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꾸와 오라이 - 황대권의 우리말 속 일본말 여행
황대권 글.그림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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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플러스’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출연자들이 정답이라고 내놓은 국적 불명, 의미 불명, 발음 불명의 어이없는 너스레를 들을 때는 진행자가 그들의 머리에 깔때기를 내리치며, ‘OOO씨 공부하세요!’라는 꾸지람 섞인 일침을 가하는 타이밍에 맞춰 폭소가 터지고는 한다. 이들의 바보스러운 오답 행진에 언제까지 웃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깔때기를 맞아야할 사람은 그들만이 아닌, 나 자신 역시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부끄러워진다.

지금의 우리는 가히 우리말 멸종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외계어와 비속어, 그리고 잘못된 외래어가 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근간에 눈에 띄기 시작한 현상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꽤나 오래전에 우리말을 빼앗길 위기를 겪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 세계화 추세에 발맞추자는 이색적인 문화체험에 제일 먼저 희생된 것 역시 우리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한편에서는 잘못 변용된 외래어를 우리말로 교체하거나 잊혀져가는 옛 단어의 쓰임을 활성화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일본말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것에는 반일감정의 발로에서인지 국민적 찬성 여론이 형성되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뀐 것만 봐도 그렇다. 그 명칭이 일왕의 칙령에서 비롯되었다며 정부와 국회가 합심하여 꽤나 소란스럽게 변화의 진통을 겪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러한 교체를 달가워하지 않기도 하니, 일왕이 ‘황국신민의 학교’라는 뜻으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시작했다고 해도 대부분의 국민이 그와는 별개로 ‘우리국민의 학교’로 인식하는데 구태여 바꿀 필요가 있냐는 것이 그들의 변이다.

이제는 초등학교라는 말이 어색하지는 않지만 국민학교 시대를 겪은 사람이라면 때때로 그 변화를 잊고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자신의 추억을 되새길 때 더욱 자주 나타나는데, 명칭이 바뀐 후에 초등교육을 받은 세대를 이야기할 때는 초등학교라는 단어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지만 자신의 그 시절을 회상할 때는 국민학교라는 예전의 명칭에 친근감을 느낀다. 요컨대, 이들이 다닌 곳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라는 뜻이다. 이제 더 이상 국민학교라는 단어는 표준어가 아님에도 말이다.

<빠꾸와 오라이>(도솔오두막. 2007)의 작가 황대권이 회상하는 왜곡된 한국말, 즉 외국말을 잘못 차용한 일본말에 영향을 받거나 그대로 따온 우리말(그렇게 착각했던) 역시 그러한 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좋은 우리말을 두고 일본말을, 그것도 대상국에게 비웃음을 살 정도로 잘못 차용한 말을 그대로 두는 것은 일반적인 우리의 정서나 우리말을 가졌다는 자존심에 크게 어긋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습고 국적 불명인 단어에도 추억이 어려 있다.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뀐 후, 그 시절 추억이 훼손된 것 같은 묘한 씁쓸함을 느낀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작가의 어린 시절 추억과 그 시절 풍경을 한껏 즐기게 되는 이 책에 실린 일본말 240여개. 이 중 대부분의 어원을 살펴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당연하게 써왔던 말이 일본말이었다는 놀라움이야 비단 이 책이 아닌 여러 곳에서 갖게 되기에 차지물론하고 외국의 문물이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 온 것과 같은 경로로 유입된 단어들이 어떤 상황과 이유로 탄생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그 단순함과 엉뚱함에 웃음부터 나오는 것이다. 반면, 선뜻 인정하기 힘들지만 이국의 단어를 적절히 자신들의 것으로 차용한 몇 일본말에 더 크게 놀라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국, 작가가 정리한 일본말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흑묘백묘의 재판을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적절한 표현이라고 해도 그것은 본래 외국말의 불필요한 재해석을 뿐이고 대부분의 경우 적절하지도 않다. 그러면 지칭하는 대상 자체가 외국의 것인 경우 그 나라의 발음 그대로 우리말로 표현하면 된다. 더구나 일본말보다는 우리말이 외국말을 발음하는데 훨씬 유리하지 않은가.

다만 원천봉쇄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가리키는 단어 모두를 우리말로 바꾸려는 것은 굴절된 애국심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잘못 차용된 외래어를 차지하는 일본말에 대한 수정이 그들의 문화와 함께 건너온 고유의 단어까지 죄다 흔들어서는 안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자주 범하고 있다.

또한, 많은 단어들이 언어순화를 통해 적확하게 우리말로 복원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작가의 어린시절에 포함된 일본말이 낯설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시절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사라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데, 이것은 고유의 문화를 잃어가며 자연스럽게 우리말이 멸종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나타낸다.

그와 더불어 정체불명의 외계어들. 우리말이라 생각했으리만치 자연스럽게 녹아있던 일본말이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고 해친다는 우려는 이제 위치도 알 수 없는 외계로 대상을 바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작가 황대권은 이 책을 통해 일본말의 어원을 찾아 우리에게 선택의 열쇠를 주었는데, 외계어에 대해서 역시 그 누군가 책을 내어 후대에게 설명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삼과 즐>같은 제목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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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살인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권수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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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서평을 남긴다는 행위는 예비독자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머릿속의 감상을 글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느낌과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더 큰 매력이 있다. 허나 책에서 얻은 독서의 즐거움과 쓰는 즐거움은 별개로 종종 서평의 어려움이 두려움이 되어 자신을 옥죄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기도 한다. 그럴 땐 단순한 한마디가 효과적이다.

“아! 이 책 재미있습니다.”

이로써, <단테의 신곡 살인>(황매. 2007)의 서평은 끝이 난다. 그것이 예비독자에 대한 정보 제공의 의미에 국한된다면 말이다. 더구나 이 소설은 아시다시피 추리소설, 서투른 글 솜씨로 독서의 재미를 망쳐버리는 스포일러가 되기 십상이다. 개인적인 추억, 아니 악몽에 가까운 기억을 떠올려보자. ‘식스 센스’를 보기 위해 찾은 극장, 들뜬 기대를 안고 상영관 밖에서 즐거운 기다림 뒤 마침내 입장을 하던 중이었다. 이때 사단이 나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던 커플남이 던진 결말에 대한 한 마디 말이 영화 전체를 망쳐버렸다. 대충 예상이 되는 상황이다.

구구절절 이 소설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말인 즉, <단테의 신곡 살인>이라는 소설의 재미를 위해 말을 아끼겠다는 심산이다. 그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이면 사전지식으로 충분하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책을 이야기하자면 소설이 품고 있는 재미를 곱씹게 하는 장점 몇 가지를 말하겠다.

먼저,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이 책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9가지 지옥의 모습으로 살인을 완성시켜나간다. 이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주인공과 그를 따라가게 되는 우리, 독자는 이에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왜 ‘그’는 <신곡>에서의 지옥을 재현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인가? 살인자, ‘그’는 신을 부정하는 자, 죄악에 가까운 욕망을 불사르는 추악한 인간을 징벌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하려는 이상주의자인가? 아니면 그 역시 자신의 의지를 명문화하여 종래엔 색다른 명예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하는 욕망의 죄를 짓는 인간인가? 이 의문이 소설의 주요한 흐름이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살인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맞게 되는 당연한 의문, 과연 이 살인의 의미는 무엇인가!

두 번째로, 단테의 <신곡>이 그러하듯, 이 소설 역시 인간의 속성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세기의 베네치아. 이곳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시기의 축제로 대변되는, 화려하고 자유로워 언뜻 보기엔 활기로 가득 찬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고, 그 몽우리가 오래도록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의 농약의 힘을 빌린 것처럼 자유와 열정으로 활기를 띠는 이 도시의 이면에는 더러운 흙탕물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만든 것, 도시를 이끌어가는 주도세력은 자신의 권력을 손에 쥐고 혹여 그것을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그 밑에선 그 권력을 동경하는 불나방들이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주인공 피에트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가 이 살인사건을 쫓는 것은 위태롭지만 자극적인 모험 때문이고 이는 그 조건, 즉 자유를 보장해주는 권력의 비호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욕망이라는 죄를 짓고 사는 인간과 그 죄마저 동경의 대상이 되는 도시, 그들을 처단하는 모습으로 살인을 벌이는 자, 그리고 그를 쫓는 자, 이 모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욕망의 우물에 빠져있다.

세 번째로, 이 추리소설이 매력은 주인공, 피에트로에게 상당히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순탄치 않았던 성장기를 거쳐 권력을 이용해 입신양명했지만 한순간, 위험한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버린 인간. 하지만 그로 인해 자유를 잃고 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유를 되찾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다시 권력의 종을 자처하는 자. 풍부한 경험을 통해 남을 속이고 속이는 자를 파악하는데 능하며, 매번 다른 모습을 갖는 연극배우이며, 아름다운 선율을 아닌 바이올린 연주자. 더불어 뛰어난 칼솜씨로 강도 넷쯤은 운동 삼아 처리하는 대단한 무력의 소유자. 이것이 흑란이라 불리는 주인공, 피에트로이다.

이쯤 되고 보니, 그의 대단한 재능에 글은 설득력을 잃고 표류할 법하다. 하지만 우연한 실수로 사건을 해결하는 가제트 형사는 황당할 뿐이고, 마음씨 좋은 콜롬보 형사도 식상하게 느끼며, 너무도 인간적이기에 범죄 앞에서 자아 분열을 거듭하는 21세기형 스파이더맨이 담담하다면, 작가, 아르노 들랄랑드가 창조한 조금은 건방져 보일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비열한 임기응변조차 재능으로 삼는 그, 피에르토가 되어 소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소설이 그 안의 세계에서만은 현실에 진배없는 사실적인 세계를 창조함으로 재미를 더한다는 기준에 이 책을 놓아보자. 단테의 <신곡>은 그 역시 창작물이기에 이을 모티브로한 <단테의 신곡 살인>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팩션소설에 속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여타 팩션소설이 역사적 사건이나 실화를 소재로 손쉽게 개연성과 사실성의 짜임새를 취득하는 장점을 이 소설이 누릴 수 없음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어떤 역사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유명한 것이 단테의 <신곡>이다.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소설 속에서 사실성을 찾고, 다소 황당한 인물설정과 사건의 진행에도 마치 리얼리티 수사 물을 보는 듯한 생생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이제 단테의 <신곡>을 바탕으로 작가가 창조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모험, 그리고 약간의 사랑이야기가 궁금해졌다면, 준비는 끝이 났다. 피에트로가 될 준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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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풀스 데이 - 상 - 데이먼 코트니는 만우절에 떠났다
브라이스 코트니 지음, 안정희.이정혜 옮김 / 섬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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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먼저 보낸 아비의 심정을 겪어 보지 않은 자가 어찌 알 것인가. 비단 그 아비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그 말 못할 사연을 책으로 쓴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에이프릴 풀스 데이>(섬돌. 2007)는 그 아비의 심정을 담아, 먼저 떠난 아들, 데이먼을 추억하고, 데이먼의 인생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죽음은 당연한 것. 아버지가 추억하는 아들의 기억은 그들과 관계를 맺지 않은 타인(독자)에게는 단지 지극히 감상적이고 다소 작위적인 일회성 감동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형적인 혈우병을 갖고 태어나 그로 인해 고통 받고 끝내는 짧은 생을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 속에서 마감하는 데이먼과 주변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에이프릴 풀스 데이> 역시 어떤 독자를 눈물을 짓게 한다면, 또 다른 쪽에선 타인의 빛바랜 추억정도에 그치고 마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 후자의 뻣뻣한 거리두기 마저 무너뜨리는 힘이 있으니, 그것은 이 책이 담고 있는 묵직한 주제, 바로 에이즈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이제는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AIDS가 빈번히 소재로 등장하며 우리와의 거리를 좁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미화된 거부감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포털 사이트에서 AIDS를 검색하면 함께하는 성병이라는 대표성과 동성애자, 난잡한 성교 등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하면 매독 같은 성병의 카테고리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AIDS를 터부시되는 성병으로만 인식하게 될 것임을 단적으로 암시한다. 물론 AIDS는 성행위를 통해 감염이 된다.―엄밀히 말하면 혈액을 통해 감염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성병의 카테고리 안에서 검색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AIDS하면 입에 올리기 조차 꺼려하는 우리네 편견이 두렵다. 질병보다는 신이 추악한 인간에게 내린 형벌로 인식하는 편견 말이다.

<에이프릴 풀스 데이>의 주인공, 데이먼은 전형적인 혈우병의 출혈로 인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혈을 받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그에게 필요한 혈액(혈액응고인자)은 실로 엄청난 양으로 그것에 HIV가 섞여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작가는 이 과정에서 의료계의 병폐를 몸소 체험한다. 권위의식만을 고집스럽게 처방하는 의사들과 HIV라는 폭탄을 가진 혈액을 수혈 받아야 하는 제도적인 문제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자 위주가 아닌 의료진 위주의 병원 행정에서 작가는 그로인해 죽음에 더 빨리 가까워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두 가지의 문제점, 즉, HIV와 AIDS라는 질병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과 콧대 높은 병원행정은 25세 페라리를 소유한 젊은 부자의 꿈을 가졌던 데이먼의 개인적인 죽음을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할 것으로 만든다.

적어도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애인 그리고 친구들에게 데이먼의 AIDS는 수혈을 통한 감염이었기에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사그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AIDS는 필연적으로 동성애자에게 발생빈도가 높고, 그들은 지척의 가족에게 마저 외면당한다는 점에서 이 질병의 무서움이 더해진다. 어쩌면 AIDS에 감염된 대부분의 환자들이 자신의 삶을 너무도 쉽게 포기하고 치료마저 거부하여 그 질병을 치료의 여지가 없는 불치병으로 만드는 것은 그 자체의 무서운 속성보다는 그들을 죄인 취급하는 우리 사회의 눈초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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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경제학
도모노 노리오 지음, 이명희 옮김 / 지형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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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류 경제학은 합리적 인간을 가정한다. 그는 세상살이로 따지면 담배가 건강을 해치고 향후 의료비의 증가와 심한 경우 죽음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접한 순간 담배를 끊는다. 그뿐 아니다. 인터넷 항해 도중 수많은 광고 팝업창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인터넷에서 한 가지 물건을 산다면 그것을 판매하는 유통망을 모조리 파악하고 그 손익을 정확히 계산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가 벌이는 사업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오로지 경제적 이유, 즉 이윤을 위해서만 경영할 것이다. 그런 경영 방침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거추장스러운 법이 그것이고, 결코 윤리적인 책임감에 자본을 희생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어떤 단체에 기부를 했다면 세금 감면, 기업 이미지 상승으로 인한 즉각적인 판매율 증가, 신제품의 홍보 등 그것이 파생하는 이익이 기부금의 금전적 가치를 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못 비정한 예를 들어 합리적 인간을 표현했기에 과장이 있지만 주류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인 인간은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와 같은 합리적 인간으로만 사회가 구성된다면 그 사회의 미래상은 어떨까? 따뜻한 가슴으로 생각하자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판을 치는 세상이 잘될 리 없어 보인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자들이 예측하는 미래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개인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만을 하는 인간의 활동은 결국 사회를 발전시킨다. 이유인 즉, 합리적 인간이 내리는 결정은 지극히 합리적이어서 잘못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 역시 합리적 인간으로 예측되는 낙관주의적 미래상이 현실에서 쉽게 이뤄질 것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인간의 경제활동을 파악하는데 가장 가치 있고 주요한 개념이라 주장한다. 때문에 그들이 요구하는 소비와 생산의 주체는 합리적인 인간이고 그들이 긍정적으로 바라마지 않는 세상은 그런 인간의 합리적 판단으로 사회 전체의 부의 양적 팽창이 이루어진 곳이다.

이에 따르면 그리 합리적이지 못한 소비를 실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던히 반복하는 보편적인 우리(대부분 그럴 것이라 판단한 것이 무리는 아니다)는 잘못된 습관을 가진 존재이다. 건강에 해로운 줄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고 술에 진탕 취하며, 메일 확인을 위해 접속한 포털 사이트를 통해 아무 이유 없이 싸고 좋아 보이는 물건을 사들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이 과연 인간이 고쳐나가며 궁극적으로 합리적 결정에 도달하기까지의 악습에 불과한 것일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합리적 인간을 가정하고 나아가는 주류 경제학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경제적이지 못한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 가능한 이론의 부재로 인해 빗 좋은 개살구 마냥의 주류 경제학이란 카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들쑥날쑥한 패턴을 자랑하는 인간의 경제활동을 규명하는 논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행동 경제학>(지형. 2007)이다.

경제학이라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학문에, 더구나 새로운 사조에 버금가는 생경한 논리를 소개하는 책이니 순간 거부감부터 들지만 실제의 예와 퀴즈 같은 문제제기, 그리고 매끄러운 설명은 이내 편안히 몰입하게 한다. 이제 간단히 책에 소개된 행동 경제학을 소개하자면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창시한 휴리스틱(heuristic. 간편추론법)과 바이어스(bias. 편향)를 집어볼 필요가 있다.

휴리스틱은 선택의 기로에 선 인간이 내리는 비합리적인 결정을 설명한다. 물건을 하나를 살 때, 이 구매행위가 완전히 합리적이 되려면 구매할 수 있는 범주의 재화를 모두 섭렵하여 분석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최소의 손실과 최대의 이익을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셔츠 한 벌을 구매한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사려는 셔츠가 특정한 브랜드의 특정한 디자인이라고 한다면 모를까. 막연히 셔츠의 범위에서 다양한 디자인을 고려한다면 이 가치를 연산하는 시간은 예상조차 힘들다. 이 어려운 결정을 손쉽게 하는 것이 바로 간편추론법(휴리스틱)이다. 이에 따라면 고르기가 막연했던 셔츠 구매가 단 칼에 해결된다. ‘아! 옷 잘 입는 친구 S군이 선호하는 브랜드이니 그 녀석이 없는 디자인 중에서 골라볼까?’ 극단적으로 이 역시 휴리스틱에 포함된다.

신속하고 간결한 판단에 비중을 둔 휴리스틱으로 인한 선택의 결과만을 봤을 때, 이 주먹구구식의 선택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판단의 근거가 지극히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오류는 그것이 오류라는 사실이 쉽게 인지되지 않는다. 휴리스틱의 판단 결과 그것이 잘못된 연산과정이라고 할지라도 한 쪽으로 치우친 경향, 즉 바이어스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휴리스틱과 바이어스에 대한 연구의 축적으로 대표되는 행동 경제학은 일반화하기 어려운 인간의 경제활동을 융통성 있게 분석하는 틀이다. 그렇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노릇. 주류 경제학의 경직된 사고방식을 버리고 이를 채택하면 될 일인데, 실상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먼저 행동경제학이 규명하는 인간의 경제활동은 비합리적인 경우에 빛을 발한다. 다시 말해, 이 경우 우리는 경제적 이득으로 보면 당연히 무시해야 할 것을 선택하고, 같은 가치를 가진 것에 대해 편향된 선택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행동은 오류이다. 비합리적임을 인식하고 반추를 거듭하면 충분히 합리적 선택으로 전환 될 수 있는 문제란 뜻이다. 때문에 논리전개가 어렵다. 논리적으로 불합리한 행동을 하나의 패턴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또한 예외적인 경우에 대한 행동 경제학의 분석은 예외적이라는 말 그대로 일정한 법칙이 없다. case by case, 경우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류경제학이 지니는 일정한 법칙에 빛이 바래는 행동 경제학의 특징이다.

이상의 이유로 아직까지 행동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에 밀려 폄하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기존의 경제학의 틀이 존재하기 힘든 가정을 기반으로 법칙화했다는 것에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합리적인 경제활동임에도 그것을 완벽히 수정하여 더 이상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가 인간이라면 이를 규명한 새로운 해석 방법이 필요함은 분명하다.

적확한 법칙이 모든 현상을 규명하지 못하지만 책에 소개된, 인간이 당연히 범하는 오류를 명쾌히, 그리고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행동 경제학의 탄력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언젠가 행동 경제학이, 혹은 그로 인해 열린 새로운 경제학이 청개구리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인간의 경제 심리를 정확히 분석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를 행동경제학의 틀로 파헤쳐 보는 것 역시 그렇다. 더구나 이 이론은 통장잔고를 보며 한숨을 짓게 하는 충동 구매를 일삼은 우리에게 자기합리화의 기회마저 선사하니 이것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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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
기류 미사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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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부분의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밖에 특정 대상 대한 두려움은 경험의 유무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신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 경험한 실체적 통각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 또한 여타 특정 대상에 대한 두려움 역시 경험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물론 직접적인 경험이 아닌 타인이나 지적습득을 통한 간접적인 경험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만 그것이 두려움을 쥐고 흔들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경험에 따른 공포라기보다는 미지의 경외심에 가깝다.

앞서의 말처럼 우리 대부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 두려움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신을 대면하지 않고도 그 존재를 의심치 않는 신자의 의식이 종교의 벽을 넘어 전 인류에 확산된 것에 비견할만하다. 죽음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언젠가 죽음이 찾아올 것을 알고 그것만으로 두려워하지 않는가. 결국 전 인류에 통용되는 절대적 믿음이 죽음에 대한 경외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노블마인. 2007)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상실감, 질병이나 세월에 쇠약해진 정신과 육체, 화장으로 가루가 될 것이냐 매장당해 썩을 것이냐의 선택 등 죽음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시각, 즉 두려움의 베일을 걷고 나면 단순히 겁이 나기보다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가 눈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작가 기류 미사오(혹은 편집자)는 두려움과 슬픔, 혹은 허무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죽음을 매혹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에로스, 욕망, 현세에 대한 집착, 자살, 임종의 다섯 가지 테마를 정해 역사에 기억된 그에 걸맞은 죽음을 골라낸다. 그런데 작가가 표현한 죽음을 대번에 매혹적이다 며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따른다. 에로스에 결부된 죽음만 살펴봐도 그렇다. 이 책의 에로스는 따뜻한 봄날 꽃잎을 날리며 하늘거리며 등장하는 여신의 이미지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서 꺼냈을 법한 적나라한 욕망에 가깝다. 때문에 아름다움에 매혹되기 보다는 추악하리만치 솔직한 욕망에 자극받는다는 표현에 걸맞다.

이 같은 성향은 작가의 이력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전작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기존 그림형제의 그림 같은 동화에 대한 이미지를 전복시킨다. 백설 공주의 해피엔드는 왕자의 키스가 아닌 그의 시체에 대한 성애에 있다고 하니 잔혹동화의 거두답다.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세계정사대전>이라는 원제처럼 죽음이 곧 애욕이라는 상관관계로 독자를 곤경에 빠트린다. 더구나 여기서 죽음은 성욕과 식욕 등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서 이해할 수 없는 변태적 성향에 까지 그 뿌리를 두고 있어 가히 '인간욕망대전’이라 부를만하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런 잔혹함과 적나라함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죽어야만 하는 사랑과 죽음에 희생당한 사랑, 죽음 자체에 대한 동경과 반대의 두려움, 조금은 치졸하고 비겁해 우습기 도한 죽음과 장엄한 결말의 죽음 등 작가가 역사의 곳곳에서 찾아 켜켜이 쌓아놓은 죽음은 친절한 동화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다.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기에 막연히 두려워하지만 단 한 번의 경험만이 가능하기에 호기심을 동반한 매력을 느끼기도 하는 상반된 인식이 공존하는 미지의 세계, 죽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식의 예의 바른 편견이 시체 애호가와 같은 변태적 성향의 역사를 통해 깨진 책 속의 죽음은 자유롭다. 그리고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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