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거짓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를 때가 있다. 진모가 그랬다. 자신의 말에 자신이속아서 목이 메고 있는 진모. "이번엔 멜로드라마 작전이구나." "뭐? 멜로드라마?" "그래. 신파조 작전이야. 그렇게 해서 윤희라는 애를 확실히 잡아두려는 모양인데 조심해. 가만 보니 그 애 신파를 되게 즐기더라. 너무 재다가 진짜 네 말대로 요조숙녀 되는 수도 있어. 그러면다행이긴 하지만 내 동생이 좀 안됐잖아? 온갖 폼 다 잡았는데." - P247
남김없이 다 솔직해버리면 사랑이 누추해지니까. 사랑은 솔직함을 원하지 않으니까. - P250
몇 달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집에 돌아오던 아버지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슬픈 일몰의 시간에 어둠을 등에 지고 들어오던 아버지의 쓸쓸한귀가는 그 풍경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이 있었다. 저녁바람에 날리던 검은 머리칼, 깊숙한 곳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검은 눈동자, 구겨진 바지 주름 사이에 숨어있다 아버지가 움직일때마다 아슴아슴 풍겨져 나오던 저 먼 곳의 냄새⋯⋯ - P261
인생은 짧다. 그러나 삶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 - P272
그러나 나는 그런 김장우의 얼굴에서 문득 아버지의 얼굴을 읽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김장우에게도 알지 못하는 생의 다른 길이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알아도 어떻게 할 수없겠지만,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 P277
죽는 일보다 사는 일이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절실히 깨달았거든. 나는 용기가 없어서, 너무나 바보 같아서, 여러 사람이 크게 다치는 대형사고를 만나면 절대 생존자 명단에는오르지 못할 위인이라는 것 잘 알아. 그러니 이 죽음도 뜻밖에 만난 하나의 사고라 여기자 - P284
진진아 너무 빠르게도, 너무 늦게도 내게 오지 마. 내 마지막 모습이 흉하거든 네가 수정해줘. - P285
이모는 그렇게 떠나갔다. 이모가 이 세상과 하직하는 사흘 동안하늘은 내내 음울했고 겨울 끝의 찬바람은 한없이 모질었다. 내머릿속은 모래를 가득 채운 것처럼 부석부석했고, 먹먹한 가슴 한켠으로 쉼 없이 이모의 편지 구절들이 흘러내렸다. 진진아, 나, 이제 끝내려고 해.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나도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 P288
이모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식들의 삶이 완벽하게 지리멸렬해지는 것을 막아냈다. 주리와 주혁은 평생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반추하며 살아갈 것이었다. 진모는 아직도 갇혀있다. 사방이 벽인 감방에서, 그리고 자신의짧은 생애 동안 공고하게 구축해놓은 우상의 세계에서 - P292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인생을 벗어던지고 덤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진짜 인생은 자기 혼자 다 즐기고, 덤으로 얹혀질 인생의 시기에 비로소 가족에게 돌아온 아버지는 천진난만그 자체였다. 생의 이면을 보아버린 자의 그 많은 갈등과 괴로움도 단숨에 압축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다. 남은 것은 음식에의 탐욕, 그것뿐이었다. - P293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이모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모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 뿐이었다. - P296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귀를 가졌다. - P2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