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 머리칼은 여기가 늘 빼죽 솟아 있어." 그는 내 귀 바로 뒷부분을 손으로 건드렸다. "내가 그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얘기한적 없지?"
그의 손가락이 닿았던 부분의 머리칼이 곤두섰다. "응." 내가 말했다.
"얘기했어야 하는 건데." 그는 내 목이 브이자로 끝나는 지점으로
천천히 손을 내려서 맥을 부드럽게 쓸었다. "여기는? 여기는 어떻게생각하는지 얘기한 적 있어?"
"아니." 내가 대답했다.
"그럼 여기는 얘기했겠지." 그의 손이 내 가슴 근육 위로 움직였다. 그의 손길이 닿자 피부가 달구어졌다. "여긴 얘기했지?"
"거긴 얘기했어." 말을 하는데 살짝 숨이 막혔다.
"그리고 여기는?" 그의 손은 내 둔부에 머물다 허벅지를 훑고 내려갔다. "여기는 얘기했어?"
"응."
"그리고 여기는? 여기는 당연히 내가 깜빡하지 않았겠지." 그는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깜빡하지 않았다고 얘기해줘."
"깜빡하지 않았어."
"여기도 있네." 그의 손은 이제 끊임없이 꼼지락거렸다. "여기에대해서 얘기한 건 알아."
나는 눈을 감았다. "또 얘기해줘."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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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론에게 가서 조언을 구할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들판을 돌아다닐까. 그녀가 분명 약을 먹이거나 그를 속였을 것이다. 그가 제 발로 따라나섰을 리는 없었다.
나는 빈방에 웅크리고 앉아서 상상해보았다. 냉기를 풍기며 새하얀 얼굴로, 잠에 취해 뜨끈뜨끈한 우리를 내려다보는 여신, 그를 안아드는 순간 그의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손톱, 창문 너머로들어온 달빛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목, 잠에 취했거나 주문에걸려 그녀의 어깨 위로 축 늘어지는 그의 몸. 그녀는 병사가 시체를옮기듯 그를 나에게서 데려간다. 그녀는 힘이 세다. 한 손이면 그가떨어지지 않게 잡을 수 있다. - P145

데이다메이아는 무슨 생각으로 아가씨들을 불러서 내 앞에서 춤추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그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나는 살짝 스치는 감촉만으로도, 체취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눈이 멀어도 그가 숨을 쉬는 소리와 땅을 밟는 소리를 듣고 알 수있었다. 죽더라도 땅끝에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 P160

마른 땅을 쪼는 새처럼 빈손으로 하릴없이 허공을 움켜쥐며 그의 생각으로 가슴아파했던 기나긴 날들이 떠올랐다. - P160

그는 조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게 뭔지 몰랐다. - P165

혔다. 그가 죽는다니. 생각만 해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하늘을 뚫고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절대 가면 안 돼, 마음 같아서는 그 말을 수천 번도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신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갑고 미동조차 없었다. - P197

나는 그가 자신의 능력 안에서 느끼는 기쁨을,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맹렬히 타오르는 생기를 목격한 바 있었다. 기적적인 능력으로눈부시게 빛나지 않아도 그를 아킬레우스라고 할 수 있을까. 명성을날릴 운명이 아니라 해도 그를 아킬레우스라고 할 수 있을까. - P198

그칠 줄 모르는 사랑과 비애의 아픔, 다른 생이었다면 나는 거절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머리를 쥐어뜯고 비명을 지르며 그의 선택을 그 혼자 책임지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니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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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이렇게 잔인했다. 알겠느냐?
"네." 나는 대답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꿈을 꾸는바람에 눈이 침침하고 충혈됐다고, 비명을 삼키느라 목구멍이 아프다고,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하늘 위에서 이동하는 별들만 바라보고있다고.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너는 그래도 훌륭한 남자로 성장할 수있을지 모른다." 그가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다. - P41

펠레우스는 코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는 오점을 남기고 추방당한 아이다. 네 평판에 하등 도움이 될 게 없어."
"제게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아킬레우스가 말했다. 거만하게 또는 으스대며 한 말이 아니었다. 그냥 솔직하게 한 말이었다. - P50

알고 보니 그는 보기보다 근엄하지 않았다. 차분하고 평온한 겉모습 밑에 장난기 가득하고 보석처럼 다각도로 반짝이는 면모가 숨어있었다. 자기에게 불리한 놀이를 하고, 눈을 감고서 이런저런 것들을받고, 넘지 못할 높이의 침대나 의자를 뛰어넘겠다고 나서는 걸 좋아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 눈가가 불 앞에 갖다댄 나뭇잎처럼 쭈글쭈글해졌다.
그 자신이 불꽃인 듯했다.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고 시선을 끌었다. 자다 일어나서 머리는 산발이고 잠기운에 얼굴은 엉망진창일 때조차 매력이 넘쳤다. 가까이서 보면 그의 발은 거의 인간의 발이라고할 수 없었다. 발가락이 시작되는 도톰한 부분은 완벽했고 힘줄은 리라 현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발바닥은 분홍색이지만 어디든 맨발로다녔기 때문에 뒤꿈치는 하얗게 굳은살이 박였다. 그의 아버지는 백단과 석류 향이 나는 향유로 뒤꿈치를 문지르게 했다. - P57

 그는고역스러운 인간의 난도질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의 아버지가 남들 앞에서 대전을 하지 못하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차원이 존재한다면 어떤 인간이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겠는가. - P60

그렇게 아름다운 인물에게 진 것을 어느 누가 부끄럽게 여기겠는가. 그가 이기는 것을, 그가 발바닥을 번뜩이며 모래사장을 박차는 것을, 어깨를위아래로 들썩이며 소금물을 가르는 것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P64

"응." 그는 잠깐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글쎄." 그는 결국 했던 말을 반복했다. "화가 났을 것 같아." 그는 눈을 감고 나뭇가지에 머리를 기댔다. 초록색 참나무 이파리가 왕관처럼 그의 머리를 감쌌다. - P65

나는 미세하게 그의 쪽으로 몸을 움직인다. 꼭 폭포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기분이다.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뭘 할 생각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몸을 기울이자 우리의 입술이 어색하게 맞닿는다. 부드럽고 둥글고 꽃가루가 잔뜩 묻은 꿀벌의 통통한 몸통 같은 느낌이다. 그의 입술맛이 느껴진다. 뜨겁고 후식으로 먹은 꿀 때문에 달짝지근하다. 내뱃속이 떨리고 따뜻한 희열 한 방울이 살갗 아래로 번진다. 한번 더내 욕망의 강도와 그 욕망이 꽃을 피우는 속도에 나는 충격을 받는다. 나는 움찔하며 얼른 몸을 뗀다. 오후 햇살로 둘러싸인 그의 얼굴과반쯤 하다 만 입맞춤으로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을 볼 수 있는 시간이한 순간, 딱 한 순간 주어진다. 그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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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사들만 아는 방법의 하나로 고음 쪽 음이 짧을 때 음을 길게 울리게 하기 위해 약간씩 틀리게 맞추는 방법이 있다. 일명 라이블리 튜닝(lively tuning) 또는 미스 튜닝(miss tuning)이라고도 불리는데, 음색이 부드럽고 풍부한 느낌을 주는 조율법이다. - P123

정음이란 새 피아노 또는 사용하고 있는 피아노에서 아름다운 음이 나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피아노 음을다스리는 기술이다. 정음을 하려면 고도의 음감이 필요하다.
조율과 조정이 완전하더라도 정음이 제대로 되지 않은 피아노는 짧고 거칠고 어두운 소리를 낸다. - P155

결론은 피아노의 구조상 어느 위치에서도 똑같은음량과 음색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P180

요즈음은 바야흐로 전자 시대라 이럴 때 나는 잘 사용하지도 않는 전자 조율기를 켜서 눈으로 확인시켜 주면 그대로 수그러든다. 생명체도 아닌 것이 위대한 위력을 가졌다.
세상이 바뀌어 어떤 조율기가 새로 출현해도 청각 조율보다더 아름다운 조율은 없다. 64년 경력자가 주먹만 한 기계보다 권위가 없단 말인가? 지금까지 이 피아노로 연주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은 음정이 틀린 줄을 모르고 했단 말인가? - P183

국제 콩쿠르란 겪어보니까 출연자는 출연자들끼리 실력경쟁을 하고 피아노는 피아노끼리, 조율사는 조율사끼리 겨루는 일이었다. 누가 조율한 피아노가 더 좋은 소리를 내는지, 또 누가 조율을 안 풀리게 잘 유지되도록 하는지도 경쟁품목이다. 상대편은 어땠을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는 시간만나면 나가서 피아노를 점검하는 등 열심인 것이 눈에 훤하다. - P185

피아노 연주를 공부하는 피아니스트나 피아노 조율을 연구하는 조율사는 자기가 틀린 것을 스스로 발견해서 바로잡는 능력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P188

피아노는 새것일수록 좋고 바이올린은 오래될수록 좋다는말이 있다. 헐어 버린 피아노에 새 부속품을 끼우면 어느 정도 기능이 향상되기는 하지만, 노인네가 좋은 주사 맞고 영양제 고루 먹고 주름살 없애려고 주름제거 주사 맞았다고 해서 젊은이로 보이지는 않는다. 방치했던 것보다는 컨디션이좋아지게 하는 효과는 분명하나 절대로 백 퍼센트 새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유학생들의 상당수가 칠팔 년에서 백여 년 된 피아노를 리빌드 한 것을 구입해 오는 모습을보았다. 기본적인 부품은 새것으로 교체해서 나아졌지만 대단히 좋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주변의 부속품들, 즉페달이나 액션 등이 옛것 그대로 남아 있어 리빌드 한 효과를 떨어뜨리는 까닭이다.  - P191

지구상에서 최고를 자부하는 피아노 메이커가 몇 개 있다.
스타인웨이, 뵈젠도르퍼, 야마하와 같은 오래된 외국 브랜드들이다. - P193

조율의 노하우는 피아니스트와 대화하면서 새로운 것을 깨달으며, 스스로 연구하고 경험을 쌓아서 만들어진다. 이 바늘로 해머의 여기를 찌르면 딱 이 소리가 난다는 정리된 규칙은 없다. 자신의 감각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것이다. 해머의 소리에 따라 선택되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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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건반 하나에 세 줄씩 매여 있다. 줄 하나가 끊겨도 세 개가 모두 끊기는 경우는 연주장에서 드물다. 끊긴 줄을 걷어 내면 남은 줄이 조금 빈약한 소리를 낼지언정 빠른패시지 정도는 크게 표시 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이렇게첫 곡을 마치고 둘째 곡 사이에 끊긴 줄을 교체하여 그날 연주는 끝까지 잘 마칠 수 있었다. 이때 나는 연주자에게 감사했다. 베레조프스키에게는 줄 끊기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그런 응급 처치를 배워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보고도 줄 사건 때문에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호로비츠의 전속 조율사인 프란츠 모어가 연주 직전에 조하다가 줄이 끊겨 다른 피아노의 줄을 빼다가갈아 끼웠다는 일화를 저서에 쓴 것을 보았다. 새줄을 매면 될 것을 왜다른 피아노에서 같은 줄을 빼다가 끼웠을까?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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