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트
아네 카트리네 보만 지음, 이세진 옮김 / 그러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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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서류 가방,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길모퉁이를 돌아 마르탱 거리를 가로질러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5년 전보다 경사가 더 가파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이를 먹기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노면이 고르지 않은 포장도로라든가, 비뚤어진 보도블록이라든가. 몸뚱이가 말을 잘 들을 때 좀 더 감사하게 여겼어야 했다. - P49

오전 진료를 마치고 가까운 몽구까지 걸어갔다. 그 식당이개업한 이래로, 이름은 모르지만 곰보라서 얼굴은 확실히 기억하는 그 가게 주인을 나는 일주일에 다섯 번씩 봤다. 식당 주인이 내 쪽을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있으려니 그가 크림처럼 부드럽게 으깬 감자와 번지르르한 햄 덩어리를 접시에 내왔다.
몽 구는 서비스가 훌륭한 식당은 아니었지만 오늘의 메뉴를고르면 대체로 실패가 없었고 내가 늘 앉는 자리를 다른 손님이먼저 차지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으깬 감자에 파르마산치즈를 뿌리고 음식을 떠먹으면서 메뉴판에서 몇번을 무슨 요리였던가를 기억해내는 놀이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늘 그렇듯 물 두잔으로 입가심을 할 때까지 24개중 23개를 맞혔다. - P58

"당신은 뭐가 두려운가요, 아가트?"
"아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모두 뭘 두려워하는걸까요?" 그녀는 절망스럽다는 듯 손을 떨어뜨렸다. "그냥 삶 자체가 위험해진 것 같아요. 음악을 연주하는 것도 두렵고 연주를멈추는 것도 두려워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두렵고 혼자있는 것도 두려워요. 내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래도 노력해봐야죠. 아가트, 우리가 하는 일이 모여서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아가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 P105

쉬뤼그 부인이 어찌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지나는 움츠러들었다. 나는 은퇴 후에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카운트다운은 막바지까지왔는데 그것이 끝나면 뭐가 있을까? 텅 빈 거울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어디까지나 원칙적으로는, 그녀가 그토록 신속하게상황을 제대로 간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아주 깐깐하게 보이고 싶은 눈초리를 하고는 이렇게만 말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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