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좋은 사람은커녕 심지어 연애와 관련된 그 어떤 소원도 빌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미래를 기약하기 힘든 게이라는 특수성을지니고 있다고 한들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단 한 번도 그런 소망을풀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조금 기이한 일이기는 했다.  - P71

"한영아, 도대체 내 문제가 뭘까 나 그렇게 별로냐?"
"아니, 멀쩡하지. 얼굴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고, 키도 작지 않고, 지 앞가림도 잘하고. 근데 너는 결정적으로 용기가 없어."
"무슨 용기."
"상대한테 투신하는 용기, 연애가 별거니? 그냥 눈 꽉 감고몸 던져버리는 거야. 근데 넌 겁이 너무 많아, 발가락 하나 걸치질못하는데 누구랑 연애를 하냐." - P72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성격이 곧 운명이라고. 취향? 애인이 뭐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이냐.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줄 배경을 만들려는 노력, 좋은 사람과 지속 가능하고행복한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 그런 게 다 성격에 포함돼 있는거야. 그 성격 덕분에 네 연애사는 이 지경인 거고 인정하지?" - P74

나는 악다구니를 썼다. 남준 역시 조금 더 격앙된 어조로 연애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냐며, 서로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편안하고 즐겁고, 하루해가 모자란 게 사랑 아니냐고 했다. 나는 네 얼굴이 넷플릭스라도 되냐고 어떻게 천년만년 계속 들여다볼 수 있겠냐고, 지겨워 미칠 것 같다고 소리질렀다.  - P87

그런 일상의 소소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남준과 함께 그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비로소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모두 맞춰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적 욕망이나 사랑이라고 단순화되곤 하는 그런 감정을 초월한, 어떤 안정감 같은 것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 P97

부장이 걱정하는 게 나와 한영의 건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있었다. 우리 회사가 확진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병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것 아닌가. 병은 병일 뿐인데, 어떤병은 흉이며 죄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인생 전체를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죄. 뭐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부장이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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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점심을 먹을 때면 선배 기자들끼리 요즘 애들은 아무것도 알고 싶어하지도 질문하지도 않는다며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학원을 다니며 수동적으로 공부해 그런 것 같다고, 전혀 참신하지않은 세대 분석을 했다. 그 말을 한 배서정과 우리가 고작 네 살차이라는 것이 떠올랐고, ‘요즘 애들‘이라는 말을 쓰기에 네 살 터울은 조금 애매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25

나는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황은채 역시 나와 마찬가지인 듯했고, 이런 우리의 변화가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라믿었다. 그렇게 나다운 것들을 깨끗이 표백하고 나면 비로소 매거진 C의 색깔이 입혀져 그토록 염원하던 정직원이 될 수 있을 거래고 여겼다. - P38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게 부러웠는데, 그때의 내게 결핍된것이 그런 판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있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한 것들, 내가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된게 언제부터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 P46

선배 있잖아요, 저는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인간취급을 받고 싶었어요.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름이나 알리고 싶어하는 요즘 애들이 아니라, 방사능을 맞고 조증에 걸린 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요. - P49

면접장의 문을 닫고 나오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요즘애들답지 않은 건, 또 뭘까. 함께 들어온 열한 명의 계약직 사원중 정규직 전환이 된 사람은 나뿐이었다. 선배들은 그런 나를 두고 두 명의 사장 모두에게 인정받은 것은 너뿐이라고, 이념과 체제를 초월한 인사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더욱 체감할 따름이었다. 불과얼마 전까지 나와 함께 웃고 떠들고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던 동기들은 이제는 모두 없는 사람이 되었다.  - P53

그리고 이제 나는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배서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만큼 배서정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나와 황은채를, 요즘 애들이라고 이름 붙여진 불가해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어떤 종류의 이해는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자세로 남기도 한다. 내게는 그 시절이 그랬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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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들은 어머니를 잃었고 또 아버지도 잃었데이. 내가 그 애들한테 더 잘해줬어야 했다. 혼인시킬라고 애썼어야 했는데 우리한테 돈이 없었다. 여인네는 고생할 팔자를 타고났데이. 우리네는고생할 수밖에 없데이."
선자는 두 자매가 속아서 끌려갔다는 어머니의 생각이 옳다고직감했다. 지금쯤 두 사람이 죽었을 공산이 컸다.  - P378

필요하다면 그 아이들의 이를 몽땅 뽑아버리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너희가 나를 짐승 취급한다면 진짜 짐승이 돼서 너희를 해칠 거야, 모자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자수는 선량한 조선인이 될 뜻이 없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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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요셉은 이 남자가 싫었다. 남자의 비싼 옷, 화려한 구두, 온몸에 드러나는 자신감, 지독하게 뿜어내는 난공불락의 강인함.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 이 남자가 싫었다. 이 남자한테는 동생의 아이를 데려갈 권리가 없었다. - P345

한수는 일본인들이 작정하면 병적일 정도로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조선인과 아주 흡사하지만 일본인의 고집은 더 조용했고 알아채기가더 어려웠다.
가? 그들이 - P347

선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배은망덕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삶이, 자신의 무력함이 수치스러웠다. 햇볕에 까맣게 탄 손과 지저분한 손톱으로 빗지 않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런 모습을 한수에게 보이기 싫었다. 다시는 매력적인 여자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P352

넌 내 밑에서 일하면서 잘 먹고 잘 벌었어. 그래서 이런저런이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지. 당연한 일이야. 애국심은 그저 이념이야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념에 빠진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잊게 돼. 그리고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은 그 이념에 지나치게 심취한 사람을 이용하지. 넌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어. 너 같은 사람들이나 나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어도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어. 일본이 빠져나가고, 이제 소련과중국과 미국이 거지같이 작은 우리나라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어. 네가 그들과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조선은 잊어버려 - P362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창호는 아내가 남편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비롯해 많은 신념이 있었다. 경희가 낙심한 남자를 버리고 떠난다면, 자신이 지극한 애정을 쏟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었다. - P363

"우리 조선인이요. 우리는 서로 다투고 있어요. 하나같이 자기가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죠. 누가 지도자가 되든 자기 권력을 지키려고 격렬하게 싸울 거예요." 창호는 한수가 자기한테 한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특히 인간의 가장 추악한 면을 보는 일이라면 한수가늘 옳아서였다. 이런 면에서 한수는 항상 정확했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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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큰어머니, 가장 좋아하는 큰아버지한테도 숨기는 큰 비밀은노아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무잘못도 하지 않은 온화하고 다정한 아버지가 감옥에 가게 두었다.
아버지가 하나님은 아이들의 기도를 아주 꼼꼼하게 듣는다고 말했는데도, 하나님은 2년 동안 노아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아가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비밀이 있었다. 일본인이 되고싶다는 것이었다. 노아의 꿈은 이카이노를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 P280

고 다정한 말을 반짝이는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며 의지했다. 누구도 칭찬을 바라서는 안 되고, 특히 여자는 더 그러했다. 아버지는어렸을 적 선자를 아주 애지중지하며 길렀다. 선자는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선자는 노아도 그렇게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었고, 아들들을 보내준 하나님에게 온 마음을 다해 감사했다. 남편의 형 집에서는 하루도 더 못 살겠다 싶은 날들이 있었다. 늦은밤까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감옥에 가서 남편 밥을 건네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럴 때면 선자는단 한 번도 자기에게 언성을 높이지 않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기쁨이라는 것을, 아들들이 선자의 기쁨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 P285

이삭이 눈을 뜨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제 아이들을 볼 때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주님. 제 아이들을 보고 축복해줄 때까지는요.
주님, 저를 아직 데려가지 마시옵소서・・・・・선자도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이삭이 다시 눈을 감았고 어깨가 고통으로 움찔거렸다.
선자가 끊어질 듯 약한 숨결을 확인하려고 오른손을 이삭의가슴에 놓았다. - P300

"아가, 이리 오렴." 이삭이 말했다.
노아가 이삭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발 하나님, 제발 아빠를 낫게 해주세요. 한 번만 더 부탁드릴게요. 제발, 노아가 두 눈을 꼭 감았다.
이삭이 노아의 손을 잡고 꽉 쥐었다.
"너는 아주 용감해, 노아야 나보다 훨씬, 훨씬 더 용감해 너를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노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아가한 손으로 코를 닦았다.
"내 아가." 이삭은 말하고는 아들의 손을 놓았다. "사랑하는 내아들 내 축복" - P307

 넌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걸알게 된 거야. 나도 살고 싶어. 그리고 내가 살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일을 알아야 해. 지금 난 너한테 귀중한 정보를 말하고 있어. 네가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게 하려고. 이 정보를 헛되게 하지 마.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겠지만 넌 네 아이들을 보호해야해." - P316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제발 어리석은 여자처럼 굴지 마 넌 그보다는 영리하잖아. 움직여야 할 때야. 이 식당도 파괴될 거야." 한수가 빠르게 말했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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