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어머니로 받들며 섬기는 사람들이 있어. 많지않은 동류를 모아 부락을 이루었고, 제사장을 뽑아 옛 재앙을 속죄하며 살아가고 있지. 그들의 삶 속에는 검과 노래가 같이 들어 있어서 어느새 혼연일체가 되어버렸어. 용서와 복수가, 온화함과 잔인함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잊힌문명이다. 이 검을 들어서."
이실더가 단검 하나를 뽑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
"한 생명을 죽임과 동시에 해방시켜줄 수 있는 것처럼."
안개가 자욱한 밤이었다. 모닥불조차 젖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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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이란 인간을 분열시키는 존재라고 보리스는 굳게믿어왔다. 분열이 가져오는 비극이란 폭군의 정치보다 몇배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한 명의 폭군을 모두가 증오하는 편이 나았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죽고 죽여야 하는 것에 비하면,
하지만 들을수록 공화국이란 이상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이윽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게 했다. 마치 나쁜 마법 같았다. 어쩌면 보리스가 정말로 영주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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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해내게돼. 그러니까 너도 너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라. 어떤 보물보다도, 윈터러나 그 밖의 무엇보다도, 형이 너를 위해 무 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너도 너를 위해 무슨 일이든할 수 있어야 하는 거다.
 보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속에 불안한 예감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몰아쳐왔다.
"너 자신을 힘껏 지켜라. 죽지 않도록, 버려지지 않도록, 아프지 않도록, 다치지도 않도록......."
살아남아라.
미치도록 힘겨운 세상에서 견더, 끝까지 살아남아라.

동생을 감싸 안은 형의 따스한 체온, 나의 형.
어느새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지 마, 형, 가지마.
날 혼자두고 가지마.

긴 검인 윈터러는 자살을 하기에 좋은 무기가 아니었다.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검을 바닥에 꽂거나 해서그 위에 몸을 던졌을 것이고, 동생이 볼 것을 대비해 마지막 힘을 다해 도로 뽑아냈을 것이다. 밤새 흙을 파냈을 형의 손끝은 갈라지고 누렇게 얼룩져 있었다. 산 자에게 작은 수고로움조차 남기지 않으려 한 그 노력은…… 살아남는 자로서 실로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왜 , 왜,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서……….
소년은 구덩이 앞에 앉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해가높이 오르고, 낮의 바람이 뺨을 스쳐갔다. 세월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돌로 변하기라도 한 듯 소년은 움직이지 않있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자신은 생존을 위해 길 하나를 택한 것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형의 주문대로 살아남는 것이었다. 만일 백작이 약속과는 달리 실패한 보리스를 벌주려 한다면 ‘책임을 지고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재빨리 달아나야 한다. 보리스는백작의 목적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위해태어났다.

겨울을 지새우는 자여
그것은 아주 길고 긴.
끝나지 않는 겨울 일지도 모른다.
서리와 눈보라를 이기고 바람과 눈물을 견뎌 마침내 찾아올 그 봄은 네 시체 위에 따뜻한 햇살이 되어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푸른 칼날처럼 세워천년의 겨울을 견디도록 대비하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보리스의 어깨에는 형의 생명이 짐처럼 지워져 있었다.
결코 쉽게 죽어선 안 되었다. 목숨도 검도 함부로 버려서 안 되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살아남을 것이다. 영원히 사는 저 불멸자들처럼.

약하지만 짜릿한 전율이 몸을 타고 흘렀다. 이것은 열쇠이자 문인가? 아직 암흑뿐인 그의 생애에 첫 번째 지표가 되어줄 선명한 별빛인가?

"넌 세상을 다 산 것이 아니야. 이 작은 녀석아……. 무얼 그렇게 참으려 애쓰는 거냐. 세상엔 힘들지 않은 자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다는 욕망을, 그리고 더훌륭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고 있단 말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야. 한시라도 살아 있을 그 내일을 위해 살 뿐인데………."

잊어버리겠지. 너의 존재 같은 건.
그리고 너 역시 조금 더 지나면 나를 잊겠지.
성장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까.

본래 강해지는 것보다 자신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걷는 것 만이 목표인 보리스였다. 그런 마음이 그의 페이스를 만들었다. 월넛은 그 세계에 끼어들 수 없었다. 몇 번인가 열릴듯하다가도 결국 열리지 않았다. 보리스의 마음에도 바깥을 향해 열린 부분이 있긴 했다. 거기에 몇 번인가 중첩되민서 교감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사로잡을 수 없는 소년이었다.

둘은 말없이 책을 내려다보았다. 내려앉았던 꽃잎이 페이지 한구석에 얼룩을 남겼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찍은 듯한 자국, 바람이 눌러두고 간 손자국인 듯. 아련한 봄과 어울리지 않는 아픈 이야기들.

그런 상황에서도 란지에는 자신만의 기준을 잃지 않고 놀랄 만한 공평함을 발휘했다. 강자의 손아귀에 뛰어들어 활로를 찾는 약자가 가장 잃기 쉬은 것이 바로 그 공평함인데도,

달려갈 것이다. 이 길이 어디로 가든지. 어둡지만, 어두워서 모든 것을 감싸주는 밤 속으로.
빛 없는 밤을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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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말이야, 아버지의 말도 옳았다고 지금에서야, 이리도 늦어버린 뒤에야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제 나라도 말해주지 않으면 안 돼, 동정심 같은 걸로 마음약해지지 말라고, 고통도 외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그렇게 강해지라고 말이야."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내가 네 곁에 있어줄 순 없어. 아니,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되겠지. 네게는 너만의길이 있을 거야. 그걸 스스로 찾아내려면 너는 정말로 강해져야 하는 거야. 아주 단단해져야 하는 거야." 

"보리스, 바위가 될 수 없다면 조개가 되는 거다. 네 속이 여려도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아무도 열어볼 수 없도록 꽉 닫아버려, 아무도 보지 않는 깊은 골방에서라면 눈물 흘려도 좋으니까. 거기서만은 누구도 탓하지 않으니까"

예프넨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둥지가 없어져버린 어린 새가 그날저녁에 날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런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것처럼. 그래야만 할 이유가 생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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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프넨에게는 보리스가 우선이었다. 혼자라면 어둠을 뚫고 달아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첫째로 아버지를 두고 가야 한다는 고통, 둘째로 동생을 안전하게 데려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발목을 잡았다. 동시에 여하한 이유로든, 윈터바텀 깃을 삼촌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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