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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씨의 포옹
정은혜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12월
평점 :

"이 글은 이야기장수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개교 3년 차 신생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일반 고등학교에 특수반(사랑반)을 설치해서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 통합교육을 실시했었다.
예체능 수업 시간에 한해 장애를 가진 친구들도
교실에서 동일한 수업을 받으며 또래들과 어울렸는데,
아마도 그때가 장애인과 어울린 최초의 기억인 것 같다.
몸이 불편한 지체장애나 발달장애, 다운증후군 등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친구들이 2명씩 한 반에 배치되어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꼭 같은 반이 아니어도 (인원수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등하교 때나 쉬는 시간 등 틈틈이 마주하는 이들을 통해
장애인과 어울리는 방법을 익히곤 했다.
수업을 앞두고 교실에 올라오는 사랑반 친구들을 위해
책상 자리를 비워둔다거나,
몸이 불편한 친구를 데리러 가는 일,
갑자기 불편함을 느끼고 돌발행동이 나타나도
당황하지 않고 이해하는 일은
그들이 결코 다르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모두 같은 학생으로서 누려야 할 학업에 대한 배려이자
이 사회를 살아가는 기본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교복을 입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똑같은 수업을 듣는
사랑반 아이들을 보며 기뻐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더러 이미 성인이 된 나이에 학교에 온 아이들도 있었다.
특수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수는 극히 일부니까)
자식을 생각하는 우리 부모님과 다르지 않은 사랑에
그들에 대해 적어도 여기에서만큼은 '다르게' 여기지
않아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사랑반 친구들은 '순수' 그 자체였다.
있는 그대로 반 친구들을 바라보고 좋아하며
감정 표현도 즉각적, 좋고 싫음이 분명한 표정까지.
누군가의 모습이나 조건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사춘기의 학생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포인트가 있었다.
내가 그런 모습을 보였던 건 언제였더라? 하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않는 한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순수한 사랑을 가진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어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다르다'라고 판단되며 배척되는 현실에서
한 번씩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게 된다.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며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데,
남들처럼 태어나 '평범'이라는 범주에 있다는 이유로
그들과 선을 그을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장애인이라고 하면 마주하기 불편하거나
무조건 양보해야 해서 내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모습이 낯설어서 무서워하는 이들도 있고,
그냥 그 자체로 싫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는 길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을 쉽게 볼 수 없는데,
장애인의 비율이 낮다기보다 그들이 나올 수 없는
환경임을 알고 나면 그 진실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그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얼마나 큰 용기를 가지는지 새삼스럽게 체감한다.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은 아닌데, 근래에 봤던 드라마 중
<우리들의 블루스>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잘 알려진 여러 배우들이 등장하는 옴니버스식인데다가,
극 중에서 한지민 배우의 쌍둥이 언니로 나온
실제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정은혜 작가의 등장 때문이기도 했는데,
비밀이 많고 자신을 숨기는
한지민 배우의 극 중 역할도 역할이었지만,
비장애인이 장애인 역을 맡는 게 아닌
실제 장애를 가진 장애인이 등장하는 씬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극 중 내용을 이해하고
대사를 외워 연기를 한다'라는 것은
비장애인만이 가능하다는 나의 편견이자,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소극적이라 생각한 선입견이
얼마나 기울어진 시선인지를
드라마는 사정없이 부숴버린다.
그리고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정은혜 작가에게
시선을 옮겨가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순수한 시선과 세상을 품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은혜씨의 포옹>은 정은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와
그림, 사랑이라는 날 것의 마음을 담은 그림 에세이다.
사진을 찍을 때면 상대와의 빈틈없이 꼭 끌어안는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품고 사랑한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예쁘다고 할 수 있는
강한 용기를, 누구보다 약한 그녀는 가득히 쥐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재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좋아' 하면서 웃고 이내 품어버리는 이 커다란 사랑을
우리는 왜 잊어버리는 걸까?
'저를 한눈에 봐주세요.
첫눈에 반해주세요.'라고 하며
정은혜라는 이름을 크게 내보인다.
그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세상과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행복한지
그림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는 만날 수 있다.
세상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순수하고도 강한 힘,
'사랑'이라는 그 힘을 자신의 가장 큰 강점으로 내보인다.
잊고 있던 가장 소중함을 일깨우는 순수한 포옹,
결국 모두가 같은 사람이고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은혜씨의 포옹> 이었다.
책을 읽으며, 20여 년 전 고등학교 때의 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이름표의 글자를 훑으며
부르고 손을 내밀었던 그 얼굴들,
'함께' 학교를 다닌 친구들은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궁금해진다.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