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때문도 아니야. 각도 때문도 아니야. 할머니한테 던지기 전에 갈아뒀던 거야."
"설마..
"할머니는 그 정도의 악의는 상상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지. 21세기 사람들이니까. 그런 악의가 존재한다는 걸 알지."
우윤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화수의 말이 맞으리란 것을 뒤따라 깨달았다. 전공은 조소였지만 유화 나이프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건 팔에 박히는 물건이아니었다.
- P220

"그렇지만 오늘도 제대로 탄 적이 없잖아."
"원래 모든 운동은 계단식으로 느는 거야. 계단을올라서는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겠다고 포기하면 안돼."
왜 자신의 계단만 유난히 폭이 넓고 험난한 형태인지. 우윤은 투덜거렸다. 
- P237

 화수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죽은 남자가 사촌 큰누나에게 염산을 던졌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할때의 역겨움을 온 가족이 똑똑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규림 자신은 도저히 같은 짓을 할 수 없었다. 가해와 피해의 스펙트럼에서 스스로가 가해에 더 가까웠음을 인정해야 했다. 방전된 배터리와 나쁜 타이밍 이전에 멍청하고 명하게 방조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한빛과의 관계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 P269

언젠가 먼 여행지에서 한빛을 만나 그렇게 반가워할 수 있으면 했다. 불가능할 거란 걸 알면서도 아직 포기하지 못한 마음이 그렇게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 P274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회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
- P277

시선은 사랑과 자신의 언어 중에서 언어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터져나오는 말들을 거꾸로 잠글 수는 없었던 사람...... - P282

아는 사람은 다 궁금해하는 사생활에 대해서, 한 번에 털어놓지 않고 파편화시켜 조금씩 썼다. 사람들이 저열하게 알고 싶어하는내용은 힌트 정도로만 흘리고 자신이 세계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로 책을 채웠다. 영리한 전략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 P283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 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 P283

나도 어른이지,
언제까지고 딸, 손녀, 보호의 대상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어른으로 살 수 있지? 이미 어른이지만제대로 된 어른으로? 하루종일 잠으로 시간을 보내서는 어려울 것이다. 퇴행의 증상이었다. 몸이 마음을지키려고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이겠지만 깨고 나가야 한다. 이해할 만한 상황이라고들 말하는데, 화수는 이해받는 것에도 질려 있었다.
좆같은 일이 화수에게 일어났다. 좆같다는 말을 쓰는 사람이 될 줄 몰랐지만 유해한 남성성을 그보다 잘표현하는 말도 없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욕도 표현의일종이라고, 다만 정확하고 폭발력 있게 욕을 써야 한다고 말했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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