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순간에 언어는 무용지물이었다.
눈물이 바로 그의 언어였다. 눈물에 자신의 문법과 구두점과 발음과 서사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눈물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읽어내지도 못했다.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물은 그순간 그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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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려서부터 잠자리 친구였다. 처음 만나자마자 같이 잤다. 처음 만난 날부터 아주 달콤한 잠을 잤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잠자리 기억이 너무나감미로워서 머릿속에 거대한 사탕수수밭이 자랐다.  - P25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는 삶이었다. 거짓말에 인이 박이다 보니 진실을 경계하게 되었다. 가장 어려운 건 자신을 속여 넘기는 일이었다. 자신도 믿을 수 있어야 완전한 사기극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P31

다. 그는 샤워를 할 때나 머리를 감을 때, 항상 가장 단순하고 향이없는 비누를 썼다. 데오도랑트나 향수, 스프레이, 로션 같은 건 없었다. 체취가 겸손하게 절을 했다. 그가 움직인 후에 이어지는 땀냄새는 죽림에 몸을 숨긴 그윽하고 조용한 나무 집 냄새였다. 그냄새를 맡고 또 맡은 그녀는 잠을 자고 싶어졌다. - P41

"거기 서서 그렇게 웃지만 말고 사실대로 말해 봐. 너희 집에거울이 없어서 도저히 내 모습을 볼 길이 없단 말이야. 네가 바로 내 거울이라고." - P41

매번 울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다른 몸에 들어가는 거였다. 그는 정액의 성분이 눈물이라서 분출해 내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분출하고 나면 울지 않아도 된다. - P73

거리의 누군가는 아코디언을 켜고, 또 누군가는창틀에 기대어 바이올린을 켰다. 밝고 경쾌한 음색이 가을의 맑고차가운 바람에 여과되어 들려오면 가슴에 시름이 쌓였다. 얼음이나 차가운 음료에 이별을 고하자 갑자기 위장이 소슬해지면서 뜨거운 핫초콜릿을 바라게 되었다. 레드 와인을 따서 한두 모금 입을 적시는 건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고,  - P74

 아이는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이 남자아이의 냄새가 무척이나 좋았다. 새하얀 와이셔츠 밑에서 옅은흙과 풀밭의 향기가 났다. 여자아이의 눈길이 남자아이의 팔꿈치에 멈췄다. 팔꿈치 주름에 흙이 숨겨져 있었다. 마치 지도 같았다.
대륙도 있고 바다도 있고 섬들도 있었다.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을 뻗어 가볍게 남자아이의 팔꿈치를 가볍게 어루만져 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눈이 빽빽했다. 여자아이는 눈을 비비면서 "잘 자." 하고 인사를 건네고는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남자아이의 잠은 연기였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정말로 잤다. 신속하게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침대 위에서 두 아이가 자는 장면은 너무나 조용했다. 감독은 하루종일 머리가 아팠는데, 매트리스 위에서 두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다 보니 갑자기 자신도 불을 끄고 자고 싶어졌다.  - P82

"안심 매트리스를 만나면 함께 좋은 꿈을 꾸게 됩니다. 하하하.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어린애가 야한 광고를 찍었대. 남자아이와 함께 침대에 올라갔다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말이야!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여기서 말하는 꿈은 춘몽(春夢)이래. 정말창피한 거잖아! 앞으로 누가 이런 애를 데려가겠어! 크크큭."
- P102

광고 속 여자아이는 진한 황금빛 꿀처럼 달콤한 잠을 자고 있었다. 광고 밖의 여자아이는 광고가 방영된 뒤로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침대에 누웠다하면 학교 아이들이 놀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목에 빨간 발진이번졌다. 엄마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 문에 자신의 사진이붙어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누군가 자기 얼굴에 검정 펜으로 괴상한 것을 그려놓았다. 당시 그녀는 그 어설픈 그림 속의 괴상한물체들이 남성의 성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건 왜 자신의 얼굴에만 그런 그림을 그리고 옆에 있는 남자아이의얼굴에는 아무것도 안 그리는가 하는 것이었다. 모두 그녀가 남자랑 같이 잔 게 구역질나고 변태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 P104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예쁜 여학생과 함께 자다니. 선생님이 너한테서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다."
남자 선생님은 몇 달치 월급을 모아 마침내 안심 매트리스를 샀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맞선을 봤지만 여전히 외로운 잠자리를 지켜야 했고 늙을 때까지 쉬 잠들지 못했다.
그 남자아이는 지금 파리 길거리에서 주워온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자고 있다. - P108

보니 적지 않은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상상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결말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할까. 왜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결말을 갈구할까. 사람들은 화해나 파국, 여행의 종점, 도로의 끝, 우기의 끝, 서설의 강림을 기대했다. 지금부터는 즐거움만 있거나 영원히 슬플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인생에선 원래 선명한 마침표가 없다. 종종 작별인사를 건넬 기회를 놓치고, 눈을뜨건 감건 영원히 못 보는 경우도 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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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윤석열은 제도만능주의를경계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 P26

국가는 추상적인 존재다. 정부도 그렇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정부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국가의 수준은 정부의 수준이 좌우하고, 정부의 수준은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의수준이 결정한다.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나라의 정부 수준은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자신이 어떤 수준이며 어떤 수준의 사람들을 정부에 기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윤석열은 정부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인간 윤석열 수준으로 내려앉는 중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사회의평판도 함께 녹아내린다. ‘모든 민주주의는 자기 수준에 맞는정부를 가진다. 지적 소유권이 누구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분명 옳은 말이다. - P26

아렌트는 그의 잘못이 ‘자기 머리로 사유하지 않은것‘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악을 행하는지 여부를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아렌트는 이것을
‘전적인 무능‘이라고 했다.
윤석열도 비속하다. 주체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법이 없다. 자기 객관화도 자기 성찰도 하지 않는다. 그저 본능과 욕망이 명하는 대로 한다. 그래서 자신의 언어가 없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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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자가 집권하면 제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선정을 펼 것이니 걱정할 일이 없다. 정치철학은 현자가 아니라 사악하거나 무능한 자가 권력을 쥘 때를 대비해 적절한 조언을 주어야 한다. - P22

포퍼는 올바른 질문을 제출했고 적절한 답도 내놓았다.
‘권력의 제한과 분산‘이었다.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막는 법치주의. 선출 공직자의 임기 제한, 삼권분립과 사법부의 독립, 언론· 표현. 집회·시위 등 시민의 기본권 보장 같은 것이다. 이런 제도는 사악하고 무능한 자가 권력을 차지해도 악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게 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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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력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다. 배꼽이 언제나 달려 있고, 귓불이 언제나 두 쪽인 것처럼 그 마음도 늘 거기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서울로 내달렸던 석진의마음은 욕망이라기보단 낭만이었다. 여기 아니면 어디라도 좋다는 마음. 그게 로맨티시즘의 기본 강령 아니었던가. - P107

"너 입에서 시궁창 냄새 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 그거 못 고치면 회원 다 떨어져 나갈걸? 좋은 말로 할 때 내과나 가봐." - P130

"아침에는 카페인, 오후에는 니코틴, 저녁에는 알코올, 밤에는 마약, 새벽에는 SNS, 다시 아침이 되면 커피. 저번에 당신도 커피프린스 보고 한국 왔다면서요."
"그러네요" - P156

"욕조가 빨갰어요. 엄마 팔 한쪽이 욕조 밖으로 나와 있었어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아, 남을 안 베려면 자기를 베면 되는구나 하고." - P169

내뱉는 동시에 석진은 그 말을 후회했다. 더럭 겁도 났다.
칼을 삼킬 정도로 무서울 게 없는 이 여자가 두려웠다. 수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들은 무서울게 없다고. 그래서 자기는 밑바닥 인생들이 제일 겁난다고 뜬금없이 조선족 여자를 데스크에 앉혀놓으면 환자들 반응이 어떨지 뻔했다. 무엇보다 그 데스크 대금을 치른 장모가 펄펄 뛸일이었다. - P169

묘한 몸이었다. 차고 뻣뻣한 몸피. 안쪽은 의외로 따뜻한물을 품은 여자였다. 하지만 석진의 몸은 이내 길을 잃고 허둥댔다. 에이스 이석진 원장이, 내시경 호스를 넣는 데 실패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뭔가가 팽팽하게 진입을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클라이밍 암장에 매달려 있을 때처럼 애를 쓰던 석진이결국 정상에 오르지 못한 채 떨어져 나갔다. 아랫도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침묵하던 유화의 입에서 갈라지는 목소리가흘러나왔다. - P175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생리적 욕구는 희박해졌지만 타인의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싶은 욕구는 더 강렬해져만 갔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타인의 몸과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섹스는 그 즐거움 때문에 치러야 하는 일종의 기회비용이었다. 주니와의 관계도 시작은 그랬다. 석진에게 죄책감도 없었다. 거짓이 없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요하니까.
- P190

"이 건물 말이에요. 꼭 노아의 방주처럼 생겼어요. 어릴 때오빠랑 교회를 다녔죠. 연변에도 정부에서 허락하는 교단이있어요. 모임을 할 때면 경찰이 들여다보곤 했지만 대놓고 막진 않았어요. 전도만 안 하면요. 그때 성경 공부 모임에서 목사님이 칠판에 노아의 방주를 그렸어요. 선택받은 자들만 탈 수있다고 했죠. 그날 밤 악몽을 꾸고 오줌을 쌌어요. 방주에 친구들이 다 올라탔는데 나만 계단에서 미끄러져 추락했거든요.
불어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다들 나를 보고 가만히 있었죠."
....."
"건물을 보고 그때 생각이 났어요. 이 방주에 저는 탈 수 없으니까."
"여기 이렇게 와 있잖아요?"
"임시 입장권이죠. 나 같은 사람은 돈이 아니라 몸으로만살 수 있는 입장권. 그것도 이렇게 피를 흘려야 받을 수 있는누가 만져주는 손길이라도 받으려면 아파지는 게 제일 빠르더군요. 한국엔 병원이 많으니까."
석진이 유화를 바라보았다. - P201

"엄청 추울 때도 내 피는 따뜻하데요. 그게 흘러나오는 걸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어요. 죽어 있는 것 같은 순간에도내 심장이 열심히 뛰어서 온몸에 피를 보내고 있다는 게."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건가요?"
"당신 헛기침 같은 거죠." - P202

"이 도시는 불길해요. 바다를 메꿔서 육지로 만들었다죠? 얼마나 많은것들이 죽었을까요?" - P204

먹고 싼다는 것, 그러니까 산다는 것의 맨얼굴을 수미는 견디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무대용 분장을 하고 살아서일까. - P216

"회당 8만 원짜리 레슨받고 2만 원짜리 샐러드에 요거트배달받고, 스크린 골프 깔짝대다 테니스가 유행하니 옷만 샀다 관두고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나 몰라. 안목도 없으면서인증샷 찍으러 공연장 몰려드는 것도 웃겨, 발레의 발 자도 모르면서 발레코어룩이나 입고 다니지. 올림머리 하고 타이츠신으면 다 발레리나인 줄 아나 봐." - P220

만일을 위해 제 이름으로 처방받은 약이 비타민 약통 안에 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량의 두 배를 삼키고 사각거리는 침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해야 할 일을 무사히 해냈다.
다음 날 아침 1층의 헬스장에서 공복 유산소를 마치고 온 수미와 한 번 더 몸을 섞었다.  - P225

"시골 쥐들은 말이야, 항상 뭘 그렇게까지 하냐 싶을 만큼해야 해. 노력도, 연기도, 서울말도, 도시 쥐 비슷하게 보이려면." - P251

불을 품은 눈에 마스카라를 바르는 여자, 바다 건너 땅에서 홀로 얼어가는 여자, 연인의 칼을 먹고 제 속을 베는 여자, 유리 방주를 향해 헤엄쳐 가는 여자. 그녀가 곧 자신의 남은 수염을 밀어주러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석진은 그녀의칼날에 제 턱을 맡길 것이다. 여전히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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