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수제자이자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첫 만남의 장면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30년 어부생활에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단 한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해서

빈 배로 돌아와야 했던 수치스럽고 절망스러웠던 그 날...

예수님은 그 순간에 그 장소에 어부 시몬을 찾아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신다....

그리고 두 배에 넘치도록 잡힌 물고기...

자기를 사랑했던 사람들, 배와 물고기,  소중한 모든 것을 다 떠나야만 했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예수님을 따라 떠난다

 

갈리리 바닷가의 빈배와 어부 베드로, 그 베드로를 부르신 예수님....

 

지금 어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실까?

내 상상속에 갇힌 예수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결해주는 알라딘의 지니와 같은 예수님이 내 속에 계시진 않는지... 

내가 만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만든 내가 되어야 한다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듯이, 좋은 음식이라 해도 잘못 먹으면 탈이 나듯이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읽어야 하는지,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읽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른채 읽기에 매달리다 자칫 `몸의 다이어트`보다 몇 배나 힘든 `마음의 다이어트`를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깊이 새겨진 잘못된 생각을 덜어내는 것은 몸에서 지방을 덜어내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앎은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지식 참된 교양이라면 언제나 삶을 향해야 한고 삶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삶과 분리된 앎은 머리를 가득 채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음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앎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읽어야 합니다. 앎이 삶을 향할 때 참된 의미와 가치를 갖듯이 읽기도 앎을 거쳐 삶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속 이야기를 읽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의 우리와 성경 속 이야기가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면 읽는 우리를 바꾸어야지 성경속 이야기를 우리의 필요에 따라 이런저런 모양으로 편집 해서는 안 됩니다.
읽는 우리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읽는 것이고, 참으로 읽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떠나야 할 때 그 이별을 가벼이 대해서도 가벼이 이야기해서도 안 됩니다. 때로 이러저런 까닭에 이별해야만 할 때가 있지요. 그렇다 해도 이별을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이별이 버겁고 어렵고 무거운 만큼 이별에는 준비가 필요하지요. 인생의 여러 일 중에 사사로운 것도 있고, 무겁고 중요한 일도 있습니다. 무겁고 중요할수록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결정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 속이 어떠한지 명확히 알 방법이 있지요. 그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를 보면 됩니다. 우리는 시몬이 될 수도 있고, 사이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있지요.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으니까요.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우리 속에 어떤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자르고 덧대고 편집한 내가 만든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는지 진짜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부자도 바지를 벗을 때는 한 다리씩 빼는 법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참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우리는 모두 한 번에 한 입을 베어먹고, 한 번에 한 노래를 듣고, 한 번에 한 신문을 읽고, 한 번에 한 사람하고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사람들이 시간을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는 놀라우리만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점에서 비슷하지만, 엄연히 명백한 차이점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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