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가끔 단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단순하게 살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할까를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 이런 책이 가끔 위로(?)가 되기도 한다. 우연히 본 책이지만 특별한 매력이 있다. 이 책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재미있다. 뭘 말하는지 알듯 하면서도 모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모든 것은 순리를 따르고 있기에 그리 속 끓이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저 조금의 생각의 차이만 가질 수 있으면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읽으면서도 그렇구나를 연발하며 웃음이 나온다. 남이 사는 이야기도 다 이런가 보다. 나만 이렇게 허둥대나 싶어 안달이 날 즈음 이 책을 읽으면 살아가는 것은 다 그렇고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만 특별한 삶이 아님을 안다. 때로는 이렇게 둥글둥글하게 생각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 그냥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편안한 것이다. 그렇게 모나게 살지 않고, 모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조금은 부족한 것 같아도 결코 부족하지 않는 것이며, 비어있는 그 부분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공감’이라는 말을 자꾸 떠올리면서 보게 된다. 책 속에 있는 ‘낢’은 결코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일상을 보내면서 모르고 지내는 부분이 많다. 이 책을 보니 충분히, 아주 충분히 공감한다. 다들 그렇게 산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쉽다. 결코 적지 않은 페이지지만 단숨에 읽을 만큼 재미있다.
동시를 읽으면 그 사람의 유년이 보이기도 한다. 동시의 대상이 꼭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때문이기도 하다. 동화책은 정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다. 그렇지만 동시집을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러저러한 이유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동시집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즐거움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말이나 정서를 심어주는 데 ‘동시’를 접하게 하는 것은 지극히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 짧은 글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와 정서를 담고 있는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인정하고 있다. 함축된 의미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작가의 소개글에 실린 글을 읽어보니 이 작가는 좀 늦게 동시쓰기를 시작했다고 한 것이 눈에 띄었다. 작가가 언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음을 이 동시집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록 늦게 시작했지만 그의 동시 속에는 그의 유년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또 전달해주려는 힘 또한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참 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시는 이렇게 쉽게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 어렵지 않은 문장들이 오히려 더 와 닿는다. 늘 쓰고 있는 우리의 일상의 언어들이 잘 정리된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의 시 모두가 이렇지는 않다. 가끔 그의 시에서는 또 다른 느낌도 전해 받는다.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들이다. 그 소리를 들어보면 그의 힘들고 아픈 부분이 배어 있다. 그렇게 힘든 부분은 그이 끄트머리에 가서는 밝고 환해진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결하려는 작가의 자세가 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렇듯 어려운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이 책이 작가의 첫 동시집인 만큼 느낄 수 있는 참신성은 분명히 있다.
우리 아버지는 장남에 장손이다. 그래서인지, 아님 책임감 때문이신지 제사를 지내는 날은 정말 몸으로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신다. 지금이야 조금 줄였지만 그전에는 제사가 11개쯤 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시누나 동서들의 조금의 도움이 없이 오로지 음식은 어머니의 손으로만 준비하신다. 다른 친척들은 그저 제사 준비가 끝나면 와서 절만 하고는 어머니가 싸주시는 음식을 들고 그냥 총총히 가신다. 때로는 그런 모습에 화가 날 듯도 하지만 부모님은 아직 그런 내색 한번 없이 정갈하시기만 하다. 때로는 너무 그러신다고 투정 아닌 투정도 부려보았지만 이내 내가 스스로 지고 만다. 그래도 변하시지 않을 분들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나이도 이제 불혹을 몇 해 더 넘겼으니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명절을 빼고도 거의 한 달에 한 번은 제사를 지냈으니 지금이야 제사 때면 우리 형제들이 모여 손이 척척 맞아 그 많은 일들을 금방 해 내고 만다. 이것도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덕이라 생각 된다. 어려서부터 그 모습을 보고 자란 8살배기 조카도 제사 때면 으레 일을 거들곤 한다. 제법 절도 잘 한다. 대견하다. 역시 보고 배운 것에는 당할 수 없나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조상을 잘 섬기는 것이 후손이 할 도리라고 말씀하셨다. 지극히 옳고 당연한 말씀이지만 너무 자주 말씀하시는 탓에 때론 성가실 때도 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내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 없는 후손이 어디 있냐 하시던 그 말씀에 공감도 하면서. 나는 이 족보에 대해 할 말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가 이 족보를 다시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는지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족보를 찾아서 새로 만들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애를 태우셨다. 족보를 찾아야 한다고, 시간 날 때면 사방으로 쫓아다니시던 그 모습에 우리는 아무런 도움도 되어드리지 않으면서 걱정만 했다. 아버지는 그게 가문에 꼭 있어야 할 것인데 없어졌다며 찾기 위해 꽤 오랫동안 노력하셨다. 그러나 어디 한 군데에도 반겨주는 이 없고, 또 친척 어른들 또한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게 무슨 대수냐며 시큰둥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족보를 가지고 오셨다. 아버지는 무슨 개선장군 마냥 웃으면서 당당하게 우리 앞에 펼쳐놓으셨다. 그게 참 이상했다. 그 족보에 눈에 익은 이름들이 서열 맞춰 있는 것을 보니 왠지 든든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게 그리 자랑스러우셨나보았다. 한참을 펼쳐놓고 앉아계셨다. 누가 보든 안보든.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한 일이라곤 아무 도움 없이 혼자 그 많은 이름자들을 챙겨 놓고 찾아보며 끙끙거리는 모습이 하도 딱하여 워드작업으로 해 드린 것뿐이었다. 이 컴퓨터라는 것이 있어 잘못하면 지워서 새로 할 수도 있는 기능이 있다하니 된다니 족보를 다 만든 만큼이나 좋아하셨다. 그전에는 내가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을 정말 못미더워하셨다. 그을ㄴ 원고지에 써야 맛이라던 분이 이제는 가끔 부탁도 하신다. 다 ‘족보’찾기에 조금 도움을 드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명절이나 제사 때면 어김없이 족보를 내어놓으신다. 그리고 뿌듯해하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이게 우리가 알아야 할 뿌리라며 하셨던 말씀 또 하시고 그러신다. 이제는 그 모습조차 아름다워진다. 조상을 섬기고, 뿌리를 안다는 것인데 어디 세월 탓을 할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해본다. 아버지의 아들인 오빠가, 그 아이들인 조카가 아버지의 뜻을 잘 이어받을 수 있을지. 아니 믿어본다. 보고 자랐으니 그만큼 할 거라고 믿어볼 수밖에. 이 책을 한 권 더 주문해서 조카를 보여줘야겠다. 조카는 이 책을 보고 분명 질문을 할 것이다. 아니 질문을 무수히 해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 대답을 아버지께서 해 주신다면 더 좋을 듯하다. 아마도 귀찮으신 듯 그러시겠지만 속으로는 그러는 손자모습이 더 믿음직스러워질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종종 아버지의 서재 깊숙한 곳에 있는 아버지의 보물중의 하나인 족보를 꺼내 보곤 하신다. 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이제는 싫지 않다. 그냥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드린다. 왜일까? 나도 이제 만만치 않은 나이이기 때문에서일까?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밥상보라고 한 이유는 이러하다.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 예전, 그러니까 우리 어릴 적에는 밥상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처럼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그냥 큰 천위에 여러 가지 색의 천을 이리저리 덧대어 꼼꼼하게 바느질하여 놓은 것이다. 그 밥상보는 늘 오늘은 어떤 반찬이 있을 지 궁금하게만 한다. 그것을 열어보면 소박하기는 하나 그 음식 하나하나의 정성만은 그지없다. 그 소박함이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에 있다. 그립기도 하다. 이 책에 있는 여러 편이 마치 그 조각들 같다. 그 조각들이 함께 모여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내니 한 편 한 편이 읽을수록 새롭다. 이 동화를 쓰기 위해 작가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 지를 생각해본다면 그 바느질처럼 손끝이 아렸을 것이다. 그 어느 작품도 허투루 쓴 것이 없다.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한 권에서 볼 수 있으니 그 작가의 색깔을 볼 수 있어 좋다. 더러 이름을 아는 분들도 있어 반갑기도 했고, 새롭게 만나는 작가들은 어떤 내용일까 더 궁금증을 가지게 한다. 요즘 아니 예전에도 그랬으리라 생각되는데 삼촌과 조카가 동갑이어서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삼촌과 조카’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책에서 특히 관심 있게 본 작품이 있다면 요즘 아이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좀 더 세밀하게 다룬 ‘혼자 있을 때만 들리는 소리’와 ‘돌덩이’이다. 이 두 이야기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그리고 혼자로 있는 아이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특히 알 수 없는 일에서는 아이가 늘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만 놀고 있는 아이의 외로운 마음을 적절하게 대변해 주고 위로해주고 있다. 조금은 판타지적인 이야기가 숨어있는 ‘공주와 열쇠공’, ‘두꺼비 사랑’, ‘피리 부는 소년’도 빠트릴 수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정감 있게 해 주고 있는 ‘바느질하는 아이’, ‘두 권의 일기장’도 꼭 권해주고 싶은 내용이다.
요즘 아이들이 전통 ‘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문을 열면 온통 인스턴트에 패스트푸드 점이 더 많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장을 담근다는 말조차도 아마 생소할 듯하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에 장을 담그던 때가 생각난다. 그 때 그 시절에는 장을 담그는 날이면 정말 잔치집 같았다. 이른 아침 누런 콩을 씻어 큰 솥에다 올려놓으면 우리는 그 솥 옆에 옹기종기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이 언제 삶아지나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뚜껑이라도 열기라도 하면 우르르 달려들어 콩 몇 알을 주워 먹기도 했다. 오전 내내 삶아진 콩이 다 익으면 그 콩을 다시 커다란 자루에 넣어 하양 고무신으로 밟으면 어느새 단단하던 콩은 아이들의 살결처럼 부드러워진다. 엄마를 도우겠다고 함께 그 자루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나머지는 절구를 찧기도 했다. 조금 큰 아이들의 특권은 그 으깬 콩을 네모모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어린 동생들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조금은 손끝이 야문 큰 아이들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 만들어진 메주덩어리는 장독 위에다 하루를 말려놓는다. 햇볕에 이리저리 굴려 잘 다듬는다. 그것을 먹으려고 찾아온 비둘기를 쫓아내기도 하는 것은 아이들 몫이다. 조금 단단해지면 그것을 미리 구해둔 볏짚에 묶어 바람이 잘 드는 처마 끝에 매달아 놓았다. 다시 따뜻한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그것이 특별한 냄새를 가질 쯤에야 진짜 장을 담글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다시 햇볕으로 나가 말려지고 그렇게 장을 담그는 날이면 고사리 손도 보태질 만큼 바쁘다. 숯과 고추도 띄우고 버선그림도 붙여 금줄로 두르면 그날의 일은 마무리가 된다. 그렇게 시간이 더해지면 오랫동안 두고 먹을 간장도 나오고 밥상위에 없어서는 안 될 된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보고 컸다. 그렇지만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로만 들려주어야 한다. 조금은 아쉽다. 하지만 이 그림책을 보면 그 아쉬움을 조금 달래볼 수 있다. 역시 맛나게 곰삭은 맛을 내는 것은 할머니 손맛에 비길 수가 없다. 이 그림책에서는 할머니가 손녀 가을이에게 장을 담그는 법을 아주 상세하게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있다. 시간을 두고 그 맛을 내는 장은 나이가 들수록 그 맛이 더욱 새로워진고 그립기만 하다. 이 그림책에서는 우리의 전통을 알려주고 있지만 내게는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아이들에게는 우리의 전통을 알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네 음식은 오랜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 정말 과학적인 음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