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깨에 앉은 아마의 흰 목덜미를 무심코 쓸어보았을 때, 새는 더 깊게 목을 수그리곤 기다리듯 가만히 있었다.
더 만져달라는 거야.
인선의 말대로 나는 그 따뜻한 목덜미를 다시 쓸어내렸다. 마치인사하듯 새가 더 깊이 목을 수그리자 인선은 웃었다.
더, 계속 쓰다듬어달라는 거야. - P141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칠하지 않은 생나무들은 표정도 진동도 없는 정적에 잠겨 있는데, 이 검은 나무들만이 전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 P145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양치잎 같은 그림자가 벽 위를 미끄러지며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내지 말라는 거예요.
손깍지 낀 그녀의 두 손이 풀렸다가 다시 단단히 매듭지어졌다. - P159

어둠이요.
어둠이 거의 기억의 전부예요.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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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는 새로운 경험보다는 반복되는 경험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이론이 있다. 꼬마 때는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친구랑 모래놀이를 해도 새록새록 새로운 경험이라 하루가 풍요롭지만, 어른은 대부분 반복되는 일상을 살기 때문에 뇌가 일일이 다기억하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는것이다. 내 일상도 그렇게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있었다. 곧 마흔 살, 청춘과는 이미 멀어진 나이이고 어차피 죽으면 썩어서 사라질 몸인데 난 참 쓸데없이 주저하는 일이 많구나,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발레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나이 마흔을넘어서도 심리적 에너지 수준이 떨어지지 않으려면어린 시절 꼭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보는 게 좋다는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내게는 그게 발레였다. - P11

‘에샤페 (échappé)‘ 동작을 하는데, 유독 안다리 살이 눈에 거슬렸다. 땅에 떨어질 때마다, 무겁게 흔들리는 주방용 짧은 커튼처럼 지방이 출렁거렸다. 진짜 안 되겠다 싶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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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기에 이 섬의 바람은 마치 배음처럼 언제나 깔려 있는 무엇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온화하게 나무를 쓸고 가든, 드물게 침묵할 때조차 그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 P129

새는 어떻게 됐을까.
오늘 안에 물을 줘야 살릴 수 있다고 인선은 말했다.
그런데 새들에게 오늘은 언제까진가. - P130

산 이유를 알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 불꽃 같은 게 활활 가슴에 일어서 얼어죽지 않은 것 같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그때젖은 신발이 끝까지 마르지 않아 발가락 네 개가 떨어져나갔는데,
나중에야 그걸 알았지만 아깝지도 슬프지도 않더래요. - P133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둘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 P135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법이 없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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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부가 찢기고 뼈가 꺾여 피를 쏟으며 생의 불꽃이 잦아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는 얼굴들과 겹쳤다. 평세는 눈물을 참았고 달출은 고개를 숙였다. - P189

자기 몸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도 다 사람 사는 냄새였다. 하지만 지금의 피 냄새는 견딜 수 없었다. 그건 사람 냄새가 아니라 정반대의 이취(異)였다. - P190

타자들의 피가 엉겨 만들어낸 기묘한 단일감, 일체감이 모두를 감쌌다.  - P199

죽기 직전 조선인들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이 말의뜻을 이해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어떤 자는 이를 조선인들끼리의 암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 P210

여성들을 강간하고 다닌다는 말은 오직 치안 유지라는 명목을 위해 상부가 고심에 고심을 더해고안해낸 말이라는 걸 교쿠지츠도 이미 알고 있었다. - P219

일본인들을 죽이고 다니느라 온몸이 피범벅이래!
징그럽고 거짓말도 하고 불을 지르고 털이 많대! - P240

목적지는 없었지만 도착해야 할 안전한곳이, 함께 싸우기에 평화로울 수 있는 곳이 자신들을기다리고 있길 바랐다. - P242

어쩌면 살육 당시를 목격해 증언한 사람의 후손일지도 몰랐다. 혹은 어쩌면 그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죽어간 사람들의 여전히 살아 있는 이야기를 어느 때곤 가만히 들여다보려는 사람들일지도.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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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배에서 내릴 때 평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도 있는 힘껏 걸었다. 살러 가는 길이었다. 죽으러 갈힘을 내지 않아 다행이었다. 죽는 길 말고 사는 길로오라고 자신에게 손짓한 이가 달출 형님이었다.  - P89

구호 순서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절도가 아닌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래야 이 사회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더라도 이유 없는 수모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향에서도 그랬다. 약한 사람들이 더도덕적이어야 했다. - P96

"그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을모아 마을 서낭당에 모셨다. 하늘님이 되시라고 기도했다. 그동안 우리 마을을 지켜주던 신은 하늘에서 온이가 아니더라. 대대로 마을에서 가장 처참하게 당한사람이더라."
아버지는 나주를 초토화한 일본인들이 훈련받은 군인들로는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기네 나라에서도궁핍한 형편이라 외국의 전쟁터로 끌려 나온 것 같았다고, 곤궁해 보이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일본인 민간인들이 조선 호남의 민간인들을 섬멸했다고....... - P113

오늘 봤던 잔인한 이야기는 못 본 척감추고 태연하게 말하고 싶었다. 어디나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더라고, 어머니가 말버릇처럼 하던 이야기를 자신도 하고 싶었다. 근데 어머니, 사람을 벌레처럼죽이는 것도 어디서든 똑같이 일어나는 일일까요? - P115

다카야는 두 번째 생에서도 말년에 폐암을 얻었다.
죽지 못하는 신세로 죽음과 같은 생을 이어가다 두 번째 100년의 끝이 다가올 즈음 다시 카타콤베에서 눈을 떴다. 200년을 지나며 또 한 번의 시간 루프가 다카야에게 형벌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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