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론에게 가서 조언을 구할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들판을 돌아다닐까. 그녀가 분명 약을 먹이거나 그를 속였을 것이다. 그가 제 발로 따라나섰을 리는 없었다.
나는 빈방에 웅크리고 앉아서 상상해보았다. 냉기를 풍기며 새하얀 얼굴로, 잠에 취해 뜨끈뜨끈한 우리를 내려다보는 여신, 그를 안아드는 순간 그의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손톱, 창문 너머로들어온 달빛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목, 잠에 취했거나 주문에걸려 그녀의 어깨 위로 축 늘어지는 그의 몸. 그녀는 병사가 시체를옮기듯 그를 나에게서 데려간다. 그녀는 힘이 세다. 한 손이면 그가떨어지지 않게 잡을 수 있다. - P145

데이다메이아는 무슨 생각으로 아가씨들을 불러서 내 앞에서 춤추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그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나는 살짝 스치는 감촉만으로도, 체취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눈이 멀어도 그가 숨을 쉬는 소리와 땅을 밟는 소리를 듣고 알 수있었다. 죽더라도 땅끝에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 P160

마른 땅을 쪼는 새처럼 빈손으로 하릴없이 허공을 움켜쥐며 그의 생각으로 가슴아파했던 기나긴 날들이 떠올랐다. - P160

그는 조롱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게 뭔지 몰랐다. - P165

혔다. 그가 죽는다니. 생각만 해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하늘을 뚫고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절대 가면 안 돼, 마음 같아서는 그 말을 수천 번도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신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갑고 미동조차 없었다. - P197

나는 그가 자신의 능력 안에서 느끼는 기쁨을,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맹렬히 타오르는 생기를 목격한 바 있었다. 기적적인 능력으로눈부시게 빛나지 않아도 그를 아킬레우스라고 할 수 있을까. 명성을날릴 운명이 아니라 해도 그를 아킬레우스라고 할 수 있을까. - P198

그칠 줄 모르는 사랑과 비애의 아픔, 다른 생이었다면 나는 거절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머리를 쥐어뜯고 비명을 지르며 그의 선택을 그 혼자 책임지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니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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