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때가 오면 - 존엄사에 대한 스물세 번의 대화
다이앤 렘 지음, 황성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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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 혹은 존엄사라 불리기도 하는 이 제도는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환자 스스로가 가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찬반 논의가 뜨겁다.


사전 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힐 수 있는

법적 제도가 있지만

아직은 해외 일부 국가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조력존엄사는 아직까지도 도입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상태인데,

이 의료조력사망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실제 시행을 하고 있는 외국에서도 찬반 의견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의 차이, 종교적 신념을 비롯해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수많은 직업과 나이,

성별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이 의료 조력 사망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보내고 있다.


이 책은 존엄사에 대한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담긴 인터뷰를 묶어서 낸 책으로,

실제 어머니와 남편의 죽음을 겪은 후

말기 환자, 의사, 간호사, 윤리학자, 남겨진 이들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의료조력사망의 현실과 과정, 자격 조건,

승인받은 사람들에게 의료 조력 사망이 가지는 의미,

관련 의사들의 감정을 비롯해 남겨진 이들의

생각을 조명할 의도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도 작업되었고,

책을 통해서는 저자와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인터뷰를 정리함으로써

의료조력사망에 대해 제대로 알고,

또 이에 대하여 독자들도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1970년대에 비해서 기대수명이 늘어나며,

유병기한 또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전체 기대수명 중 병을 앓으며 보내는 기간은

남성이 19%(79.9년 중 14.8년),

여성이 22%(85.6년 중 19.0년)로

삶의 5분의 1가량은

아프고 병든 상태로 지내다가

수명을 다하게 되는 셈이라고 하는데,

이렇다 보니 질병으로 인해 가족이나 지인에게

폐를 끼치게 될까 두렵거나,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원한다는 의견도 많다.


본인 스스로 남은 여생을 잘 정리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웰다잉(Well-dying) 관점에서

유언이나 연명치료 결정 등에 대한

사전 준비에 대한 부분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나의 때가 오면》 은 이런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다양한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이나 연명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아직은 많다.

'안 좋은 상황을 미리 얘기할 필요가 있어?'

'죽음에 대해서 미리부터 생각하지 말자'

라든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고,

언제 어느 상황에서 내가 내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는 상태에서

미리 가족이나 지인 등과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있다가

나의 의지와 관계없는 연명치료나 사후의

어떤 처리에 대해서 결정이 된다면 그것 또한

나의 선택권에서 어긋나는 일일 수도 있겠다.


책에서 저자는 특정 의견이 맞다, 틀리다기보다는

양쪽의 의견을 모두 전달함으로써

이에 대한 독자 각자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제도화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의견들을 미리 예측해 보며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백세시대를 넘어 120세까지도 넘보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개인의 의견이 가진 힘이 점차 커지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선택권을

가져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삶의 마지막에 대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고 말이다.


실제 안락사로 마지막을 선택한 가족을 둔 이,

종교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반대하는 사람들,

혹은 장애 등이 있어서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 등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존엄사, 의료 조력 사망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죽음을 맞이한 이후 물질적인 처분에 대한 논의는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선택권에 대해서는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았다는 게

아쉽기도 했다.


어떤 사망 관련된 소식을 접하고

비로소 얕게나마 연명치료나 사망 이후 처리에

대한 얘기를 가족들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려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며

오히려 이런 얘기를 왜 진작 나누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곤 했는데,


'죽음'에 대한 초점보다는

'이 모든 것에 내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자유'라는

선택적인 측면에서 보다 생각하다 보니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의 생각도 읽어본 것이

오히려 나의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제도적으로 우리나라에도

의료 조력 사망이 도입되는 날이 있을 수 있겠다.

무엇이 맞고 틀린 것이 아닌,

이런 제도적 도입으로 인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의미를 알아가는 게 최우선의 과제가 아닌가 싶다.


"이 글은 문예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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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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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하루에도 수없이 열고 닫으며, 넘나들지만

그 의미와 문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세계,

초월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재뉴어리의 푸른 문》은

새로운 세상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문을 넘나들며

자신을 찾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라는

환상의 여정을 통해 '성장'이나 '가족'

또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책과 이야기, 글을 다룬

따뜻하면서도 환상적인 판타지 소설이다.


아마존 에디터가 뽑은 최고의 판타지 소설이자,

휴고상 네뷸러 상 로커스상

월드 판타지상 최종 후보작으로 올라

많은 이에게 찬사를 받은 작품으로

'먼저 나 자신에게 선물하고,

그다음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선물해야 할 책'으로

매혹적인 동화 같은 이야기가 한 권으로 펼쳐져 있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엄마를 잃고

아빠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재뉴어리.

아빠는 세계 각지를 돌며 보물을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재뉴어리는 W.C 로크 회사의 최고 경영자이자

고고학 협회 회장인 로크의 집에서 그의 지원을 받으며,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한번 발굴 작업을 하러 떠나면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타나는 아빠 앞에서

재뉴어리는 조금씩 소리 없이 성장해 나간다.

부족함 없는 지원을 받고 있지만

흑인도 백인도 아닌 남다른 피부색에

로크씨 밑에서 일하는 아빠의 상황 때문인지

로크씨가 요구하는 엄격한 생활 방식 속에서

저택에 갇혀 답답한 생활을 이어가는데,

어느 날 말을 잘 듣겠다고 약속한 후 떠났던

로크씨와의 여행에서 어린 재뉴어리는

'푸른 문'을 발견한다.

들판에 낡고 떨어진 형태만 남아있는 문을 보며

이 너머에 다른 세상에 펼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무심코 열어보는데,

문 너머에는 재뉴어리의 생각처럼

바다로 둘러싸인 높은 절벽이 위치해 있었고

문 바깥쪽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처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 자신을 찾는 로크씨의

목소리에 원래 세계로 돌아온 그녀는

'다른 세상과 이어지는 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런 '문'에 대한 모험을 꿈꾸게 된다.


발굴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주기가

점점 길어지던 아빠는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로크씨는 '아빠가 죽었다'라는 소식을 전하지만

재뉴어리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때 마침 발견하게 된 오래된 책

(제대로 제본되어 있지 않은)

〈일만개의 문〉을 읽다가

어린 재뉴어리도 직접 본 적이 있었던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문,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연결되는 새로운 세상과

관련된 진실들을 알게 되는데...


재뉴어리는 문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을까?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녀와 아빠를 돌봐준 로크씨와 로크하우스에

숨겨진 비밀을 무엇일까?


소설 속에서 재뉴어리의 시선을 따라 함께

모험을 하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일만개의 문〉을 읽어가며 마주하는 모험은

상상하고 그려왔던 그 이상의 모습으로

굉장히 환상적이면서도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 소녀 같았던 재뉴어리가 자라면서

또 여러 문을 거치고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고

또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끝내 헤쳐나가는 모습은

그 어떤 성장소설보다도 힘을 주고 있었다.


특히나 세계와 세계의 경계에 있는

'문'을 열고 닫는 것이 그녀의 '쓰기'와 연결되면서

풀어나가지는 모습은 마치 '열고 닫히는 문'이 아닌

창조자로써 어떤 것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비유하는 것만 같아서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끝없는 모험 이후에 마주한 평온한 일상 앞에서도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위해

다시금 모험을 떠나는 재뉴어리의 모습을 보며

엄마 아빠를 그대로 닮은 용기에 응원하게 됐다.


아버지가 남겼던 것처럼 재뉴어리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냄으로써

새로운 히스토리의 산증인이자 역사 그 자체가 되는

그 자유로움의 시작과 끝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글을 쓰자 열린 문,

거침없이 그 열린 문으로 자신을 던지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도전이나 성장을 앞두고

머뭇거리게 되는 마음이 조금은 전보다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어떤 얘기를 써서 어떤 문을

나에게 열어줄 수 있을까?

내가 열 수 있는 문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까?

《재뉴어리의 푸른 문》을 읽으며

잊고 있던 동화 같은 판타지, 잊고 있던 마음속 열정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 글은 밝은세상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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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심 -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경이의 순간은 어떻게 내 삶을 일으키고 지탱해주는가
대커 켈트너 지음, 이한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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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일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라는

다섯 감정의 이야기를 다룬

<인사이드 아웃>이 본편의 인기와 더불어

9년 만에 새 시리즈로 찾아왔다.

주인공 라일리가 사춘기를 맞이하며

낯선 감정인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가

본부에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속편은 전편의 인기를 넘어 누적 관객 570만을

돌파하며 기록을 세우고 있다.


영화의 전편을 통해서는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감정에 대한 소개와

주인공인 라일리의 나이에 맞게

아이의 입장에서 마주치는 변화 앞에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에 개봉한 후속편은 라일리의 사춘기와 함께

찾아온 낯선 감정들에 대해서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으로 되어있었다.


내가 품고 있지만, 감정에 대해서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기쁘고 슬픈, 화나고 버럭 하고 소심한

쉽게 겉으로 보이고 표현할 수 있는 감정도 있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위에서 소개한

딱 다섯 개로 표현할 수 없듯이

다양한 갈래를 타고 샘솟아나는

새로운 감정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 혹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

'느낌적인 느낌'으로 뭉뚱그려지는 감정을

인간 정서 연구의 대가이자

우리가 본 영화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와

〈소울〉의 자문을 한 대커 켈트너가

'경외심'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내리며 소개했다.


가까운 이의 탄생이나 죽음,

웅장한 음악이나 거대한 대자연의 광경 앞에서,

함께 열광하는 공연장이나 스포츠 경기장에서

느끼는 어떤 감정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이런

경이의 순간을 작가는 '경외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지탱해 주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투병을 하다가 떠난 동생의 죽음을 보며

느꼈던 최초의 경외심을 얘기한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나 혹은 새 생명의 탄생을 보며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벅참과 새로운 시선,

전과 현실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변화를 느끼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경외심은 부유함이나

어떤 물질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경이를 느낄 수 있고,

이 경외심을 느끼고 알아차리게 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고 하고 있다.


책에서 언급한 여덟 가지 경이의 순간은 다음과 같다.

"정리하자면 심적인 아름다움, 집단 열광, 대자연,

음악, 시각디자인, 영성과 종교, 삶과 죽음

그리고 통찰까지, 이상 삶의 여덟 가지 경이에서

우리는 경외심을 찾을 수 있다."


경외심은 각기 하나의 존재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분리된 '나 혼자'라는 개념이 아닌

모든 것을 초월한 서로 상호의존적인 연결망

속에 있는 것을 깨닫게 하고,

경외심이라는 감정을 통해 서로가 연결됨으로써

받게 되는 힘이나 변화를 얘기하고 있다.


미처 알지 못했던,

혹은 알았어도 크게 느끼지 못했던

이 감정의 정의가 '경외심'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낯설게만 생각했던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에 대해

오랜 통찰을 바탕으로 정리한 저자의 이야기는

정의 내릴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물음표가 많았던 이들에게 감정의 느낌표를

세워주는 그런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심리학을 전공한 작가의 특성상

학문론적인 이야기나 감정에 대한 설명이

다소 어려울 수도 있지만

경이를 느끼는 여덟 가지 순간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작가 자신의 이야기는

보다 감정에 대한 자세한 포인트로 다가오기도 했다.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쉽게 정의 내리고 설명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감정 외에 '설명할 수 없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영 불편할 때가 많았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기쁨, 슬픔, 불안 등과는

결이 다른 느낌인데, 이걸 무어라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 같아서

후련한 기분이 들었던 시간이었다.


우리가 경외심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일상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놓치고 있는 감정의 순간들을 잊지 않고

발견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를 보면서

새로이 등장한 낯선 감정들과 더불어

언젠가는 라일리에게도 찾아올

경이라는 감정이 등장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살면서 마주하는 가장 깊이 있는 경험,

표현할 수 없는 그 벅찬 감정을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는

어떻게 풀어나갈지도 기대된다.


"이 글은 위즈덤하우스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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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히토리 1% 부자의 대화법 - 부자는 어떻게 말하는가
사이토 히토리 지음, 김은선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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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라하는 기업의 대표나 자산가를 비롯해

각 분야에서 손에 꼽히는 성공한 사람들에게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

그들이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이 그들을

지금의 성공에 다가가게 했는데

그들만의 특별한 기술이나 마음가짐,

세세하게는 인간관계나 대화법 등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다.


요즘은 개인 자체로도 콘텐츠가 되는 시대이기에

경제지나 기사 등을 통해서 접하던

그들의 성공담은 이제 기사가 아니더라도

개인 SNS 채널이라든가 아니면 그들이 쓴

책을 통해서도 만나볼 수가 있는데

그렇게 알게 된 성공한 이들의 비결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평범한 것들이라

'이게 정말 성공으로 이끄는 비밀이라고?'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단순하지만 큰 힘을 가진 그들만의 비결을

실제로 실천하는 이들이 몇 없다는 것은

모두가 성공하거나 부자가 아니라는 데서

반증이 되기도 하는데


이번에 읽게 된 《1% 부자의 대화법》은

일본 납세 1위 대부호인 사이토 히토리가

일생 동안 터득한 성공 에너지를 높이는

자신만의 말 습관(듣고 말하는 방법)에 대하여

기술한 책으로, 출간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사이토 히토리는 ‘긴자마루칸’을 설립한 사업가로

1993년부터 12년간 일본 고액 납세자 순위

10위 안에 매년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로,

2003년에는 누적 납세액 일본 1위,

2006년까지 총 173억 엔이라는

전대미문의 납세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납세 상위권 인물의 경우 토지 매각이나 주식 공개

등에 따른 고액 납세자가 대부분인데

전액 사업소득에 의한 납세라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이번에 나온 《1% 부자의 대화법》외에도

《부자의 그릇》, 《부자의 운》, 《부자의 인간관계》 등

다양한 저서를 통해서도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사이토 히토리의 이번 책은

저자의 인생 경험을 소개한 것으로

어떤 원론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히토리식 방법이 괜찮네!'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권하고 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타인과의 교류 없이는

성립하지 않듯이 행복과 성공의 열쇠가 모두

'사람'이 쥐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히토리는 이런 인간관계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대화'라고 생각한다.

듣고 말하는 태도에서 묻어나는 매력은

빛이 나기 마련이고, 저자는 이 매력을

성공의 포인트로써 자신의 사고방식을 대화법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 속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인데

말을 들을 때나 말을 할 때도 사랑을 품고

상대와 마주하면 인간관계에서 헤맬 일이 없다고 하며

저자는 '사랑을 품고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사랑을 바탕으로

듣고 말하는 방법, 경청이 가져오는 힘을 비롯해

자기 자신과의 대화 및 사소한 말 습관까지

대화와 관련된 저자의 방식들을 전하고 있다.


사랑을 가지고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리액션을 하고

그렇다고 과한 표현이 아닌 작은 배려와

고민에 마주했을 때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가는 등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는

대단한 기술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 더욱 컸다.


긍정적인 생각과 더불어

타인에게만 맞추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은

꼭 성공이나 부를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매력적인 사람이 하는 말에는 더욱 집중하게 되고,

긍정적인 리액션이 나오며 진심으로 다가가게 된다.


외모적인 매력이 아니라 단정하고 깔끔한 매무새의

'정갈함'에 사람을 흐뭇하게 하는 '배려심'을 더해

더욱 좋은 기운을 상승하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변화가 아닐까 싶다.


사이토 히토리 같은 '매력 일류'는

결코 어렵고 복잡한 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매력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듣고 말하는 대화의 과정에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저자는 자신만의 대화법을 책을 통해 강조하고 있었다.


함께 있으면 편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매력적인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성공이나 부자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관계에서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사랑받고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누구나 읽어도 좋을 그런 책이었다.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얘기하고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대화의 양상은 달라진다.

내가 하고 있는 대화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었는지 돌아보며, 매력적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매경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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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너무해 - 원 없이, 사정없이, 아낌없이 사계절 시리즈
조서형 지음 / 북스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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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에 대한 단상은 여러 추억들과 함께

각양각색으로 물들어져 있다.

한 해가 가고 다시 돌아오는 계절 앞에서

살아온 시간 동안 쌓아온 추억은

그 계절의 날씨처럼 반사적으로

몸과 마음에 새겨져 떠오르곤 한다.


나에게 여름은 초등학생 시절 무료하고 지루했던

그러면서도 이것저것 하려고 했었던

여름방학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기록적 폭염으로 남겨져있는 1994년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특별히 더웠던 기억이 없는걸 보면

우리들을 위해 최대한 애써 준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을 수도

혹은 '원래 여름은 더운 거니까' 하며

더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놀던 어린아이만의

천진난만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바쁜 학원 일정에

아이들은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또 긴 휴가를 잡고 멀리 한 달 살기를 하러

여행을 가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학원 고작해야 한두 개.

그나마도 '너무 더우니까 아침 일찍 다녀와'라는

엄마의 조언대로 오전 9시 10시

날씨가 뜨거워지기 전에

그날의 유일한 미션을 해치우고 나서는

텅 빈 집안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언니, 동생과 함께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기도 하고

뜨거운 햇빛을 이용해 돋보기로 신문지 태우기,

어떤 날은 욕조에 차가운 물을 받아

워터파크에 간 듯 대야를 타고 놀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올림픽'을 하자면서

갖은 몸짓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종일 놀아도 끝나지 않던 하루

오늘은 일기에 무얼 적어야 할지

비슷비슷한 하루에서 그날의 키포인트가 되는

사건을 꼽아서 적었던 날들이었다.


무료하고 지루하던, 심심하고 대수롭지 않던

그때의 일상들이 왜 여름만 되면 떠오르는지,

대충 물에 말아서 오이지에 먹던 집밥,

아이스크림을 사면 다 먹기 전에도

손등까지 주르륵 흐르던 뜨거운 날씨,

그래도 함께 '오늘은 뭐 할까?'를 고민하며

하루를 채워가던 시간들이 제법 즐거웠었나 보다.


여름의 기억을 담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듯

계절의 추억을 잔뜩 머금은

북스톤의 사계절 에세이인 여름편이 출간되었다.

뜨거운 여름에 태어나,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부터

땀띠를 가지고 태어났던 아이.

한여름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해 아쉬워했던,

여름을 너무 좋아했던 작가는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뜨겁게 불태웠던

자신의 10대, 20대를 돌아보며

그때의 추억들을 한 권의 책으로 완성했다

《여름이 너무해》가 바로 그 이야기이다.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교환학생을,

베트남 하노이에서 인턴을 비롯해

과테말라와 멕시코를 거쳐 일본 도쿄까지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인생의 굳은살을 쌓아온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녹여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이번 책에서는 그녀가 10~20대를 보내며 맞이했던

뜨거운 여름의 순간들이 가득 녹아 있었다.


나서서 하지 않을 고생길을 걸었던 작가의 모험담을

읽고 있자니 똑같이 주어지는 인생시계를

나는 너무 평탄하고 안전하게만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먹은 대로 결심한 대로 자신의 거처를

세계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며 매일의 행복을

채워가는 이야기는 꼭 화려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장소가 아니어도

지금 있는 이곳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채워가는

작가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좋아하는 것을 자신에게 기꺼이 제공하려는 노력!

과연 나는 나 자신에게 얼마나 그렇게 하고 있나?

라는 질문을 해보면 손을 꽉 쥐면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렇게 스르륵 빠져나가는 시간이었다.


돈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리는 대로,

자전거를 타다가 다치면 다시 또 일어나는 대로

카우치서핑과 웜샤워 등 커뮤니티를 통해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과 도움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 역시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며

뜨거운 여름 속에서 자신만의 페달을 굴리며

앞으로 또 행복을 위해 달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보이고 건강해 보였다.


굳이 계절을 따지자면

여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나에게는

정 반대의 온도로 다가온 이야기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한 여름의 뜨거운 온기를 그대로 머금은

열정 가득한 작가의 온도가

이만큼 전해졌던 그런 에세이였다.


"이 글은 북스톤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

내가 나고 자란 남도의 여름은 덥고 습해 조금만 뛰어놀아도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여름이 좋았다. 여름을 기다리는 것도, 여름이 되는 것도, 여름을 추억하는 것도 좋았다. 엄마는 나를 여름에 낳았고, 나는 여름에 엄마 배 속에서 나왔으니까. 여름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여름은 매사 시큰둥한 나도 뜨겁게 했다.

하노이의 여름은 오토바이와 잘 어울린다. 신호에 걸려 멈출 때면 앞차에서 나오는 열기와 여름의 폭염, 아스팔트가 뱉어낸 복사열이 한데 뒤섞였다. 그때의 아찔하고 몽롱한 기분이 나는 좋았다.

하노이에서 지내며 나는 매일 나와 싸웠다. 어제의 나를 이기고, 약한 소리를 하는 나를 부수고, 쉬려고 하는 나를 때려눕힌 다음 승자의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일거리가 늘어날 때면 곳간에 쌓인 쌀가마니를 세는 부자처럼 뿌듯했다. 쌓이는 돈은 별 볼 일 없었지만, 그런 건 괜찮았다. 하노이에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더없이 행복한 1년이었다.

유난히 긴 겨울을 지내야 하는 핀란드 사람에게 여름은 1년을 버티게 하는 너무나 소중한 계절이다. 일주일의 휴가를 내고 그 시간을 통째로 내게 탐페레를 보여주는 데 할애한 헤나 덕에 나는 여전히 핀란드를 몇 가지 방법으로 생생하게 감각한다. 살미아키의 텁텁함, 무스타마카라의 기묘한 비주얼, 사우나가 주는 위안 같은 것을 통해 말이다.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바보 같은 실수로 여행의 시작과 동시에 가진 돈을 잃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밥 한 끼 먹을 돈도 없고, 변변한 옷도 없어 아침저녁으로 오들오들 떨었으며, 잘 곳도 마땅찮아 매일 다른 호스트를 찾아야 했다. 그래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생각해보면 별일도 아니었다. 전쟁통에 혼자 카메라를 들고 취재를 나온 것도, 악어 떼가 숨어 있는 강을 맨몸으로 건너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물 두 살에서 스물 세 살로 넘어가는 청년이 조금 부족한 돈으로 북유럽을 여행하려는 것뿐이었다. 돈도 아깝고 잃어버린 기회도 속상했지만, 그런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기에 핀란드의 여름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무슨 일이 있을 때면, 그래서 내가 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흘기게 될 때면, 지금도 연자 할머니가 내게 속이 깊다고 했던 얘기를 떠올린다. 내 자존감은 나약해 빠져서 매사에 오락가락하지만, 할머니가 날 괜찮은 사람이라 해준 말만큼은 확실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못미덥지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은 믿는다.

할머니 집들을 오가는 동안 나는 이렇게 자랐다. 욕심나는 일에는 욕심을 내고, 공평하게 상냥하고 다정하려고 노력한다. 속 깊은 아이 출신으로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멀리, 크게 보려 한다. 물론 아직도 그 둘의 타이밍을 못 맞춰 당당해도 되는 때 찌질하게 수그리거나, 자제해야 할 때 나대버리는 때가 더 많다. 할머니 얘기를 내 삶에 투영하고 반영하는 과정에서 따르는 나름의 시행착오려니 한다. 내가 그 무렵의 할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인생의 진리를 들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윤지_ 아, 행복해.
서형_ 나도. 근데 무서워, 헐. 너무 행복해서 나 지금 무서워, 윤지야.
윤지_ 그럼? 안 행복하고 싶어?
서형_이렇게까지 행복한 거는 원하지 않아. 이것보다는 좀더 사그라진, 김빠진 행복을 원해.
윤지_신기하네. 이상하고.
서형_내가 행봅을 제 발로 걷어차는 실수를 또 할까봐. 그런 짓을 저지르기 전에 행복이 알아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 잘못이 아니잖아. 나는 왜 이렇게 좋은 날 불안할까? 힘들게 일할 때가 아니면 다 불안해. 이렇게까지 매일 불안해하면서 일하는데 사는 게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 게 신기해.

영원한 건 없다. 엊그제 꽃을 피운 나무는 오늘 푸른 이파리를 내밀고, 또 가을이 오면 그걸 다른 색으로 문들여 보여줄 거다. 기쁨은 흩어지고 슬픔은 옅어진다. 돈과 일은 있다가도 없다. 인간은 더하다. 새로운 세포가 원래 있던 세포를 매 순간 대체한다. 인간은 성격이나 외모가 조금씩 계속해서 달라지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예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고 한 달 전의 내가 아니며 1년 전의 나는 더욱이 아니다.

여행지에 가면 낯설지 않은 게 없다. 말도 어색하고 길도 어렵다. 어디에 가서 뭘 주문해야 뜨끈한 국물을 먹을 수 있는지, 가볍고 큰 용량의 물통은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나무 숲을 따라 걷고 싶을 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 궁금한 것 투성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을 때,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게 많을 때 여행자는 자신감을 잃는다. 그럴 때 현지에 있는 친구는 언제나 큰 도움이 된다. 웜샤워를 통해 구한 방은 반들반들한 호텔보다, 호텔만큼 쾌적한 에어비앤비보다 더 가깝고 따뜻한 방이 된다.

계속 여행자로 살고 싶었다. 나는 여행할 때 가장 편견이 없고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적극적이었다. ‘내가 언제 또 이런 걸 해보겠어‘의 마음가짐은 선택을 미루지 않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반면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에는 욕심내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일단 챙기는 것들은 배낭에 들어가면 모두 짐이 될 뿐이었다. 내가 준 마음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의심하지 않았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다시 만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지금 내가 고맙고 행복하다면 아낌없이 표현했다. 계산만큼 쓸모없는 일이 없었다. 여행을 계속할 수는 없다. 여행자가 아닌 채로 살려니 괴로웠다. 여행자를 초대하는 동안엔 일상을 살면서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선 그 누구도 2회차의 삶을 살 수 없다. 대신 눈을 조금만 돌리면 다른 생을 경험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급할 게 하나도 없다.

삶은 다르다. 누가 알려줘도 의심하고 스스로 결정하고도 의심한다. 20대 초반에 내내 하고 싶은 일은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토라진 단짝 친구처럼 등을 돌렸다. 그때마다 하는 수 없이 신입이 되었다.

열심히 살고 싶지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아르바이트에 기댔다. 성인이 되니 정해진 시험 범위도, 선생님이 지정해주는 문제집도 없었다. 어디에 열과 성을 쏟아야할지 모르는 채로 청춘은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몸 둘 바를 몰랐다. 특별한 능력도 없이 세상에 나온 내게 아르바이트는 어딘가에 힘을 보탤 기회가 되었다.

여름은 늘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길어지는 해가, 짧은 바지에 드러나는 맨살이, 아빠의 긴 휴가가, 우거진 숲과 시끄러운 풀벌레 소리가, 볕의 향을 품고 마르는 빨래가 좋았다. 집밖에 나가는 걸 망설이지 않아도 되며, 뒤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나갈 수 있어 좋았다. 그러니 여름이 덥고 괴로워도 별 수 없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가며 또다시 나아갈 수밖에.

그간의 여름들엔 무모했다. 어느 것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10대 내내 한결같이 꿈꿨던, 외국에서의 삶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저 허송세월한 거다. 돌아볼 일 없던 허송세월의 긴 역사를 쭉 늘어놓고 바라보았다. 나는 20대를 온통 허비해 10대의 업보를 청산한 셈이었다. 허덕이며 땀을 쭉 뺐다. 그러고 나니 개운했다. 속이 다 시원했다.

잘하는 건 재능이고, 그냥 하는 건 압도적 재능이라고 한다. 허우적댁 시간이 길고 여전히 실수가 잦지만, 지금 와서 어쩌겠는가. 그냥 하던 대로 해야지. 이번에 못한 건 다음에 고쳐서 더 잘하는 수밖에. 재능을 가지고 시작하지 못했으니 압도적 재능이라도 노려보는 거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번 생은 꼬박 나로 살아야 한다. 할 수 있는 경험보다 그렇지 않은 게 많고,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훨씬 많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낯설고 모르는 것에 설레는 내가 아는 방법은 이뿐이었다. 아는 것 밖의 세계와 무의미한 시간을 땀흘려 건너가는 것.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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