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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평점 :
1921년 신유년 중숙은 딸 작희를 낳았다.
아들인 줄 알았는데 딸을 낳은 중숙을 보고
시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 아무렇게나
말성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지만
중숙은 딸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애를 잉태하여 열 달을 품고 살과 숨을 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바로 작희 이다.
作囍 지을 '작'에 쌍'희'자를 붙여
딸 아이가 이야기를 지으며 기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 이름을 지었다.
이 소설은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는 은섬이
큰아버지의 부탁으로 고택에서 발견한 자료에 있던
1930년대에 활동했던 소설가 오영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자필원고와 이작희라는 여성의 일기장을 통해
작가 이작희라는 존재와 쓰는 사람으로써 살고자 했던
그녀의 삶, 그리고 작품에 얽힌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담았다.
현재의 은섬과 과거의 중숙, 작희의 시점에서
소설이 진행되면서 '쓰는 여자'로 살고 있는 그녀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창작자로서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자 했던' 마음을
공감하고 담아냄으로써 시대와 편견에서 벗어나
창작자로서 최선을 다했던 시간을 전하고 있다.
소설 속 중숙과 작희는
일제시대의 배경을 살아가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교육이라는 기회를 진취적으로 얻어내고자 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쓰고 싶은' 욕구는
어미인 중숙 뿐 아니라 작희에게도 이어지는데,
모녀지간으로 또 작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료로 그녀들은
서로에게 무한한 힘과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시대가 그러하고 남성우월주의의 환경이 그러하듯
그녀들에게는 제약이 너무 많았다.
가부장적인 가정환경,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은
글을 쓰고 나아가려는 그녀들이
비뚤어진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름도 없는 작은 서포를 운영하며
글쓰는 사람들, 공부하고자 했던 이들에 대한
지원을 하고 글쓰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중숙과 작희에게는 완성하고 싶은
자신만의 작품이 있고, 그것을 언젠가는
세상에 내보내고 말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한 때는 사랑으로, 한 때는 동지로,
한 때는 도움으로 다가왔던 오영락의 등장은
중숙 뿐 아니라 작희의 인생을
순식간에 흔들어 놓는다.
작가이기 이전에 사람이었고, 여자였던 그녀에게
그와의 만남은 후회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가져오고 마는데,
오영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자필원고는
왜 잡지마다 한 장씩 붙어 있었는지
손이 망가져 글 조차 읽기 힘들정도로
엉망으로 쓰여진 이작희의 일기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그 시간을 쫓아가는 과정이
한 명의 여성으로써, 읽는 사람으로써
숨통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당시에 우리 말로
우리글을 쓰고 생각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던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어도 마찬가지였고
더더욱이 여성이었다면 시대와 성별의
편견에 모두 맞서야 했다는 점이
큰 어려움으로 와닿았을 것이다.
끝끝내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한 중숙과 작희,
작희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다가올 그 모든 현실 앞에서도
끝끝내 쓰는 사람으로서 남기를 선택했다.
그녀가 남긴 그 '쓰고자 했던 마음'은
변치않고 오늘날의 은섬, 경은, 윤희 등
쓰는 여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은섬이 이토록 작희에게 끌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흐르는 피에 담겨진
자연스런 흐름은 나이었을까,
쓰는 여자로 남고 싶은 그 욕망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시대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글을 쓰는 창작자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창작자,
끝끝내 쓰는 사람으로 남기를 선택한
작희의 인생에 박수를 보내며
읽는 사람으로써 이 작품을 최대한 만끽해 본다.
소설이지만, 마치 실제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에 검색창에 연신
'오영락' '이작희'를 검색해 본다.
소리없이 사라져갔을 수 많은 글들의 주인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글은 교유서가로 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