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미야 형제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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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혹은 은둔형 외톨이와 정이 넘치는 형제, 그 이미지 사이에 마미야 형제가 있다. 연애 한 번 못해봤을 것이 거의 확실한 그들은 서른을 넘긴 나이에도 자신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공유한다. 형제의 우애가 깊은 것을 탓할 사람은 없겠지만 유년기를 지나 ‘아저씨’라는 명찰을 단 지금에도 어쩌면 앞으로도, 그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의 어머니와 그 집에서 놀아본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마미야 형제>(소담. 2007)는 외모가 불량하다. 물론 이것은 외모지상주의의 배타적인 기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그 기준이 진리와도 같은 요즘이다. 때문에 형제에게 학창시설은 추억이 아닌 잊고 싶은 과거이고, 직장에 다니는 지금도 고립되거나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정 보다는 상처를 받아왔기에 당연한 일이다. 이쯤 되고 보면 기준미달의 외모를 통렬한 웃음으로 날려버릴 유쾌한 성격이 나오기를 기대하지만 역시 현실이란 그리 녹녹치 않은 것인가 보다. 관계라는 것인즉 타인과의 소통일진데, 그들의 남다른 외모와 성격-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의문과 같다-을 대하는 상대방의 처사는 일단 외면하고 보자는 식이다. 이래서는 ‘마이페이스’의 독선도 불가능하다. 싫고 좋고의 반응 자체가 없이 무시당하는 것이다. 결국 형제는 더욱 조심스러워 지고 그것에 영향을 받은 사고방식은 그들을 집으로 몰아넣는다.

집단이기주의의 희생양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좁아질 수밖에 없는 대인관계에서 형제는 비록 대범한 처사를 보이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 상처받을 요인을 미리 제거하고 그들만의 유희에 빠지면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형제는 우애가 깊다. 물론 그 우애만으로 말라빠져 옷 입는 센스조차 없는 형에 대한 동생의 인식이나 육중한 체구에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고 빠르게 실연당하는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서로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싫은 것도 봐주고 좋은 것도 봐주는 것, 대인 관계의 기본예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인상을 찌푸리고 형제를 대면했던 몇 사람들이 마아야 네의 조촐한 파티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또는 개인적은 상실감으로, 그렇게 사람들이 형제를 찾는 이유는 조금 불순하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자기학대와 같다. 자신이 떨어질 나락(마미야 형제와의 교류)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보자는 호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때문에 혹시나 하고 찾은 집은 역시나 이다. 별 볼일 없는 그들처럼 그 파티도 별 볼일 없다. 손님들은 이내 형제의 집에서의 어색한 자신을 비웃는다. 헌데, 그런 그들이 형제의 집을 또 찾는다. 갈수록 정이 가는 외모라서? 아름다운 내면을 새삼 발견해서? 모르긴 해도 분명 그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 미녀와 야수, 개구리 왕자 같은 반전은 없다. 또한, 돌이켜보면 아름다운 사람과 같은 역전극도 없다.

형제는 연애에 대한 환상 앞에 또다시 좌절하고 겉이 번지르르한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을 한다. 잠시나마 달콤한 꿈을 꾸게 했던 손에 잡힐 듯했던 사랑도 결국 그들만의 리그였을 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상처를 얻음으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다. 그것이야 말로 마미야 형제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타인의 시선일 뿐 형제 자신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마미야 형제는 또다시 집으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아니,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것이기에 돌아온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목욕하는 방법도 옷을 입는 취향과 이상형의 여인상도 다르지만 언제나처럼 직소퍼즐을 맞추고 비디오를 보며, 각자의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형제라는 것, 서로에게 소중한 형이며, 동생이라는 것은 여전하다.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종종 집요할 정도로 인간의 관계를 파고든다. 상대적인 부부간의 사랑, 우정에 가까운 모녀의 정, 차가운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뜨거운 불륜에 까지. 이렇듯 그녀의 소설에 유독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그것이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 영원한 것은 없다. <마미야 형제> 역시 소설 마지막 장에서 짓는 웃음이 그들의 영원한 우애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세월에 때가 고스란히 묻은 보드게임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마음에 드는 영화와 책을 보고 또 보는 것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변치 않는 그들의 집에 놀러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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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프스튜 자살클럽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이은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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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욕망은 죽음을 향한 욕망으로 통한다. - 일본 속담으로 추정

막 읽기를 마친, <비프스튜 자살클럽>(웅진지식하우스. 2007)의 머리말 글귀이다. 흔히 욕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꿈틀거린다. 라는 술어가 연상된다. 그것은 욕망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던 인간의 내면 어딘가에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10+1명의 인간들은 식욕이라는 욕망으로 뭉쳐, 식욕의 욕망 아래 애증과 물욕을 숨기고 있다. 결국 그 욕망은 죽음을 향한 불나방처럼 그들을 부채질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부채질을 거부하지 않는다. 기다리고 있었던, 짐작하고 있었던 종말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원제는 <The Club of Angles>이다. 그들은 자신을 천사라 칭한다. 비프스튜로 대변되는 그들의 식욕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비프스튜 자살클럽>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리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빗나간 욕망을 20여년이나 끌어온 그들은 성장을 멈춘 천사라 부를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악당이다. 아니, 악동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천사라는 이름은 역설일 뿐, 결국 비프스튜로, 식욕으로 결속된 그들은 오로지 먹는 일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게걸스러운 식성을 가진 친구를 치켜세우고, 그것에 적당한 찬양을 덧붙이는 친구를 숭배한다. 그들이 악동인 이유는 그들의 인생이 동네의 작은 식당에서 더 넓은 세상의 식당으로 확대된 것 외의 변화와 성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년이라는 식욕으로 점철된 그들의 우정은 음식을 시로 승화시킬 줄 아는 리더, ‘라모스’의 죽음으로 균열이 생긴다. 외면해 온 현실이 이자의 이자를 쌓아 돌아온 것이다. 영원히 천사로, 악동으로 남기를 열망해 온 인생의 허무를 인정하는 일이란 그들에게 불가능하다. 사회에서 가정에서의 실패를 매달 돌아오는 식도락 모임으로 외면하는 일만이 그들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독특한 클럽의 회원에서 퇴폐적인 사회부적응의 나락으로 떨어졌음에도 이 클럽을 유지시키는 이유이다.

균열의 폭이 넓어지고 서로를 힐난하는 말이 부스러기가 되어 곧 이 클럽이라는 성이 무너질 것이 확실해진다. 이런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마지막 남은 한 접시까지 먹어치울 수 있는 요리이다. 그 요리를 탐한 자, 마지막 한 접시까지 탐한 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왜. 그는 왜 죽은 것인가? 죽음의 순서와 이유, 그것에 대한 궁금증은 더해가지만 결국 집요한 추리는 방향을 잃는다. 모든 욕망이 죽음에 대한 욕망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의 마지막 장을 들춰보는 것과 같은 이들은 자신의 죽음, 즉 인생의 마지막 장을 훔쳐본 것이다. 죽음을 예견하고 결국 삶에서 유일하게 추구했던 식탐으로 생을 마무리 짓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의문이 의문을 낳는 추리소설은 그로 인한 긴장감을 얼마만큼 유지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 때문에 종종 억지스러운 결말을 내놓기도 하고 전체의 흐름을 방해하는 함정을 수도 없이 파다가 자신이 그 함정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비프스튜 자살클럽>은 조금 다르다. 반전의 짜릿함을 위해 본문을 희생시키지 않고, 정해진 결말에 충실히 다가간다.

우리는 인생에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간다. 또한, 소설에 결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읽는다. 죽음을 알고 비프스튜 자살클럽의 회원들이 만참에 참석한 것처럼 말이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삶에서 치열한 경쟁과 시기 질투를 일삼는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아니, 그 욕망 때문에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것을 재치 넘치는 간결한 문장에 담아 우리의 식탁에 선보인다. 전체 요리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메인요리에서는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최고급 요리를 내놓는다. 끝으로 짐작은 가지만 되새김질하게 하는 디저트를 준비한다. 이 디저트는 읽는 사람에 따라 버릇처럼 찾는 커피일 수도, 색다른 별미일 수도 있다.

당신은 요리사,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사무’가 준비한 만찬을 어떻게 즐겼는가? 그 맛에 따라 우리는 같은 클럽에 속해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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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엌 - 노년의 아버지 홀로서기 투쟁기
사하시 게이죠 지음, 엄은옥 옮김 / 지향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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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을 주고, 일용할 과일을 맺으며 땔감으로 분해 종래엔 지친 엉덩이를 비빌 그루터기를 제공하는 ‘나무’의 이미지로 아버지를 떠올린다. 한없는 희생, 내리사랑의 표상, 아버지(물론 어머니도). 반면 과거를 살아온 그의 고지식함에 방문을 부서져라 닫고는 했다. 아버지야 말로 우리시대 애증, 그 자체이다.

천하장사 강호동의 체구를 왜소하게 만드는 최홍만의 큰 손이 연예인의 머리를 쥐고 ‘서울구경’을 시켜준다. 어릴 적, 아버지는 최홍만과 같다. 그의 팔뚝에 매달려 빙글빙글 바라본 세상풍경은 놀이터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키를 따라잡으며 그 때의 환희는 퇴색되어간다. 그는 내 분노와 방황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이유 없는 반항의 화풀이 상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가족을 등진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테두리를 그리려고 애쓰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들 그렇듯 한순간 아버지는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 여전히 측은함과 갑갑증은 동시다발적으로 찾아온다. 그와의 관계는 늘 어색한 악수를 반복한다. 그가 늙는 것이 한없이 가슴 아프지만 그의 고집이 어서 빨리 늙어버리기를 바란다. 언제 그를 사춘기 시절의 가출처럼 떠날지 모른다. 이미 그를 외면하는데 이골이 나있으니까.

<아버지의 부엌>(지향. 2007)은 봉양의 도덕적 기준에 대해 왈가왈부를 늘어놓지 않는다. 자식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다. 누군가 이 사정이라는 것에 돌을 던질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자립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등을 돌리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는 이 가족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평생을 아버지의 그늘이 되어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의 거취는 참으로 막막하다. 아내 없이는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할 길이 요원한 그가 살림을 꾸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구색 좋은 효심으로 그들 돌보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자식들 자신 역시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가정을 꾸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 가정은 아버지의 자리 없이 세워졌으니까 말이다. 아버지는 부엌에 설 자리를 찾아야만 한다.

작가는 그 아버지의 독신인 셋째 딸이다. 그녀는 홀로서기에 나선 아버지의 지독한 교관을 자처한다. 대부분 무섭게 때로는 격려하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버지 자신이 채우게 한다. 그 와중의 교관으로서의 그녀는 아버지를 아이취급하기도 한다. 어쩌면 자립을 위한 교육을 받는 아버지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과연 노인의 혜안은 어디로 간 것인가? 지혜로운 성찰자로 사회의 우두머리, 혹은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노인의 자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노년의 나이를 극복한 ‘록키’의 승리를 예상했던 글은 어느새 ‘노인문제’라는 사회적 문제로 번져간다.

우리는 진시황의 헛된 망상, 불로장생을 꿈을 꾸고 있었다. 늙지 않는 영원한 젊음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수명의 한계와 노인의 시기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이 사회의 노인문제를 보면 그 판단이 영원히 유보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만은 영원한 젊음의 생기를 누리기를 바라는 어처구니 없는 망상에 사로잡힌 진시황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부엌에 선 아버지의 모습은 그를 노인으로 바라보는 딸의 시선에 갇혀있다. 가족의 정만으로 한없이 애틋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적당한 거리를 둔 타인으로서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효를 기반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부모의 조건 없는 희생에 대한 자식의 지극한 효심만이 모든 것을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수동적인 망상이 지금의 노인문제의 주범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홀로서기에 대한 성공여부는 쉽게 판단될 문제가 아니다. 글의 말미에 아버지의 말처럼 책의 화자인 딸이 아버지의 일기와 주변의 증언으로 바라본 것 이상의 구군분투가 아버지의 부엌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외로움과 육체적 한계에 맞선 아버지의 홀로서기, 그것은 결코 경험하지 않고서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이 책 <아버지의 부엌>은 자식의 눈에서 시작된 일방통행에 불과한 것일까? 잘라 말해서 그렇지 않다. 자식에게 기대 외로움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동시에 자유롭게 자립하고 싶은 아버지의 눈물겨운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지 않은가.

지금의 현실에서 노인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하철과 버스에 노약자석을 마련하고 자리를 양보하는 것만으로 이 사회가 노인을 생각한다고 할 수 없다. 때문에 아버지는 부엌에 선다. 늦었다는 후회를 가슴에 새기고도 부엌에 설 수 밖에 없다. 비록 영원히 미숙한 주부로 남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버지를 대하는데 미숙한 우리도 그의 부엌에 동참하자. 아니, 최소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지 않다는 것,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미숙하다는 것은 인정하자. 가족을 위해 자신을 위해 절치부심의 각오로 부엌에 선 아버지처럼 그 부엌에 같이 서자. 헛된 망상에 빠진 진시황이 나라를 망친 것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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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시에서 길을 만나다
로저 하우스덴 지음, 정경옥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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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리 리뷰어로 선정되어 미리 원고를 읽고 올리는 글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졌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 읽는 중의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감당키 어렵다. 무엇보다도 뭔가를 파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이것이 유독 ‘시’와의 만남이 격조한 자신에 대한 구차한 변명들이다.
시인이라기보다는 한국인에 가까운 유명한 시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접하며 입시문제를 머릿속에서 그려내야만 했다. 지나서는 ‘시’란 극도로 감상적인 억지로 여겼다. 아니,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단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시’는 내게 어렵다. 그렇다고 친절한 분석으로 시를 접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닌, 참고서일 뿐 아닌가.

한편으로 시를 동경한 것인지도 모른다. 단 한편의 시라도 마음에 품고, 그것을 되뇌며 감격스러워하는 타인의 눈물이 부러웠다. 애정이 있어야 질투를 하고 그로인한 증오를 품는 것이 아닌가. 그래. ‘시’에 대한 거부감은 애증이었다. 이제 그 꼭 숨겨놓은 애증을 조심스럽게 꺼내 본다. <서른, 시에서 길을 만나다>(21세기북스. 2007)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

글쓴이, ‘로저 하우스덴’은 이 책을 쓰며, 적이 망설였으리라.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그의 생각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인생의 길을 소리 없이 이끌어준 시를 소개함에 있어서도 그것이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상당히 고민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동이 타인에게는 방해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이야기하기로 했다. 시에 대한 애증을 거듭하는 독자를 위해, 혹은 모든 노파심을 뒤로할 만큼 사랑스러운 시들 때문에 말이다.

책은 온전한 열편의 시와 그것과 같은 감동을 향유하는 몇몇 시들의 글귀로 이루어져있다. 비교적 현재에 쓰인 것부터 상당한 오래전 입에서 시작되어 글로 옮겨진 시들까지,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 종교적인 관념에서 일상적인 발견에까지 세상은 시로 가득 차 있었나보다. 작가는 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르치려하진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을 겹쳐, 나는 이랬는데 당신은 어떻소. 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시에서 길을 만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다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거기에 길이 있다는 사실이다. 꼭 그길로 가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길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낸다.

시에서 찾는 길은 인생을 바꿔줄만한 극적인 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감정으로 이르는 길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대인관계에 대한 발전의 초석으로 삼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에서의 입신양명의 대가로 지불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비단 타인과의 소통만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으로 이르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환상도, 변덕스러운 감상에 치우친 감동도 아닌, ‘시’는 깨달음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인도하는 깨달음. 이는 곧 세상과 이어지는 끈이기도 하다.

자기계발이라는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는 지루한 주제와 거부감이 들 정도로 부담스러운 ‘시’가 만나 그리는 그림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러 번 읽히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시’라면, 또 그것이 자신을 담금질하며 단련시킨다면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구차한 변명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안정을 찾는다거나 반대로 세상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성공을 꿈꾸는 삶의 양단에서 그것은 여유로움과 성공, 둘 모두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로 인해 눈물짓고 싶지는 않았다,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익숙하지 못하다. 그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세상은 나와의 거리를 점점 벌일 것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허나, 세상은 그리고 나는 변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가치로 여기며 도망질 놓은 것뿐이었다.

‘시’는 오랫동안 읽혀왔다. 모른 척 고개 돌린 사이에도 쓰이고 읽혀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시’에서 길을 찾고, 길을 내고 있었다. 낯간지럽다는 핑계로, 어렵다는 핑계로 외면한 사이에 말이다. 어떤 것이든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가진 빛은 결국 눈을 사로잡는다.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서른, 시에서 길을 만나다>의 열개의 가로등은 항상 내 발등을 비추고 있었다.

스물아홉, ‘시’라는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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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이야기 - 사람을 움직이는 힘
리처드 윌리엄스 지음, 이민주 옮김 / 토네이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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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개그맨의 기사가 눈길을 끈다. ‘무플이 더 괴로웠어요.’ 이것은 동료 개그우먼과의 스캔들에 이렇다할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한 개그맨의 인터뷰 제목이다. 익명의 가면을 이용한 악플이 연일 문제시 되고 있는 요즘, 이 개그맨의 농담 섞인 고백은 ‘관심’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재차 확인시킨다. 무릇 연예인이란 대중의 인기를 녹으로 하는 직업이니 이것을 일반적인 사례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욕을 먹는 것이 무관심보다 나을 것이야 없지 않은가. 다만 동기부여에 있어서 관심이 자치하는 역할이 상당하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 있겠다.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의 정도를 수용자의 내면에까지 확대시킨다면, 이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도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거쳐 가능해진 염력도 특정 부분에 그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 책, <피드백 이야기>(토네이도. 2007) 역시 그런 허황된 인조인간의 설계도를 좇고 있지 않다. 또한, 인간관계의 토대가 ‘대화’와 ‘동기부여’에 있다는 흔해빠진 개념론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즉, 뻔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한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인간관계의 재정립에 대한 방법론을 반복적으로 습득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비단 직장생활에서의 연공서열에 따른 관계만이 아닌, 가정과 사회전반에 걸쳐 그 구성원 간의 마찰은 여러모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직장에서의 마찰은 곧, 생산력의 저하를 야기하고 가정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폭력과 탈선으로 직결된다. 나아가 사회전체를 놓고 봤을 때, 마찰은 불신을 낳고 그것은 결정적으로 발전의 발목을 잡아채게 된다. 이렇게 중요함이 명명백백한 문제에 대한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일까?

민심을 휘어잡아 사회전체를 이끌어 나갈 거창한 명판이 없다고 해도 모두는 가정, 학교와 직장,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에 따라 타인과의 관계를 맺게 되고 불가피하게 마찰을 겪는다. 이것에 대처하는 방법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칭찬이나 대화의 유효성은 누구에게나 적당한 방법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이 보편타당한 방법은 현실에서 너무도 쉽게 벽에 부딪친다. 대화를 위해 의식적으로 마련한 자리는 불편함만을 유발하고, 반감을 억누르고 늘어놓은 칭찬 앞에서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대 앞에서 이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의 반복을 통해 알면서도 못하는 것이 있다는 합리화만 강해질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인가.

잘한 일에 독려하고 잘못에 엄격한 벌을 주라. 는 이 자명하고 구태의연한 말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의 원인으로 먼저, 이런 피드백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책에 정의 된 피드백의 종류는 4가지인데, 바로 ‘지지적, 교정적, 학대적, 무의미한 피드백’이 바로 그것이다. 뒤의 2가지, ‘학대적, 무의미한 피드백’은 사용해서는 안 되지만 종종 무의식적으로 남발하는 것들이다. 적절한 ‘칭찬’과 이유 있는 ‘훈계’로 볼 수 있는 ‘지지적, 교정적 피드백’과 그 두 가지를 혼동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인사치레로 하는 칭찬이나 축하의 인사, 그리고 일상적인 대화에서 ‘무의미한 피드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 ‘무의미한 피드백’이 말 그대로 무의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관계의 단절을 우발하는 초석이 된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마음에 전달되지 않는 무의미한 시쳇말의 나열이 피드백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잘못에 뒤따라오는 피드백으로 ‘교정적 피드백’이 아닌 ‘학대적 피드백’을 선택한다. 이것은 비단 잘못에만 상응하지 않고 대화의 전반에 걸쳐 선행되는 경우가 많다. 무의식적으로 인상을 쓴다거나 한숨을 쉬며 대화를 시작하는 버릇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학대적 피드백을 성실히 이용하는지 분명해 질 것이다.

이제 4가지 유형의 피드백을 구분한다면, ‘지지적 피드백’과 ‘교정적 피드백’을 적절히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쉽지 곧 바로 효과를 거둘 수 있지는 않다. 이미 맺은 관계에서 ‘학대적, 무의미한 피드백’을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점과 사람마다 가진 피드백을 담는 공간이다. 이 책에서는 타인에게 행하는 피드백과 타인에게서 받는 피드백을 수용하는 통을 가정하고 있다. 그 통에는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어 그 상태로는 남에게 줄 피드백이 바닥남과 동시에 그것을 수용할 수도 없다. 흔한 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때문에 그 구멍을 적절히 막을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그 반창고의 역할 역시 피드백이 해낼 것이다.

‘지지적 피드백’은 올바른 행동의 반복을, ‘교정적 피드백’은 잘못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를 위해서는 결단과 꾸준함이 필요하다. 여태껏 대인관계에서 범한 무의미하고 학대적인 피드백의 과오를 청산하기 위한 결단과 지지적이고 교정적인 피드백으로 관계를 재정립할 꾸준함 말이다. 이미 구멍이 송송 뚫린 피드백 통에 붙인 반창고는 그 접착력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적절한 반창고를 선택하는 지혜와 떨어지면 다시 붙일 인내심이 필요하다. 또한 그보다 우선하여 이미 얻은 상처에 대한 사과 등의 결단이 우선돼야 한다. 그러한 반복이 쌓인다면 기존의 잘못된 관계를 바로 잡을 것이고, 새로운 관계에는 구멍 없이 단단한 피드백 통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첫걸음으로 책의 말미에 있는 피드백 평가목록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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