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너무해 - 원 없이, 사정없이, 아낌없이 사계절 시리즈
조서형 지음 / 북스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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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에 대한 단상은 여러 추억들과 함께

각양각색으로 물들어져 있다.

한 해가 가고 다시 돌아오는 계절 앞에서

살아온 시간 동안 쌓아온 추억은

그 계절의 날씨처럼 반사적으로

몸과 마음에 새겨져 떠오르곤 한다.


나에게 여름은 초등학생 시절 무료하고 지루했던

그러면서도 이것저것 하려고 했었던

여름방학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기록적 폭염으로 남겨져있는 1994년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특별히 더웠던 기억이 없는걸 보면

우리들을 위해 최대한 애써 준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을 수도

혹은 '원래 여름은 더운 거니까' 하며

더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놀던 어린아이만의

천진난만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바쁜 학원 일정에

아이들은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또 긴 휴가를 잡고 멀리 한 달 살기를 하러

여행을 가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학원 고작해야 한두 개.

그나마도 '너무 더우니까 아침 일찍 다녀와'라는

엄마의 조언대로 오전 9시 10시

날씨가 뜨거워지기 전에

그날의 유일한 미션을 해치우고 나서는

텅 빈 집안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언니, 동생과 함께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기도 하고

뜨거운 햇빛을 이용해 돋보기로 신문지 태우기,

어떤 날은 욕조에 차가운 물을 받아

워터파크에 간 듯 대야를 타고 놀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올림픽'을 하자면서

갖은 몸짓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종일 놀아도 끝나지 않던 하루

오늘은 일기에 무얼 적어야 할지

비슷비슷한 하루에서 그날의 키포인트가 되는

사건을 꼽아서 적었던 날들이었다.


무료하고 지루하던, 심심하고 대수롭지 않던

그때의 일상들이 왜 여름만 되면 떠오르는지,

대충 물에 말아서 오이지에 먹던 집밥,

아이스크림을 사면 다 먹기 전에도

손등까지 주르륵 흐르던 뜨거운 날씨,

그래도 함께 '오늘은 뭐 할까?'를 고민하며

하루를 채워가던 시간들이 제법 즐거웠었나 보다.


여름의 기억을 담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듯

계절의 추억을 잔뜩 머금은

북스톤의 사계절 에세이인 여름편이 출간되었다.

뜨거운 여름에 태어나,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부터

땀띠를 가지고 태어났던 아이.

한여름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해 아쉬워했던,

여름을 너무 좋아했던 작가는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뜨겁게 불태웠던

자신의 10대, 20대를 돌아보며

그때의 추억들을 한 권의 책으로 완성했다

《여름이 너무해》가 바로 그 이야기이다.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교환학생을,

베트남 하노이에서 인턴을 비롯해

과테말라와 멕시코를 거쳐 일본 도쿄까지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인생의 굳은살을 쌓아온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녹여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이번 책에서는 그녀가 10~20대를 보내며 맞이했던

뜨거운 여름의 순간들이 가득 녹아 있었다.


나서서 하지 않을 고생길을 걸었던 작가의 모험담을

읽고 있자니 똑같이 주어지는 인생시계를

나는 너무 평탄하고 안전하게만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먹은 대로 결심한 대로 자신의 거처를

세계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며 매일의 행복을

채워가는 이야기는 꼭 화려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장소가 아니어도

지금 있는 이곳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채워가는

작가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좋아하는 것을 자신에게 기꺼이 제공하려는 노력!

과연 나는 나 자신에게 얼마나 그렇게 하고 있나?

라는 질문을 해보면 손을 꽉 쥐면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렇게 스르륵 빠져나가는 시간이었다.


돈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리는 대로,

자전거를 타다가 다치면 다시 또 일어나는 대로

카우치서핑과 웜샤워 등 커뮤니티를 통해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과 도움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 역시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며

뜨거운 여름 속에서 자신만의 페달을 굴리며

앞으로 또 행복을 위해 달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보이고 건강해 보였다.


굳이 계절을 따지자면

여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나에게는

정 반대의 온도로 다가온 이야기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한 여름의 뜨거운 온기를 그대로 머금은

열정 가득한 작가의 온도가

이만큼 전해졌던 그런 에세이였다.


"이 글은 북스톤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

내가 나고 자란 남도의 여름은 덥고 습해 조금만 뛰어놀아도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여름이 좋았다. 여름을 기다리는 것도, 여름이 되는 것도, 여름을 추억하는 것도 좋았다. 엄마는 나를 여름에 낳았고, 나는 여름에 엄마 배 속에서 나왔으니까. 여름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여름은 매사 시큰둥한 나도 뜨겁게 했다.

하노이의 여름은 오토바이와 잘 어울린다. 신호에 걸려 멈출 때면 앞차에서 나오는 열기와 여름의 폭염, 아스팔트가 뱉어낸 복사열이 한데 뒤섞였다. 그때의 아찔하고 몽롱한 기분이 나는 좋았다.

하노이에서 지내며 나는 매일 나와 싸웠다. 어제의 나를 이기고, 약한 소리를 하는 나를 부수고, 쉬려고 하는 나를 때려눕힌 다음 승자의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일거리가 늘어날 때면 곳간에 쌓인 쌀가마니를 세는 부자처럼 뿌듯했다. 쌓이는 돈은 별 볼 일 없었지만, 그런 건 괜찮았다. 하노이에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더없이 행복한 1년이었다.

유난히 긴 겨울을 지내야 하는 핀란드 사람에게 여름은 1년을 버티게 하는 너무나 소중한 계절이다. 일주일의 휴가를 내고 그 시간을 통째로 내게 탐페레를 보여주는 데 할애한 헤나 덕에 나는 여전히 핀란드를 몇 가지 방법으로 생생하게 감각한다. 살미아키의 텁텁함, 무스타마카라의 기묘한 비주얼, 사우나가 주는 위안 같은 것을 통해 말이다.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바보 같은 실수로 여행의 시작과 동시에 가진 돈을 잃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밥 한 끼 먹을 돈도 없고, 변변한 옷도 없어 아침저녁으로 오들오들 떨었으며, 잘 곳도 마땅찮아 매일 다른 호스트를 찾아야 했다. 그래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생각해보면 별일도 아니었다. 전쟁통에 혼자 카메라를 들고 취재를 나온 것도, 악어 떼가 숨어 있는 강을 맨몸으로 건너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물 두 살에서 스물 세 살로 넘어가는 청년이 조금 부족한 돈으로 북유럽을 여행하려는 것뿐이었다. 돈도 아깝고 잃어버린 기회도 속상했지만, 그런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기에 핀란드의 여름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무슨 일이 있을 때면, 그래서 내가 나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흘기게 될 때면, 지금도 연자 할머니가 내게 속이 깊다고 했던 얘기를 떠올린다. 내 자존감은 나약해 빠져서 매사에 오락가락하지만, 할머니가 날 괜찮은 사람이라 해준 말만큼은 확실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못미덥지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은 믿는다.

할머니 집들을 오가는 동안 나는 이렇게 자랐다. 욕심나는 일에는 욕심을 내고, 공평하게 상냥하고 다정하려고 노력한다. 속 깊은 아이 출신으로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멀리, 크게 보려 한다. 물론 아직도 그 둘의 타이밍을 못 맞춰 당당해도 되는 때 찌질하게 수그리거나, 자제해야 할 때 나대버리는 때가 더 많다. 할머니 얘기를 내 삶에 투영하고 반영하는 과정에서 따르는 나름의 시행착오려니 한다. 내가 그 무렵의 할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인생의 진리를 들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윤지_ 아, 행복해.
서형_ 나도. 근데 무서워, 헐. 너무 행복해서 나 지금 무서워, 윤지야.
윤지_ 그럼? 안 행복하고 싶어?
서형_이렇게까지 행복한 거는 원하지 않아. 이것보다는 좀더 사그라진, 김빠진 행복을 원해.
윤지_신기하네. 이상하고.
서형_내가 행봅을 제 발로 걷어차는 실수를 또 할까봐. 그런 짓을 저지르기 전에 행복이 알아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 잘못이 아니잖아. 나는 왜 이렇게 좋은 날 불안할까? 힘들게 일할 때가 아니면 다 불안해. 이렇게까지 매일 불안해하면서 일하는데 사는 게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 게 신기해.

영원한 건 없다. 엊그제 꽃을 피운 나무는 오늘 푸른 이파리를 내밀고, 또 가을이 오면 그걸 다른 색으로 문들여 보여줄 거다. 기쁨은 흩어지고 슬픔은 옅어진다. 돈과 일은 있다가도 없다. 인간은 더하다. 새로운 세포가 원래 있던 세포를 매 순간 대체한다. 인간은 성격이나 외모가 조금씩 계속해서 달라지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예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고 한 달 전의 내가 아니며 1년 전의 나는 더욱이 아니다.

여행지에 가면 낯설지 않은 게 없다. 말도 어색하고 길도 어렵다. 어디에 가서 뭘 주문해야 뜨끈한 국물을 먹을 수 있는지, 가볍고 큰 용량의 물통은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나무 숲을 따라 걷고 싶을 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 궁금한 것 투성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을 때,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게 많을 때 여행자는 자신감을 잃는다. 그럴 때 현지에 있는 친구는 언제나 큰 도움이 된다. 웜샤워를 통해 구한 방은 반들반들한 호텔보다, 호텔만큼 쾌적한 에어비앤비보다 더 가깝고 따뜻한 방이 된다.

계속 여행자로 살고 싶었다. 나는 여행할 때 가장 편견이 없고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적극적이었다. ‘내가 언제 또 이런 걸 해보겠어‘의 마음가짐은 선택을 미루지 않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반면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에는 욕심내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일단 챙기는 것들은 배낭에 들어가면 모두 짐이 될 뿐이었다. 내가 준 마음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의심하지 않았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다시 만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지금 내가 고맙고 행복하다면 아낌없이 표현했다. 계산만큼 쓸모없는 일이 없었다. 여행을 계속할 수는 없다. 여행자가 아닌 채로 살려니 괴로웠다. 여행자를 초대하는 동안엔 일상을 살면서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선 그 누구도 2회차의 삶을 살 수 없다. 대신 눈을 조금만 돌리면 다른 생을 경험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급할 게 하나도 없다.

삶은 다르다. 누가 알려줘도 의심하고 스스로 결정하고도 의심한다. 20대 초반에 내내 하고 싶은 일은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토라진 단짝 친구처럼 등을 돌렸다. 그때마다 하는 수 없이 신입이 되었다.

열심히 살고 싶지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아르바이트에 기댔다. 성인이 되니 정해진 시험 범위도, 선생님이 지정해주는 문제집도 없었다. 어디에 열과 성을 쏟아야할지 모르는 채로 청춘은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몸 둘 바를 몰랐다. 특별한 능력도 없이 세상에 나온 내게 아르바이트는 어딘가에 힘을 보탤 기회가 되었다.

여름은 늘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길어지는 해가, 짧은 바지에 드러나는 맨살이, 아빠의 긴 휴가가, 우거진 숲과 시끄러운 풀벌레 소리가, 볕의 향을 품고 마르는 빨래가 좋았다. 집밖에 나가는 걸 망설이지 않아도 되며, 뒤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나갈 수 있어 좋았다. 그러니 여름이 덥고 괴로워도 별 수 없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가며 또다시 나아갈 수밖에.

그간의 여름들엔 무모했다. 어느 것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10대 내내 한결같이 꿈꿨던, 외국에서의 삶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저 허송세월한 거다. 돌아볼 일 없던 허송세월의 긴 역사를 쭉 늘어놓고 바라보았다. 나는 20대를 온통 허비해 10대의 업보를 청산한 셈이었다. 허덕이며 땀을 쭉 뺐다. 그러고 나니 개운했다. 속이 다 시원했다.

잘하는 건 재능이고, 그냥 하는 건 압도적 재능이라고 한다. 허우적댁 시간이 길고 여전히 실수가 잦지만, 지금 와서 어쩌겠는가. 그냥 하던 대로 해야지. 이번에 못한 건 다음에 고쳐서 더 잘하는 수밖에. 재능을 가지고 시작하지 못했으니 압도적 재능이라도 노려보는 거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번 생은 꼬박 나로 살아야 한다. 할 수 있는 경험보다 그렇지 않은 게 많고,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훨씬 많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낯설고 모르는 것에 설레는 내가 아는 방법은 이뿐이었다. 아는 것 밖의 세계와 무의미한 시간을 땀흘려 건너가는 것.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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