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녀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적도 없고 누가 봐도 분명한 슬픔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슬플 따름이다. 엑스레이를 찍어도 보이지 않는 조그만 악마가 가슴속에 기생하면서혈관을 타고 동에번쩍서에번쩍 하며, 머릿속이 가득 차도록그녀는 부족하고 나약하고 못생겼으며 망가진 인생 말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거라고 속삭여댔다.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를 잠재우지 못하면, 자신이 정상처럼 느껴지는 공간에 있지 못하면, 눈물이 말랐을 때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꽂혀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수도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데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평생 가슴을 펴고 어깨를 꼿꼿하게 들고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고 벽을 따라 피해다니다 결국에는 지쳐버린다. - P152

안나레나와 로게르는 전국의 모든 이케아 매장을 섭렵했다. 로게르에게는 수많은 결점이 있고 안나레나는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가 이케아 안에서만큼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으려한다. 아주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들끼리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중요하다. 오래도록 해로한 부부는 말이 없어도 싸움을 시작할 수 있듯 말이 없어도 ‘사랑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얼마 전 이케아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는데 
로게르가 
각자 케이크를한조각씩 먹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날이 안나레나에게 중요한날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녀에게 중요한 날은 그에게도 중요한날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 P169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무섭고 불안한마음에 소리 지르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평소처럼 대답했다. 항구에 머무는 배는 안전하지만 배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게 아니잖니."

야크는 당장 후회할 말을 했다. "엄마는 목사니까 칼에 맞지않게 하느님이 보호해주실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지구 반대편의 병원에 앉아 있었을지 몰라도 그럼에도 아들이 느끼는 바닥 모를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칼에 맞지않게 하느님이 보호해주지는 않으시지. 그래서 하느님이 다른사람들을 주신 거야, 서로 보호하면서 살 수 있게."
그렇게 고집스러운 사람하고는 언쟁을 벌일 수 없었다. 야크는 그녀를 엄청나게 존경하는 자기 자신이 가끔 싫었다.  - P301

"미국 대기업의 선임 애널리스트였어요. 그녀가 하도 허술해서 나도 처음에는 못 믿었지만....… 이 아파트에서 그녀보다 똑똑하고 더 많이 배운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로게르가 회사에서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더 잘나갔기 때문에 그가 승진을 마다하고 아이들과 함께집을 지켰고, 덕분에 그녀는 여기저기 출장을 다닐 수 있었어요. 몇 년만 그러기로 했지만 그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그녀는 더욱 승승장구했고 연봉의 격차가 더 벌어지면서 둘의 역할을 바꾸기가 점점 어려워졌죠. 아이들이 다 크고 자신의 모든목표를 이루었을 때 안나레나는 로게르를 돌아보며 ‘자, 이제 당신 차례야‘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승진의 기회가주어지지 않았어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린 거죠. 그들은 알맞은 대사를 연습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걸 두고 대화를 나눌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녀가 줄기차게 이사를 다니고 아파트 리모델링 공사를 하는 방식으로 그에게 보상하려 하고 있어요…………. 공동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말이에요. 이제 돌볼아이들도 없으니 로게르는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된 기분을 느끼거든요 - P343

‘죽음, 죽음, 죽음‘ 에스텔은 벽장 안에서 생각했다. 오래전에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그 단어로 전화 통화를 시작하곤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죽음, 죽음, 죽음. 그걸 치워버려야 다른 화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어느 나이 이후부터는 그러지 않으면 통화 내용의 초점이 삶이 아니라 오로지 죽음에 맞추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스텔은 요즘 들어 그런 시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그 작가는 ‘죽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에스텔로서는 그게 더 힘들었다.
예전에 아이들을 재우며 읽어주던 책에서 피터팬이 이렇게 선언했던 기억이 났다. "죽는 것도 정말 짜릿한 모험이 될 거야."
죽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럴지 모르지. 에스텔은 생각했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천 번의 해돋이와 아름다운 감옥과도 같은 삶이었다. 그녀의 뺨이 부르르 떨리며 그녀에게 나이를 먹었음을, 피부가 너무 얇아져 아무도 못 느끼는 미풍에도 살결이 노상 흔들리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녀는 나이를 먹는 것이 싫지 않았지만 다만 외로웠다 - P3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