일 그리는 선도 같은 연필을 들고, 같은 여백에, 비슷한 크기의 선을 그리지만 하루도 같은 선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선이 무엇을 닮았는지보다 선이 어떻게 지나왔는지를 보게 된다. 어디에서 멈추었는지, 어디에서 힘을 주었는지, 어디에서 가늘어졌는지, 어디에서 방향을 바꾸었는지를 본다. 그 안에서 그날의 나를 읽는다.
잉골드는 글을 마치며 이렇게 말한다.
“선은, 삶처럼 끝이 없다. 삶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길을 따라 일어나는 그 모든 흥미로운 일들이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당신이 갈 수 있는 더 먼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종 목적지가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목적지는 오히려 인간에게 안정감을 준다. 우리는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그래서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점을 보고, 사주를 보고, 타로를 보고, 저축을 하고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결국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금이라도 잠재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는 것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목적지가 필요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고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잉골드의 말을 목적지를 세우지 말라는 뜻이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오히려 목적지를 세우되 그 목적지가 바뀌었을 때, 계획에 오차가 생겼을 때, 혹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도착했을지라도 그것을 실패나 좌절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말로 읽고 싶다.
자를 대고 선을 그어도 손이 떨리고 자가 미끄러질 수도 있으니까.
우리 삶은 목적지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 삶은 목적이 없어도 목적이 바뀌어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