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굴에서 살아난 다니엘이 우상의 제국이였던 바벨론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왕과 백성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통해 바벨론같은 현 시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다니엘의 겸손과 존중은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릴지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믿음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다니엘에게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이 주권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잠시 사용하시는 종에 불과했고, 이 때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징계하고 심판하시는 것이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을 존중한 것은 그가 존중받아 마땅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멍령하셨기 때문이었다.

 

세상과 자꾸만 더 놓은 담을 쌓고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과 존중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라고 한다.

 

다른 기독교 서적들과는 관점이 많이 달라 조금은 생소했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꼭 한번쯤은 읽어보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를 바란다.

다니엘의 시각으로 볼 때 바벨론에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성전의 성물을 느부갓네살에게 넘기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그 성물을 이방 신의 보물 창고로 옮기도록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열등한 신이요 패배한 신이라 조롱하고 무시했지만, 이것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니엘은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봤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시각에서그의 소망과 겸손과 지혜가 나왔다

그리니 끝까지 버티라. 당장은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잊으신 게 아니다. 하나님은 전체 계획을 세우셨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계획대로 추진하신다. 지금 하나님은 바벨론과 같은 환경을 위해 당신을 준비시키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훈련의 목적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시는 것이다.

무엇이든 두렵거나 걱정되는 이링 있으면 바울은 기도했다. 단, 상황을 바꿔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고 반드시 감사할 거리를 찾아 감사했다. 그러면서 그의 편지를 읽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할 것을 권했다.

음모론과 파국론에 빠져 살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일 때문에 걱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잘 안다. 암송할 수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골짜기 아래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모르는 교인은 별로 없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음모론과 파국론의 늪에 빠지면 이 모든 약속을 잊어버린 다.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지 잊어버리고 두려워하는 일에만 시선을 고정한다.
나아가, 지금 우리에게 있는 영적 힘으로 두려움의 대상에 맞서야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가 걱정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있는 영적 힘으로 맞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하나님이 그날그날 공급하시는 힘으로 맞서면 되는 것을.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한 배송 시스템을 자랑하신다. 단 하루도 늦는 법이 없다. 단 하루도 이른 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해도 생각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힘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평안하게 죽는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창고에 보관할 수는 없다

영적 근시안에 빠지면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 전체를 보는 눈을 잃어버린다. 눈앞의 현실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판단한다. 일이 잘 풀릴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그분을 의심한다. 영적 근시안은 위험한 영적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의심한다. 소망과 확신과 용기가 줄어들고, 두려움과 의심과 절망만 가득해진다.
육체적 근시안의 치료법은 교정 렌즈다. 반면, 영적 근시안의 치료제는 십자가와 빈 무덤이다

영적 근시안의 뒷면에는 영적 건망증이 있다. 영적 근시안은 현재에 시선을 고저한 것인 반면 영적 건망증은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심각한 영적 건망증을 앓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세기에 걸친 애굽의 종살이에서 기적적으로 해방된 지 몇 주 만에 아주 유명한 사건이 하난 일어났다

성경적인 겸손은 낮은 자존감과 동의어가 아니다. 성경은 단순히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라고 명령한다.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낫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실제보다 더 못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재능과 능력, 장단점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다니엘이 보여 준 겸손이었다. 다니엘은 정복자들과 사악한 주인들까지지극정성으로 섬겼고, 그 결과 끊임없이 승진했다. 그리고 그렇게 승진할수록 바벨론에서 다니엘의 영향력은 점점커졌다. 나중에는 느부갓네살 왕과 다리오 왕이 그의 하나님을 유일한 참신으로 고백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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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바벨론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다면 우리의 전술을 바꿔야만 한다. 이 시대의 불경건한 리더들을 피하거나 공격하기보다는 다니엘처럼 그들에게 서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잠시 누구를 권좌에 앉히시든 일단은 그들을 겸손히 섬기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야만 그들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접촉 없이는 영향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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