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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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때문일까, 이번에 다시 읽을 때는 이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애나의 시점으로 읽었다. 늘 일찍 일어나 바움가트너가 간신히 눈을 뜨기 적어도 40분이나 한 시간 전부터 돌아다니던 애나, 일 층 반대편 끝 작은 방에서 딸깍이며 타자를 치던 애나, 평생을 함께 했던 애나. 남편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바다로 훌쩍 향하는 아내의 마지막 뒷모습은 환지통처럼 몸에 새겨진다. “그냥 그렇게, 팔다리가 몸에서 뜯겨 나간듯 갑작스러운 상실을 겪고 남은 바움가트너는 머릿속에 애나의 이미지를 가득 채운 채로 서재, 코지토리엄, 에서 휘적휘적 나아간다. 어디로? 그건 알 수 없다.

상실을 기점으로 아내를 만나 이어 온 시간을 되새기고, 폴란드에서 건너온 부모의 역사를 기억하고, 아내의 글을 다시 읽는 바움가트너의 눈과 귀에서 애나는 희미해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따스한 생명을 지닌 생생한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당당하고 열정적인 작가, 바움가트너의 기억 속에 드문드문 남은 애나의 또 다른 일부는 이제 또 다른 젊은 여성의 손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다시 살아날 참이다.

 

그래서 멈출 수 없는 그 생명력은 바움가트너로 하여금 가장 따뜻한 겨울옷과 가장 따뜻한 겨울 재킷으로 몸을 꽁꽁 싸고 차에 시동을 걸어, 애나와 함께 어느 일요일 오후 탐험하러 나섰던 곳에 다가가게한다. 이윽고 그는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나무에 부딪히고, 피를 흘리며, 모험의 마지막 장을 시작한다. 마지막 서너 페이지의 이 강렬함, 이 모호한 문턱을 넘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이 단 몇 페이지에서 생과 사, 애나와 바움가트너, 기억과 현실이 뒤엉키고 새로 숨결을 얻어 나무뿌리처럼 뻗어나간다.

 

리커버 버전의 마지막 즈음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애도사를 실은 먼저 읽었다. <뉴욕 3부작>의 그 강렬한 서두, “그 일은 잘못 걸려 온 전화로 시작되었다처럼, 폴 오스터의 소설은 잘못 걸려 온 전화, 우연, 예상치 못한 부름 같은 기묘한 힘으로

우리를 예정되어 있지 않은 곳으로 이끈다. 폴 오스터의 저 문장 하나에서 이건 내가 써야 할 소설이라 생각한 작가의 운명, 수많은 우연이 이끄는 갈림길에서 그저 작가의 손에 나를 내맡기는 독자의 운명은 어디로 이어질까. 어디로 나아가는지 모를 마지막 장을 시작하는 바움가트너처럼, 폴 오스터의 마지막 소설을 덮는 우리에게도 아직 미지의 새로운 장이 남아 있다. 알 수 없는, 하지만 두렵지만은 않은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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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제인 오스틴 - 젊은 소설가의 초상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김선형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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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에세이라기보다, 마치 사랑 고백. 좋아하는 작가의 마음을 낱낱이 알고 싶은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마음에서 글로 나아간 여정의 행간을 읽고, 여백을 짚어내고, 깊이를 짐작해 보는 일을 애써 하는 건 이방인으로서 낯선 언어로 만난 작가를 알아가고 싶은 호기심, 한 손에 잡히지 않는 베일 너머의 상대를 잡고 싶은 애달픈 애씀, 어쩌면 짝사랑의 열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랫동안 제인 오스틴을 번역하고 알려 온 김선형 번역가의 에세이를 읽고, 나는 그 사랑에 전염되었다. 어쩐 일인지 많이 읽어보지 못한 제인 오스틴이지만, 순서를 거슬러 이 에세이를 읽고 나니 제인 오스틴이 읽고 싶어진 거다.

 

엄숙한 청교도적인 작가가 아닌,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젊은 여성의 내밀함을 들여다보는 듯한 번역을 읽으면 살아보지 못한 삶을 꿈꾸는 당시 여성의 갈망과 상실감, 열망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결혼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며 휴대용 책상 하나 말고는 제대로 된 글 쓸 공간도 얻지 못하다가 결국 자기만의 집을 찾아 작품에 전념할 수 있게 된 제인 오스틴의 삶은 글이 되어 그대로 그 시대 여성의 이야기, 그리고 자기만의 방을 찾는 여성의 이야기로 지금도 이어진다.

 

영어 독자가 이 단어 앞에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끌려 나오도록캐릭터의 성격을 살려 입말을 고민하고, ‘텍스트 속에서 깜박거리는 무수한 작은 신호를 포착하는 일, 또 그걸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매끈한 이음새로 연결해 그저 작가의 글만이 도드라지도록 애쓰는 일은 마치 물속 바쁜 백조의 발짓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번역가의 작업 덕분일 거다.

 

에필로그에서 한 번역가가 사랑하는 작가의 모든 문장을 덜컹거리며 통과하는 여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속의 사건들을 소상히 얘기해 보고 싶었다는 고백은, 그래서 이 작업을 이어갈 힘을 주는 사랑이다. 번역할 수 없는 것까지 나누고 싶은 마음, 이 절절한 사랑이 세대를 넘어 전해져, 세상 수많은 독자의 첫사랑이자 평생의 반려가 되고, 한 번역가의 평생의 사랑이 되고, 그리고 이렇게 낯선 독자를 끌어들이는 사랑의 전염. 나는 반갑게 이 전염을 받아들인다.


*좋은 책을 전해주신 엘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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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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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지키려는 고양이>에 이어 <너를 지키려는 고양이>라니, 너무 다정하고 심쿵한 제목 아닌가!

 

도서관 서가를 넘어 찬란한 햇빛을 향해 뛰어가는 소녀와 고양이가 그려진 표지만 보아도 책을 둘러싼 이 모험이 어디로 나아갈지 궁금해진다. 의사로 일하며 발표한 소설로 총 340만 부가 넘는 판매를 기록한 작가의 전작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에 이은 이 책도 그 유명세에 못지않게 흥미진진해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도서관의 책 속에 파묻혀 살던 소녀의 성장기이기도 하고, 고양이와 힘을 합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책을 훔치는 이들과 맞선다는 설정이 판타지이기도 하고, 여러 고전 속 인물들이 속속 등장해 이들을 돕는다는 점에서 고전에 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도서관에서 책을 몰래 훔쳐 와 현대판 분서갱유 하듯 태워버리고, 아무 내용이 없는 (AI가 쓴 것 같은?) 무의미한 책을 양산하는 악당들의 목적이 바로 인간이 상상하지 못하게만드는 것이라니, 그저 신나는 모험담처럼 보였던 책이 갑자기 책을 읽지 않고, 진지함을 멀리하고, 남의 생각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며 그저 내 맘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만이 목표인 지금 우리를 향한 따끔한 경고처럼 보인다.

 

책 속에만 빠져 있던 연약한 소녀가 드디어 혼자 전철을 타고, 먼 곳의 서점에 가고, 혼자 한 발을 내딛으며 세상으로 향하는 찬란한 모험에는 그 과정에서 고양이든 아빠든 서점주인이든 사서든 누군가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따스한 사실이 숨어 있다. 귀여운 소녀와 나름 다정한 고양이를 따라 한바탕 꿈 같은 모험에서 돌아오면 도서관에 가서 유심히 빈 서가 한켠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미궁으로 이끌 고양이가 짠 등장할지, 지금껏 모르고 고이 잠들어 있던 고전을 만나 모르는 세계로 훌쩍 건너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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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서점
서점을 잇는 사람들 지음 / 니라이카나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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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서점. 제목을 소리 내 가만히 읽어본다. 내가 사랑한 서점. ‘내가사랑한사이의 여백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 한 호흡에서 그동안 내가 사랑한 서점들을 떠올린다.

 

내게 서점의 원형인 동네 서점, 감나무 열린 이층집들을 따라 난 좁은 골목을 내려가면 그 끝에 있는, 열 평도 채 되지 않을 작은 서점에서 온갖 어린이 소설을 탐독했던 시절, 유리문을 열기도 전에 내가 읽지 않은 새 책이 들어왔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던 문가 책장에서 피어오르던 달큰한 새 책 표지 향기를 떠올린다. 시험이 끝나거나 방학이 되면 제일 먼저 찾았던 교보문고에서는 지금의 교보문고 향이 났던가.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핸드폰조차 없던 시절, 서점 앞 유리창에 붙인 포스트잇에서 모임 장소를 확인하고 헐레벌떡 달려가 선배나 친구들과 만나 함께 책을 읽고 비장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절 그 사회과학 인문 서점의 비좁은 서가와 쿰쿰한 냄새를 떠올린다. 어째서인지 그곳에서 가장 많이 산 책은 사회과학책이 아닌 <키노>였던 것 같지만. 행운동 이층 햇볕이 길게 이어지는 창가가 좋았던, 영화 책과 <필로>가 반겨 주었던 서점에선 바삭하게 마른 빨래 같은 햇볕 냄새가 났던 것 같다.

 

어째서일까, 이 서점들이 책이 아니라 냄새로 기억나는 건, 그 기억이 그만큼 원초적이어서일까. 내 몸에 들러붙어 빠지지 않는 냄새처럼, 나는 그 서점들을 냄새로 기억한다. 그만큼, 내게서 떨어지지 않겠지, 그 기억이란.

 

과거의 추억으로 묻혀 있었을 기억을 지금으로 꺼내 온 건 오늘의 서점을 지키는 서점지기들의 이야기다. 열다섯 곳의 서점을 지키는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한 서점들. 지금의 서점지기들이 떠올리는 과거의 서점 이야기는 내 이야기와 언뜻 비슷했다. 내 서점의 원형이 되어 주었던 기억 속의 서점, 그리고 그 자취를 찾듯 이곳으로 돌아와 다시 숨결을 찾은 지금의 서점. 거기에는 어떤 모습이 될지 아직 알 수 없는 아이가 가질 기억의 모양새를 갖춰 준 서점이, 처음 책을 만지는 일을 시작했던 헌책방 주인의 무심한 다정함이, 이제는 그리움 북받쳐도 찾아갈 수 없는 책 냄새가 있다.

 

지금은 사라진 서점을 이야기한다는 건,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형 서점으로, 온라인 서점으로 눈길을 돌리고 고향을 떠나면서 한동안 눈을 돌렸던 서점이 어느새 사라졌을 때까지, 그사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우두커니 조용한 서점을 지키는 지기의 마음을 짐작하려 해도 이내 마음이 아려와 그만두고 만다. 그래도 그 사이를 곱씹으면 어느새 조금은 자란 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추억이 되면 힘들었던 것도 그리워진다. 그런 기억들을 생각하면 흙 속의 고구마처럼 천천히 자랐을 그때가 그립다.’

 

한 서점지기는 존 버거의 글을 인용한다. ‘살아왔기 때문에 죽은 이들은 결코 무기력할 수 없다.’ 지금은 없는 서점을 그리는 이야기가 그저 추억 소환이나 한탄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는 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이 지금 그 시간을 잇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이들이 살아온시간을 살려내고, 무기력하지 않도록 숨을 불어놓고, 지금 이곳에 애써 되살려 놓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책장과 책방 사이에서 생겨난 삶을 만나 지금의 삶이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서성거림과 우연 끝에 나의 책방을 열었다.’

 

사라짐을 다룬 책이지만, 이상하게도 쓸쓸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기가 스며 나왔다.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이렇게 서점지기들의 기억 속에서, 지금 서점을 잇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오늘도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들 손에서, 서점과 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내게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하고 짐작한다.

 

기억의 셔터를 올린 건 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손님이다라는 한 서점지기의 글에서 서점을 기억하는 책이 시작되고, 그 책에서 내 속에 머물던 서점 기억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오고, 또 지금의 서점들로 이어진다. 내가 사랑한 서점, 아니 내가 사랑하는 서점, 내가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게 될 서점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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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너머 한 시간
헤르만 헤세 지음, 신동화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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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지나간 여름에 대해 노래했다. 내 소년의 눈이 처음으로 한 젊은 여인의 자태와 걸음걸이에 붙박여 있던 그때를. “


자정 너머 한 시간, 아름답고 반짝이는 꿈, 동화 같은 환상, 축축하고 음습한 기억과 비밀스런 말들이 움트는 시간. 작가는 그 시간에 글을 잣는다. 여인의 금발 머리칼로 시를 잣듯 얼기설기 엉성한 기억과 불쑥 튀어나오는 공상들을 그러모아 글을 쓴다. 그 짧은 이야기들이 모여 <자정 너머 한 시간> 이 되었다. 머릿말을 포함해 헤세의 초기 단편 열 편을 모은 이 작은 책은 어둠처럼 무겁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끈끈하고 음습하고 또 놀라우리만치 희망이 반짝인다. 그 젊음의 혼란스러움에서, 우리가 아는 그 헤세를 만난다. 

닿을 수 없는 사랑. 게르트루드 부인, 이곳의 가장 아름다운 여왕의 그 발끝에서 창백한 모습이 빛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열정에 불타고, 닿을 수 없는 나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며 정반대의 어둠을 갈구하는 젊은 시절의 헤세. 

“이따금 너의 미소가 내 이야기를 따라올 때면, 내게는 순간 그것이 무언가를 
다시 알아보는 미소처럼 보여.“ <말 없는 이와의 대화>는 어쩌면 내 안에 무거운 꿈, 납빛이고 열띤 시간처럼 가라앉은 나 자신과의 대화일까. 

“사람들 대부분의 삶처럼 나의 삶에도 평범함에서 특별함으로 변화가 일어난 지점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부서진 청춘의 폐허를 딛고 무와 공허에서 새롭게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마치 데미안처럼. 

심연에 고여 있던 축축하고 산뜻하고 청량하고 바스락거리고 아름다운 글들이 한밤의 시간 속에서 반짝인다. 헤세의 글이 어디쯤에서 시작되었을까, 곰곰이 뒤적여보는 젊은 날 꿈의 노벨레. 

*엘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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