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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평점 :

학창 시절, 갑작스럽게 자유시간이 주어질 때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거나
선생님들께 이 '지루하고 졸린' 시간을 잊을 수 있는
얘기를 해달라며 조르곤 했다.
같이 노는 무리가 아니어도
"무서운 얘기 할 건데, 같이 얘기할 사람?" 하면
서로 손을 번쩍 들며 순식간에 원형으로 둘러앉아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얘기를 하며,
아이들의 반응을 이끌어 냈는데
그런 괴담들은 대체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혹은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과장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토요미스테리극장》, 《전설의 고향》 같은
괴담을 다룬 프로그램에 나왔던 이야기나,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은
귀에서 입으로 옮겨가며 때로는 더 날카롭게
때로는 더 매서운 이야기로 변하곤 했다.
이런 괴담을 나누며 아이들은 손을 꼭 잡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곤 했다.
마치 '함께 있다'는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처럼,
그렇게 손을 꽉 잡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아이들과도
공통분모가 생긴 것만 같았다.
괴담이라도 믿기 힘든 초자연적인 존재의
무서운 이야기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괴담 속에도 나름 서사가 있고
전개를 거쳐 결말에 다다르며,
때로는 무서운 존재에게 숨겨진 이야기는
슬픔이나 아련함으로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웃음이라는 반전을 가진 이야기로 펼쳐지기도 한다.
한국을 이끌어갈 젊은 작가이자,
장르문학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조예은 작가의 <트로피컬 나이트>는
섬뜩하지만 이런 따스한 총천연색의 마음이 담긴
알록달록한 괴담집이다.
자신만의 문체를 바탕으로
조예은의 세계관을 착실히 쌓아가는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는 무언가 께름직한 느낌이 드는
이야기로 시작을 연다.
짧은 단편으로 이어지는 소설들은
괴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은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담긴
또 그 속에서 서로를 향해 애쓰는 따스하면서도
말랑한 마음이 잔뜩 담겨있는
너무 새콤해서 쓴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머리를 찌르게 달콤한 젤리처럼 다가온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존재함'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된다.
갑자기 발생한 누군가의 부재를 알아차린다던가 <할로우키즈>
떠난 가족을 뒤로하고 홀로 남은 이의 지극한 외로움이
짙게 배어 나오기도 한다. <고기와 석류>
내가 누구라는 기억조차 없이 어느 '틈'에서 떨어진 이는
그곳에서 존재했던 자신을 찾아 헤매고, <릴리의 손>
부모의 기대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존재하고자 하는 몸부림도 있다. <새해엔 쿠스쿠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았던 이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문을 열며 달라지는 변화는 사실은 외면하고 싶었지만
누구보다 어울리고 싶었던 본격적인 그리움이기도 하다. <가장 작은 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존재로 하룻밤 꿈처럼 잊히다
한 사람에게 인식되기 시작하자 본분을 잊기도 하고,
<나쁜 꿈과 함께>
사라진 고양이를 찾아 헤매다 새로운 차원으로 떠나는
그의 역할과 존재를 인정하기도 한다. <유니버셜 캣숍의 비밀>
끝도 없이 문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평행세계에서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존재하는 이도 있다.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이처럼 각 소설은 희미해진 존재를 가진 이들이
자신이 '존재함'을 인정해 주는 타인과 마주하며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면서 마주하는
어떤 사랑 같은 감정을 그려낸다.
그 과정은 때로는 괴기스럽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하며, 의문투성이이기도 하지만
끝내 다다르는 결론은 각기 다른 색을 하고 있지만
따스한 마음이라는 한곳을 향한다.
작품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욕구 또한 이런 '존재함' 속에
담겨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되었다.
괴기적 하지만 결코 혐오스럽지 않은,
최후에는 따스함에 이르고 마는 여름밤의 괴담들.
조예은은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
결국 살아남은 따스함을 독자에게 전한다.
독자들은 이야기를 통해 잔뜩 움츠리다가도
이내 어깨를 펴고 그의 이야기 속에 빠지게 된다.
마치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며 체온을 공유했던
공통분모로 한껏 가까워졌던 친구들처럼 말이다.
이 작품들은 본격 조예은 월드의 시작이자 확장판으로,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세계관을 열어주는
마중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한여름밤의 더위를 잊게 할, 그렇지만 너무 차갑지만 않은
결국은 따뜻한 이야기.
새콤달콤한 젤리 같은 맛의 괴담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