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다. 굳이 말하자면 사람의 기억일까."
형은 생각하며 대답했다.
예상한 대답과 달라서 나는 당황했다.
"기억에 깃들다니, 어떻게?"
"지금 이야기처럼."
형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사람과 사람의 기억 사이에 깃드는 거야."
- P31

오래된 건물에는 독특한 정적이 감돈다. 신기하게도 인간다운 면이 있고, 정말로 ‘침묵하는 존재를 건물 전체에서 느낀다.
- P53

수집욕은 논리가 아니다. 어쨌든 가지고 싶다. 아무리 많아도 가지고 싶다. 모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 P94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그것도 내 동생이."
"그런 거라니?"
나는 되물었다.
"물건에 남아 있는 사념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말"
"사념이 뭐야?"
그렇게 묻자 형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사람의 기분이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라고 할 수있을까."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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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당겨 앉은 게 마흔세번째인지 마흔네 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
- P242

계에 도킹해 있었다. 친구의 오디션에 따라갔다가 캐스팅된 배우나 세찬 장맛비에 우산을 빌려주었다가연인으로 발전한 커플에게도 그런 환상적인 랑데부가있었을 것이다. 혹여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별에서 태어나 우주먼지로 떠돌던 우리가 이 지구를 만난 건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멋진 랑데부였으니까.
- P249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으면 덜 성공한 경우를 상상할때조차 음악에 관련된 장비를 다루는 자신을 떠올리는 것일까? 고장난 스피커‘를 고치는 사람이라니, 음악을 사랑하며 실천하는 실로 멋진 방법이다.
- P251

그리고 자신들이 낸 세금을 기꺼이 우주 탐사에 쓰도록 허락하고, 공감하고, 지지하고,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봐주는 국민이 필요하다.
당신이 꼭 필요하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우주를 사랑할 수 있고, 우주 탐사에 힘을 보탤 수 있다. 우주를사랑하는 데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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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극은 그렇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주 뒤 인터뷰가 실린 호가 출판되자 국내 여러 언론과 매체에서연락을 해왔다. 내가 『네이처』가 선정한 젊은 달 과학자 다섯 명에 들었다나.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니 흥미로웠다.  - P210

나를 더욱 곤란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대단한 계기로 천문학을 선택한 것도, 어릴 때부터 오매불망 천문학자가 되기만을 그리다 마침내 꿈을 이룬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각자 인생의 흐름이 있는 것이고, 나는 삶을 따라 흘러 다니며 살다보니 지금 이러고 있다. 어느 분야로 가든 대학원은 다닐 생각이었기 때문에, 평행우주 속 나는 지금쯤 생물학자거나 영문학자거나 고고학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박사네 떡볶이‘ 가게 사장일 수도 있다. 그 모든 나들도 사람들에게 들려줄 그럴듯한 전공 선택 계기가 없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 P213

그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어쨌든나는 나를 향한 부름에 상당히 많이 응했다. 아직 탐사선 발사도 하지 않았는데 세계의 관심을 받을 정도로 한국의 달 탐사 관계자들이 열심히, 잘, 하고 있다
는 것이 자랑스러워서였다. 한국형 달 탐사에 사람들이 더욱 관심 갖고 지지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유학을 가지 않은 국내파도, 맞벌이하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도, 다 괜찮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였다.  - P216

부모님은각자 나름의 인생에서 대가이시지만, 내가 가는 길은그 방향이 아니다. 지구를 떠난 탐사선처럼, 내가 나의 삶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갈수록 부모님과 공유할수 있는 것은 줄어든다. 그렇게 점차 멀어져만 가는것이다.
- P226

빛조차도 너무 희미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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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중 하나가 가사와 양육을 도맡거나 도우미를고용하거나 조부모 등 친척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아이 하나 키워내기가 이렇게 어려운 사회, 그래, 현실이 그렇다고 백번 인정한다. 그게 현실이지만, 그게여자들의 ‘문제‘로 인식되는 건 슬프다. 직장에서는그토록 프로페셔널해야 한다면서, 가정에서의 의무는가벼이 보는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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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대학은 서양식 학교다. 오늘날 우리가 논하는 학문과 그 체계는 서양식 기틀을 바탕으로 발원했고 건고해졌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도서양에서 다듬어진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대학에서 다루는 바는 그렇다. 동양식의 관찰과 사유.
겸양과 조화의 가치가 열등하거나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서양식 학문이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기때문이다. 

이 젊은 청춘에게, 그따위 싸구려 축복조차 해주는
‘선생生‘한 자가 이때껏 없었다는 게 화가 났다. 넌 잘하고 있다고, 너만의 특질과 큰 가능성이 있다고,
네가 발을 떼기만 하면 앞뒤가 아니라 사방, 아니 만방으로 길은 열릴 것이라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가. 스무 살, 스물한 살은, 그런 이야기를 차고 넘치게들어도 되는 나이다. 그런 청춘들이 ‘대졸자‘ 꼬리표하나 달기 위해서 돈과 젊음을 들여 스스로 대학 안에갇히는 기간, 사회의 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기꺼이 가지치고 분재로 다듬어가는 기간, ‘멀쩡한 대학 나와서 왜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도 못하느냐‘는 어른들의 질문을 향해 전진하는 그 기간이 나는너무나 아깝다. 왜 그런지는 질문한 사람들이 더 잘알고 있으면서,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꼭 다녀야만 한다면, 대학 졸업장이라는, 그 한없이 틀에 박힌 문서 하나가 주는 즐거움과 보람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바칠 수 있기를, 넘치게 바란다.
- P91

이런 강의가 있다는 것을 접한 순간부터, 강의를 듣겠다고 결정하고, 백 퍼센트 출석은 아니지만 수업을듣고 과제도 하는 동안 천문학뿐 아니라 과학 전반에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혹시 있었을지도 모르는 막연한 거부감 같은 것도 좀 줄어들었다면,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과학관이나 천문대, 천체투영관을 구경하러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게내가 비전공자에게 천문학 강의를 하는 가장 큰 목표고 보람이에요.
- P99

하지만 대신 깨달은 건 있었어요. 연습이부족해서 생긴 빈틈은 그 원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것으로 메꿀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구구단은 달달 외워도 인도 학생처럼 19단까지 외우진 못하지만,
곱하기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으니 계산해보면 19 곱하기 19까지 써내려갈 수 있듯이요. 괴로울 때는 ‘왜그때 더 잘하지 못했을까‘ 하고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게 되지만, 그땐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삶의 다른면을 돌보고 있었잖아요.  - P101

그러니 연구실에 홀로 남아 연구에 집중하는 밤은정말이지 근사하다. 누군가로부터 전화도 걸려오지않고, 누군가 찾아오지도 않으며,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잊어도 되는 밤. 한 시간이든세 시간이든 한 가지 주제에 오롯이 집중해 화장실 가는 것도 잊는 그런 밤, 어떤 사람의 직업은 정해진 시간‘을 성실히 채우는 일이고, 또다른 사람의 직업은어떤 분량‘을 정해진 만큼 혹은 그에 넘치게 해내는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어떤 주제에 골몰하는 일이다.
- P112

조언은 구할 때 해야 가치 있고 실효가 있는 것처럼, 우주의 아름다움도 다양한 지식을 접하며 스스로의 생각이 짜여나갈 때 불현듯 나를 덮쳐오리라.
- P124

나이가 지긋한 과학자에게 무언가에 대해 질문하면모른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알고는 있지만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도 모른다고 하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을 때도 모른다고 한다. 확답을 잘 하지 않고, 그럴 가능성이 높거나 낮다고만 한다. 우린 항상 잘 모른다. 자연은 늘 예외를 품고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이 언제나 어디서나 진실이다.
- P136

엄마가 일을 한다는 것. 이 짧은 문장 속에는 너무도 많은 한숨이 응어리져 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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