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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산책 - 사유하는 방랑자 헤르만 헤세의 여행 철학
헤르만 헤세 지음, 김원형 편역 / 지콜론북 / 2024년 10월
평점 :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한 숙박 서비스의 광고 카피에
가슴이 동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바쁜 현대사회, 쳇바퀴 돌듯 밥벌이를 하며
잠시 낼 수 있는 며칠간의 연차를 그러모아
'여행'이라는 이름의 휴가를 떠날 때
과연 현지인처럼 '제대로 살아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싶다.
원하는 날짜가 아닌 연차를 쓸 수 있는 날짜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비용의
항공권과 숙소를 가진 곳으로 떠나
이왕이면 최대한 긴 일정을 소화하며
중요하다는 스팟을 찍고 유명하다는 음식을 먹으며,
필수품이라는 기념품을 그득하게 가지고 돌아오면
여행인지 극기훈련인지 알 수 없는 기분에
돌아오고 나서도 '정말 휴가를 다녀온 게 맞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하루 이틀의 기간이 아닌
오래도록 머물며 제대로 여행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며
'언제쯤 나도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하며 부러움에 가득 찬 적이 있었다.
당장 향하지 못하는 여행에 대한 아쉬움은
누군가의 여행기록이자 후기인 사진과 영상을 통해
달래고 있었고, 그를 통해 내가 다음으로 향할
목적지를 정하기도 하고 말이다.
어떤 '목적'이 아닌 방향만을 가진 '목적지'였고
"휴가에 목표랄 게 뭐가 있어? 그냥 쉬는 거지?"라는
생각에 여행책자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후기 속에서
다들 고만고만하게 보는 것을 보고
남들이 먹었던 것을 먹으며
남들이 사 온다는 것을 사는 평범한 여행을 하며
조금은 루즈한 여행을 했었던 나는 그런 여행자였다.
자신을 스스로 방랑자라 여기며,
1901년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으로
스위스, 남독일, 아시아 등 여러 곳을 방문하며
여행지에서 남긴 기록을 남기기도 하고
다른 이들처럼 여행상품이나 안내서의 전형적인
관광 대신에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를 방문하거나
풍경을 감사하는 등 독립적인 여행을 추구한 이가 있다.
바로 수많은 저서로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가르침을 주었던 시인이자 소설가, 화가인
헤르만 헤세의 《무해한 산책》이다.
내가 생각하는 헤세의 이미지는 학자의 이미지였다.
무언가 고뇌하고 연구하는 사람,
글을 쓰면서 방안에만 박혀 있을 것 같은 그런 이미지.
그가 써 내려간 작품들의 울림은 그런 차분함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나보게 된 《무해한 산책》
속에 드러난 헤세의 모습은
평범하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여행을 즐기는
사유하는 방랑자 그 자체로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유쾌하며
특이하다 싶으면서도
좋은 것을 좋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 요즘으로 치면
'흔치 않은 여행 브이로그'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여행자를 위해
안내서를 작성하는 헤세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자신이 다녀온 도시들의 모습과 풍경,
마음에 남았던 장소와 음식들을 음미하며
고르고 골라 추천하는 멋쟁이 작가.
1901년부터 1913년까지
헤르만 헤세가 방문한 도시들의 추억은
기록과 감상으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여행책자를 바쁘게 넘겨가며
비슷한 코스를 돌고 있는 여행자들을 뒤로하고
실제 그곳에서 주머니를 털어가며 생활을 하고,
때로는 숙소에서 쫓겨나기도
갑작스레 쏟아진 비를 피하기도 하고
잘못 먹은 음식에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하다가
어느 숙소의 푹신한 이불 덕분에
컨디션이 급상승하기도 한다.
구걸하는 아이들이나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
배를 얻어타며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고
정원에서 만난 작은 금붕어 연못을
15분이나 들여다보며 관찰하는 등
여행지에서의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헤세의 모습은
정말 유유자적하면서도 그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여행은 무릇 그런 게 아닐까?
어떤 정해진 무언가를 도장 찍듯 보고 지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스스로 '여행의 목적'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여유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우리가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경험이라는 값진 가치이자, 앞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변치 않을 진심일 것이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담으려고만 하다 보니
진짜 여행에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여행을 통해서 내 마음속에서 가장 그리워하던 낙원,
내 마음의 여유, 혹은 삶에 대한 고찰까지도 할 수 있고
그곳에서 살아봄으로써 다시 돌아간 후에도
되찾고 싶은 마음을 발견하는 것.
바로 헤세가 진정으로 말하고픈 여행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랜 시간 전의 이탈리아로
헤르만 헤세와 함께 떠나 작은 소도시,
구석진 골목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여행은 대단한 것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기쁨이 곁드는 시간을 만드는 것임을
늘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행을 다녀올 때면 사진이나 물건으로
그 순간을 남겨놓으려고 했는데,
나도 헤세처럼 느꼈던 감정이나
보았던 사소한 아름다움,
기록을 통해 마음속의 조각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여행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이 글은 지콜론북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