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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 범죄 너머에서 발견한 인간에 대한 낙관
정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7월
평점 :

"이 글은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법적인 다툼이 벌어지면 재판이 열린다.
피해자와 피의자로 나뉜 사람들,
그리고 유죄 혹은 무죄로 결론 나는 재판.
법은 중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묻는다.
과연 모든 이야기가 두 가지로만 나뉠 수 있을까?
대학교 때 ‘법과 인간’이라는 교양 수업을 들으며
재판을 참관한 적이 있다.
공개재판이라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공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법조인의 목소리는
때로는 단호했고, 때로는 조용히 날카로웠다.
그들은 수많은 법령과 증거를 바탕으로
사건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법은 무섭다. 그리고 법을 다루는 사람은 더 무섭다.’
검사 역시 원리와 원칙만을 따르는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 책을 읽고 완전히 바뀌었다.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은 정명원 검사의
인간적인 고뇌와 따뜻한 시선을 담은 에세이다.
유퀴즈 출연으로 알려진 그녀는
공판 분야 국내 유일 블랙벨트 검사로,
법이라는 냉정한 제도 속에서도
사람의 온기를 읽어내는 시선을 가진다.
이 책은 법조인의 일상이 아닌,
사람을 마주하는 한 인간의 기록이다.
1부에서는 재판 판결문이나
어떤 사건의 재판을 다룬 뉴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건 너머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어쩐지 검사라 하면 사건의 사실과
그 행위들이 가지는 유무죄에 대해서만 따질 것 같은데,
결국 모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기에
검사이자 한 명의 사람인 그녀는
그 속에 숨겨진 사람들의 온기를 읽는다.
문장을 쓰는 일에 애착을 가진 사람으로서
공소장을 쓰며 좌절했던 순간들,
할 말을 잃게 만들었던 피고인들,
사건 속에서 마주한 이들의 남은 삶을 고려해
판단의 기로에서 선택했던 자신의 결정까지
법으로만 얘기할 수 없는 여러 표정들이 담긴다.
2부에서는 새내기 검사를 지나 공판부장으로,
법조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어쩌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법조인의 일상이 바로 이 파트가 아닐까 싶다.
사건을 배정받고 누군가 사람을 불러 조사를 하고,
때로는 암흑 속에 숨겨져 있는 듯한 사건을 파헤치며
검사로서 가졌던 어떤 사명감이나 책임의식,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느낀 애써 버티고 있는
사람의 역사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얘기한다.
또 검사이자 엄마로 아이를 배에 품고 키우며
들었던 생각들은 차갑게만 보였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한 같은 이들에게도
무엇보다 유약하고 원초적인 감정이 있음을,
결국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당연하지만 미처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사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각기 사연이 있듯
그것을 마주하는 이들에게도 자신만의 사연이 있는데,
법을 다루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서 어떤 감정이나 감성적인 것은 없다고
우리 스스로 판단해왔던 것은 아닐까 반성했다.
마지막 3부는 상주시에서 지청장으로 근무하게 되며
겪었던 일과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은 시골마을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조용하거나 답답하지만은 않았던
너무나 따뜻하고 애틋했던 이곳에서의 시간,
그 애정이 듬뿍 담긴 시간을 전한다.
이윽고 다시 발령이 나고 상주를 떠나게 되며,
이임식에서 보편적인 딱딱한 이임사가 아닌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생각조차 못 했던 전개로 읽으면서도 괜스레
코 끝이 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단단히 익어간 농부의 딸로, 나아가 검사가 된 사람.
이 일을 잘 해내기 위해 그 뿌리가 될 토양이 되는
사람들의 삶의 결을 이해하고 싶다는 그의 다짐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녀의 관점을 느낄 수 있었고,
범죄 너머에서 발견한 인간에 대한 낙관을 가진
따스한 시선을 통해 쌓여가는 법이라는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게 해주었다.
법의 선택과 결정이 모두의 행복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 속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음을 이제는 알 수 있다.
'차갑고 딱딱할 것이다'라는 편견으로만
바라봤던 검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따스한 시선을 가질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