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베이비 -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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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이 시작되는 앞부분은 아주 강렬하다. 책을 소개하는 다른 매체나 글에서도 이 부분만큼은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을 만큼. 책을 다 읽고 나면, 전체 주제와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

아빠는 나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렸다.

돈을 얼마나 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갚지 않은 건 확실하다. 열 살이 넘어서도 난 전당포에 있었으니까. 보육원이 아니라 전당포에 아이를 맡긴 아빠나 덜컥 아이를 맡은 전당포나 흠, 긴말은 하지 않겠다. 하면 할수록 상상을 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길. 버림받은 아이의 이야기라고 우울하게 시작하진 않는다는 것. (...)

전당포에 시계를 맡기면 값이 떨어지기 전에 팔고, 금을 맡기면 값이 오르길 기다린다. 그럼 아이를 맡겼을 땐?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 전당포 주인이 할머니, 그 딸과 아들이 엄마와 삼촌이 된다. "애들은 억만큼 주고도 못 사는 어른들의 희망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할머니가 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12)

책의 제목, 그리고 이 서론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듯이 주인공 '나'(하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도박을 허용하는 동네의 카지노를 배경으로 태어난 아이다. 아이는 버려져 전당포에 맡겨졌고 전당포를 꾸려나가는 할머니와 그의 자식들이 아이의 가족이 된다. 책에서는 '지음'이라는 지명으로 이름이 설정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곳이 사북의 강원랜드라는 걸 안다.

2.

10년 전쯤, 일하던 회사에서 출장 차 사북에 갔던 적이 있다. 같이 갔던 일행 중 한 명은 어느 곳을 가리키며 저기서 누가 자살을 했단다, 아침만 되면 좀비의 눈빛을 한 사람들이 슬금슬금 나타난다며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맡은 일은 카지노에서 벌어들인 수입 일부를 그 지역 아이들을 위한 문화산업에 환원하는 기업과 협력해 힉교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병주고 약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돌던 초겨울이라 그랬겠지만 도시 전체가 잿빛으로 보였다. 그곳에도 해맑은 아이들이 있었고 기업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초등학교 시설은 꽤 세련되었다고 느꼈다. 많지는 않지만 웃으며 학교 문을 나서던 아이들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만난 하늘이는 그 아이들과도 겹쳐보였다.



하늘이를 키우는 할머니는 월드컵 전당포를 꾸려나가고 있고, 하늘이는 '그림자 아이'라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도서관에서 공공근로자로 일하는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출근한다. 삼촌은 성실히 일하던 배달차 주인이었지만, 도박으로 3시간 만에 500만원을 잃은 뒤 반쯤 정신이 나가 '지음이 흔들린다, 랜드가 무너진다!'를 외치고 다닌다.

소설은 10살짜리 하늘이의 시선으로 지음에 세워진 카지노를 발판삼아 삶을 꾸려나가는 주변인물들의 모습을 비춘다. 도박할 자금을 마련하려 물건을 처음 전당포에 맡기기 시작한 사람이 재차 돈을 따고 다시 잃고 새로운 물건을 맡기다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가는 이자와 빚 때문에 좀비가 되어가는 모습, 전당포를 꾸려나가면서도 빚을 져서 자살을 하고마는 사장, 도박에 열중하느리 아이를 임신한지도 모르고 심지어 아이를 낳은 뒤에도 애를 내팽개쳐두고 번갈아가며 카지노를 하러 갔던 무책임한 부부 등 이곳은 한탕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와 중독과 쾌락의 공간이다.

하늘이의 할머니는 시세의 흐름을 잘 좇아간 덕분에 부를 어느 정도 축적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지음의 산 역사와 비극을 한평생 목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70년대에 탄광이 부흥할 땐 근처에 올림픽 다방을, 2000년대에 카지노가 들어설 땐 월드컵 전당포를 열어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전당포를 꾸려나가는 인물들을 악하게만 그리지는 않는다. 너무나 빠르게 바뀌고 흥망성쇠를 반복해가는 지음이라는 도시에서 이들이 살아남으려는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 할머니는 그러하기에 전혀 돈이 되지 않는 하늘이를 거두어 손자로 키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에 악인은 없다. 그저 싱크홀처럼 사람과 돈을 빨아들이는 도박장이 있고, 그 주변에 모여사는 여러 군상들의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3.

"지음이 흔들린다, 랜드가 무너진다!"라는 삼촌의 외침은 카지노가 지어질 무렵 이를 반대하던 데모단의 벽보 문구이기도 했고, 하늘이의 꿈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소설 말미에 이르면 이것은 현실이 된다. 화려한 부의 상징이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장면을 겹쳐그리듯, 랜드는 무너져내리는데 하늘은 거기서 살아남고 하늘이의 생사를 알지못해 괴로워했던 할머니는 그 뒤로 몸져누워 쇠약해지다가 세상을 떠난다. "어른들의 희망이자 미래"라는 할머니의 말을 이어받듯 자본주의의 괴물같던 랜드가 무너지고 전당포도 문을 닫지만 하늘이는 할머니의 유언을 이어받아 학교 교육도 받을 수 있게 되고 다시 가족들의 품에서 잘 자라날 수 있게 된다는 결론은 어쨌거나 해피엔딩.


하지만 환상에 가깝다는 점에서, 한 토대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뒤에나 가능하다는 점에서 슬픈 해피엔딩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선 자조와 패배감, 비애의 정서가 가득했는데 최근에는 어떤 식으로는 희망과 해피엔딩으로 발을 내딛어보려는 시도들이 보이는 건 아닌가 싶다. 전세계적인 전염병이 덮치면서 사실 비극은 더 심화되었을지언정, 해피엔딩과 희망을 꿈꾸고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생을 위해 발을 내딛겠냐는 마지막 몸부림 같기도 하다.


소설의 첫 장면이 담고 있던 강렬함이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아쉽다. 소설 속 화자는 10살 아이인데 여러 상황들을 너무나 자세히, 어른처럼 알고 장황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의아한 부분들도, 긴장감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농촌, 탄광촌, 카지노 랜드를 거치며 빠르게 변해간 한 지역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소설화한 시도는 반길만 하다. 비극적인 시간들을 많이 겪어야했던 이곳을 비극적이지만은 않게, 유머러스하고 씩씩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간 점은 이 소설의 미덕이며 소설 속 화자 하늘이의 캐릭터를 통해 잘 구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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