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속력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다. 배꼽이 언제나 달려 있고, 귓불이 언제나 두 쪽인 것처럼 그 마음도 늘 거기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서울로 내달렸던 석진의마음은 욕망이라기보단 낭만이었다. 여기 아니면 어디라도 좋다는 마음. 그게 로맨티시즘의 기본 강령 아니었던가. - P107
"너 입에서 시궁창 냄새 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 그거 못 고치면 회원 다 떨어져 나갈걸? 좋은 말로 할 때 내과나 가봐." - P130
"아침에는 카페인, 오후에는 니코틴, 저녁에는 알코올, 밤에는 마약, 새벽에는 SNS, 다시 아침이 되면 커피. 저번에 당신도 커피프린스 보고 한국 왔다면서요." "그러네요" - P156
"욕조가 빨갰어요. 엄마 팔 한쪽이 욕조 밖으로 나와 있었어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아, 남을 안 베려면 자기를 베면 되는구나 하고." - P169
내뱉는 동시에 석진은 그 말을 후회했다. 더럭 겁도 났다. 칼을 삼킬 정도로 무서울 게 없는 이 여자가 두려웠다. 수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들은 무서울게 없다고. 그래서 자기는 밑바닥 인생들이 제일 겁난다고 뜬금없이 조선족 여자를 데스크에 앉혀놓으면 환자들 반응이 어떨지 뻔했다. 무엇보다 그 데스크 대금을 치른 장모가 펄펄 뛸일이었다. - P169
묘한 몸이었다. 차고 뻣뻣한 몸피. 안쪽은 의외로 따뜻한물을 품은 여자였다. 하지만 석진의 몸은 이내 길을 잃고 허둥댔다. 에이스 이석진 원장이, 내시경 호스를 넣는 데 실패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뭔가가 팽팽하게 진입을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클라이밍 암장에 매달려 있을 때처럼 애를 쓰던 석진이결국 정상에 오르지 못한 채 떨어져 나갔다. 아랫도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침묵하던 유화의 입에서 갈라지는 목소리가흘러나왔다. - P175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생리적 욕구는 희박해졌지만 타인의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싶은 욕구는 더 강렬해져만 갔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타인의 몸과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섹스는 그 즐거움 때문에 치러야 하는 일종의 기회비용이었다. 주니와의 관계도 시작은 그랬다. 석진에게 죄책감도 없었다. 거짓이 없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요하니까. - P190
"이 건물 말이에요. 꼭 노아의 방주처럼 생겼어요. 어릴 때오빠랑 교회를 다녔죠. 연변에도 정부에서 허락하는 교단이있어요. 모임을 할 때면 경찰이 들여다보곤 했지만 대놓고 막진 않았어요. 전도만 안 하면요. 그때 성경 공부 모임에서 목사님이 칠판에 노아의 방주를 그렸어요. 선택받은 자들만 탈 수있다고 했죠. 그날 밤 악몽을 꾸고 오줌을 쌌어요. 방주에 친구들이 다 올라탔는데 나만 계단에서 미끄러져 추락했거든요. 불어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다들 나를 보고 가만히 있었죠." ....." "건물을 보고 그때 생각이 났어요. 이 방주에 저는 탈 수 없으니까." "여기 이렇게 와 있잖아요?" "임시 입장권이죠. 나 같은 사람은 돈이 아니라 몸으로만살 수 있는 입장권. 그것도 이렇게 피를 흘려야 받을 수 있는누가 만져주는 손길이라도 받으려면 아파지는 게 제일 빠르더군요. 한국엔 병원이 많으니까." 석진이 유화를 바라보았다. - P201
"엄청 추울 때도 내 피는 따뜻하데요. 그게 흘러나오는 걸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어요. 죽어 있는 것 같은 순간에도내 심장이 열심히 뛰어서 온몸에 피를 보내고 있다는 게."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건가요?" "당신 헛기침 같은 거죠." - P202
"이 도시는 불길해요. 바다를 메꿔서 육지로 만들었다죠? 얼마나 많은것들이 죽었을까요?" - P204
먹고 싼다는 것, 그러니까 산다는 것의 맨얼굴을 수미는 견디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무대용 분장을 하고 살아서일까. - P216
"회당 8만 원짜리 레슨받고 2만 원짜리 샐러드에 요거트배달받고, 스크린 골프 깔짝대다 테니스가 유행하니 옷만 샀다 관두고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나 몰라. 안목도 없으면서인증샷 찍으러 공연장 몰려드는 것도 웃겨, 발레의 발 자도 모르면서 발레코어룩이나 입고 다니지. 올림머리 하고 타이츠신으면 다 발레리나인 줄 아나 봐." - P220
만일을 위해 제 이름으로 처방받은 약이 비타민 약통 안에 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량의 두 배를 삼키고 사각거리는 침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해야 할 일을 무사히 해냈다. 다음 날 아침 1층의 헬스장에서 공복 유산소를 마치고 온 수미와 한 번 더 몸을 섞었다. - P225
"시골 쥐들은 말이야, 항상 뭘 그렇게까지 하냐 싶을 만큼해야 해. 노력도, 연기도, 서울말도, 도시 쥐 비슷하게 보이려면." - P251
불을 품은 눈에 마스카라를 바르는 여자, 바다 건너 땅에서 홀로 얼어가는 여자, 연인의 칼을 먹고 제 속을 베는 여자, 유리 방주를 향해 헤엄쳐 가는 여자. 그녀가 곧 자신의 남은 수염을 밀어주러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석진은 그녀의칼날에 제 턱을 맡길 것이다. 여전히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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