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정신과 의사들이랑 헤어지는 걸 무서워하더라고요. 난 안 무서워할래요. 왜냐하면 난 겁을 모르는 여자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눈물이 고인 눈으로 웃으며 돌아섰다. - P73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그들에게 묘한 연대감을 느꼈다. 가령 중년의 백인 게이 교수는 환자의 인종차별적발언으로 상처받은 내게, 동성애자를 모욕하는 말을 쏟아내던 환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때 어렴풋이 ‘이사람이 어쩌면 나를 이해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 P87

그 간극을 어떻게 하면 좁힐 수 있을까? 알코올중독을 앓는 노숙자가 병상에 누워있더라도 의사 출신 환자를 볼 때와 비슷한 크기로 공감하려면 말이다. 이제 막발을 내디딘 풋내기 정신과 의사에게 그 간극은 한없이깊고 멀게만 느껴졌다. - P98

‘이 상담실에서 한 발자국 나가면, 나는 그녀를 편견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나는 반 고흐의 작품 <신발>을 좋아한다.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Walk a mile in one‘s shoes)‘는 격언을떠올리게 해서다. 물론 누구도 (모든)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볼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구는 나에게 타인의 경험과 관점,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자경문과 같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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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매일같이 학대하고 해치려는 삼촌이 다칠까봐 걱정했다는 소년의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날 뻔했다. 진료를 마친 후, 트라우마 치료 전문 교수님에게 지도를 받으며 이 대목을 이야기하다가 나는 교수님 앞에서 끝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 P52

"좋았던 적이 한순간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그런데 딱한 번 생각나는 장면이 있어요. 삼촌이 목말을 태워줬을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 P53

"그때 이곳 사람들이 말해줬어요. 미움과 혐오는 사랑으로 지우는 거라고. 제 몸에 새긴 혐오의 문신을 사랑과 평화의 문신으로 덮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클리닉 식구들이 도와줬어요. 제가 문신 위에 새로운 문신을 새기도록요."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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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지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이 책이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다른 사람의 삶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노력으로 그 간극을 좁힐 수 있음을 알기에. - P14

급기야 목소리는 그녀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누군가가 네 딸을 해치려고 해. 아이를 지키려면 아이에게 정신과 약을 먹여. 지금 당장.‘
그리고 그녀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 P25

정신과 의사가 아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디 그녀의 아이가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주길 기도하는 것뿐이다. 또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엄마가 했던 실수는 너를 해치려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 P27

애도는 부정-분노-협상 - 우울-수용 순으로 이어지는 선형적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연구에서애도 반응은 순차적이거나 직선적이지 않으며 사람마다다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밝혀냈다.
상실을 경험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일련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뒤 결국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상실한대상과 관계를 재정립하며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볼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합된 애도(integrated grief) 단계로나아간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일부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못하고 지속적인 애도 반응을 보인다. 이를 연구자들은
"복합성 애도(complicated grief)‘ 또는 ‘지속적 애도 장애(prolonged grief disorder)‘라 부른다. ‘복합성‘은 상처가 났을 때 발생하는 ‘합병증(complication)‘에서 온 단어다. 즉 사별을 경험한 후 상실에 적응하는 것을 가로막는 생각,
감정, 행동들이 마치 상처 치유 과정을 방해하는 합병증과 같다는데서 연유한것이다 - P40

애도는 그렇게 새로운 나를 만나고 고인과 이전과다른 방식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이다. 비록 사랑하는사람을 잃었더라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며 세상은 충분히 가치 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애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고인을 떠나보내는 순간 ‘애도‘로 탈바꿈한다. 즉 애도는 상실 후 경험하는 사랑의 다른모습인 것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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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외삼촌이 화로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더이상 흘릴 눈물이 없어 울지 못하는 사람들과 울 만큼의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 P214

나는 지금까지 강가에 서서 흘러내려오는강물과 이미 흘러내려간 강물만 바라보다가 내 앞에 흐르는 강물을 지나쳐버리는 삶을 살아온 건 아닐까. 강이 수많은 지류와 만나듯, 사람도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나는 나와 인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오랫동안 세월의강물에서 느리게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랐다. - P249

어머니의 위로에 왈칵 눈물이 솟아올랐다. 나는 고개 숙여 입을 틀어막고 끅끅 소리를 내며 울었다. 이미 많이 울어서 더 울지 못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눈물이 터져 나올 만큼, 내 속에 이토록 많은 눈물이 채워져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겨우 울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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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일기는 1978년 10월 초에 끊어졌다가 이듬해 6월말부터 다시 이어졌다. 그사이에 첫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봉제공장 일을 그만뒀다. 서울에서 아버지는 딱히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시댁이 있는 대전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타향살이지만 함께 일하는 또래 직장동료들이 있었던 서울과 달리, 대전은 어머니와 아무런 연고가없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낯선 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P105

1979년 6월 25일 월요일
혜진이에겐 돈이 너무너무 귀하다. 난 지금 돈이 너무 없어서아기를 유산하고 직장에 다닐 생각까지 하고 있다. 돈이 없으니까 더욱더 괴롭고 쓸쓸하다. 아기를 가지니 시원한 과일이먹고 싶다. 살구와 복숭아가 먹고 싶다. 소고기 불고기도 먹고싶다. 배가 고픈데 집 안에 먹을 것이 없다. 하지만 돈이 없다.
그 사람한테도 돈이 없다. 먹고 싶은 게 많은데 돈이 없어서 너무슬프다. - P107

어머니는 늘 불안했던 거다.
자식에게 언제 다시 간장 비빈 밥만 먹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다. 일기를 노트북으로 옮겨 적는 내 손이 어머니를 향한 연민으로 떨렸다. - P110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아버지는 기분파였다. 마음보다 행동이늘 앞섰다. 바깥에선 인심이 좋아 주위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호인이었지만, 집 안에선 독불장군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좀이쑤셨던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늘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강으로바다로 떠돌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 P113

하지만 아기는 11월 11일 일요일, 병원에서 퇴원한 그날 저녁아홉 시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그렇게 죄가 많은 여자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눈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기는 지금 얼어붙은 땅속에서 얼마나 추울까. 가엾어라. 가엾어라. 아기야,
넌 지금 얼마나 춥겠니. 이 못난 엄마를 용서해줘. 엄마는 영원히 너를 기억하고 사랑할 거야. - P115

형을 임신했을 당시, 어머니는 불안한 미래와 생활고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른 임신부들처럼 먹고 싶은 음식을제대로 먹지 못했고, 몸이 불편한 와중에도 시어머니의 병시중까지 들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지못했다. 건강한 아이를 낳기에는 어머니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열악했다. 제왕절개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돈이 없어서 생명의위험을 무릅쓰고 자연분만을 해야 했고, 그렇게 낳은 아이를인큐베이터에 한번 넣어보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와 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봐야 했다. 당시 어머니의 참담한 심정은 일기에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P116

나는 이십 년 만에야 그때 어머니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알게됐다. 어린 나이에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한 남자를 만나 아무런 준비 없이 세 아이를 낳고 한 아이를 잃은 여자. 아무도 그녀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쳐야하는지 일러주지 않았다. 자식 양육에 필요한 인내심을 배우기에는 그 어떤 환경도 그녀를 받쳐주지 못했다.  - P136

어머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어머니가 살면서 오직 자신만을 위해 결정한 처음이자 마지막선택이었다. 온몸으로 새장과 부딪쳤던 어린 새는 죽음으로써새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노트북으로 어머니의 일기를옮긴 뒤 경선에게 이메일을 보내며, 어머니를 AI로 되살려 자살의 이유를 묻겠다던 내 계획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음을깨달았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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