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사과하려는 아버지…… 친절한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시선이 요제프에게서 무얼 봤는지 알았다.
젊은 시절의 그를 그려볼 수 있었다. 그때 요제프는 두번째 결혼도 실패한 후였다. 그렇게 외로울 거면 우리랑 계속 살지 그랬어, 하고 타박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명은은 가끔, 그렇게 반복해서 결혼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한 번도 결혼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것이 신기했다.
- P303

"언제까지 땅 파고 살 거니? 두더지 이모가 될 셈이니?"
명혜는 이십 년이 넘게 잔소리를 하다가 최근에 포기한 듯하던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두더지 이모라는 말이 명은은 마음에 들었다. 지수가 가출을 했을 때 굴처럼 천장이 낮은 집의 소파를 기가이 내즌적도 있으니 정말 두더지 이모가 된 것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명혜의 오해와는 달리 명은은 그림자 자주을 파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훼손을 최대한 지양하며지표 조사를 하고, 특수한 경우 시굴을 거쳐 발굴에들어갔다. 젊은 시절 격자 도랑을 파느라 허리가 상했고 노년에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전반적으로는 할 만했다.  - P304

제발 어딘가 퓨전 아시아 음식점에 머리만 놓인 불상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 아니길 바라며 명은이 미소지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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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때문도 아니야. 각도 때문도 아니야. 할머니한테 던지기 전에 갈아뒀던 거야."
"설마..
"할머니는 그 정도의 악의는 상상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지. 21세기 사람들이니까. 그런 악의가 존재한다는 걸 알지."
우윤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화수의 말이 맞으리란 것을 뒤따라 깨달았다. 전공은 조소였지만 유화 나이프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건 팔에 박히는 물건이아니었다.
- P220

"그렇지만 오늘도 제대로 탄 적이 없잖아."
"원래 모든 운동은 계단식으로 느는 거야. 계단을올라서는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포기하면 안돼."
왜 자신의 계단만 유난히 폭이 넓고 험난한 형태인지. 우윤은 투덜거렸다. 
- P237

 화수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죽은 남자가 사촌 큰누나에게 염산을 던졌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할때의 역겨움을 온 가족이 똑똑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규림 자신은 도저히 같은 짓을 할 수 없었다. 가해와 피해의 스펙트럼에서 스스로가 가해에 더 가까웠음을 인정해야 했다. 방전된 배터리와 나쁜 타이밍 이전에 멍청하고 명하게 방조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한빛과의 관계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 P269

언젠가 먼 여행지에서 한빛을 만나 그렇게 반가워할 수 있으면 했다. 불가능할 거란 걸 알면서도 아직 포기하지 못한 마음이 그렇게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 P274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회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
- P277

시선은 사랑과 자신의 언어 중에서 언어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터져나오는 말들을 거꾸로 잠글 수는 없었던 사람...... - P282

아는 사람은 다 궁금해하는 사생활에 대해서, 한 번에 털어놓지 않고 파편화시켜 조금씩 썼다. 사람들이 저열하게 알고 싶어하는내용은 힌트 정도로만 흘리고 자신이 세계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로 책을 채웠다. 영리한 전략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 P283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 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 P283

나도 어른이지,
언제까지고 딸, 손녀, 보호의 대상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어른으로 살 수 있지? 이미 어른이지만제대로 된 어른으로? 하루종일 잠으로 시간을 보내서는 어려울 것이다. 퇴행의 증상이었다. 몸이 마음을지키려고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이겠지만 깨고 나가야 한다. 이해할 만한 상황이라고들 말하는데, 화수는 이해받는 것에도 질려 있었다.
좆같은 일이 화수에게 일어났다. 좆같다는 말을 쓰는 사람이 될 줄 몰랐지만 유해한 남성성을 그보다 잘표현하는 말도 없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욕도 표현의일종이라고, 다만 정확하고 폭발력 있게 욕을 써야 한다고 말했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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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살았남았나 싶을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첫번째 남편도 두번째 남편도 친구들도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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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아는 오래전에 식어버린 커피와, 오래전에 끝난대화를 하와이에서 곱씹었다. 만약에 경아가 완벽한 코나 원두를 사서 엄마가 좋아하던 묵직한 미국식 머그에 내려 제사상에 올리면 죽고 없는 사람이라도 웃을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유머였으니까. 엄마.
그띠니 말했던 그 코나 원두야, 하고 죽고 없는 사람을 웃게하고 싶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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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설득하다 우윤은 아득해졌다. 원래 불안한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후천적인 불안이었고, 우윤이 원인이었다. 죄책감과 배신감이 함께 들었다. 어껌 이렇게 속상하게 한담? 우윤이 아팠던 건 우윤 탓이 아니었는데, 이제 와 우윤이 노력해도 우윤의 부모는 변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식만 부모 속을 썩이는건 아니었고 반대도 가능했다.
- P151

"나는 저 마음을 알아. 나는 안다고."
우윤은 엄마가 뉴스를 보지 않았으면 했다. 누군가가 자식을 잃는 일이 지나치게 자주 일어나는 세상이란 게 불만스러웠다. 엄마는 일 년 내내 아픈 아이가있는 가족들에게 성금을 보냈다. 그런 지속적인 행위도 엄마의 불안을 줄이는 데는 전혀 도움되지 않았다.
"엄마, 나는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으니까 사는 것처럼 살아야지."
- P152

"나 결심했어, 할머니 제사상에 완벽한 무지개 사진을 가져갈 거야."
"뭐?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하는 거야?"
지수의 결정에 우윤은 깔깔 웃었지만, 속으로 자신도 결정했다. 완벽하게 파도를 탈 거야. 그 파도의 거품을 가져갈 거야.
- P155

가끔은 나쁜 기억들에 잠겨 몸안에 갇히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럴 때는 말도 잘 할 수 없었으니까.
- P169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
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 P170

입지가 애매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적응하기힘들어하는 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예술 애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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