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보상자의 역습 - 대중문화가 어떻게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었나?
스티븐 존슨 지음, 윤명지.김영상 옮김 / 비즈앤비즈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며칠 전 맨사 아이큐테스트가 이슈화되고 사무실에서도 그에 대한 반향이 일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행해진 20-40분간의 테스트가 잠시나마 서로에게 약간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져다주며 웃음을 유발한 것이다. 그 짧은 유희를 바라보는 내내 난 이 책을 생각했다.
<바보상자의 역습>(비즈앤비즈. 2006)의 작가가 내세우고 있는 근거 중 하나인 아이큐의 전반적인 상승의 맹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TV, 게임 등의 매체에 전폭적인 지지를 실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주말에 TV를 껴안고 살 것이냐 책에 코를 박고 살 것이냐 는 삶의 패턴의 문제이다. 정보와 가십의 경계가 점점 무너져가는 대중매체의 홍수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고지식하게 책을 들여다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문화의 질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의 삶의 방식에 달려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TV,게임 등의 매체의 옹호를 펼치는 주장에 아이큐를 들먹이면서 그 효용을 설파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아이의 싸움을 연상시킨다. 또한 그러한 장점(작가가 예시하고 있는)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폐해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굳이 예를 나열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어른들도 감당하지 못하는 급변하는 사회에 놀라운 적응력과 천재성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TV와 게임 등의 매체가 끼치는 영향은 참으로 대단하다. 때문에 작가의 주장이 전혀 그릇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의 말처럼 현재 문화의 주류가 된 바보상자의 문화를 하위문화로 폄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문화를 나누는 기준을 기존의 문화(독서를 통한 교육으로 대변되는)에 두고 TV, 영화, 게임, 인터넷 등의 문화를 판단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분명 두 문화는 차이가 있고 효용도 틀리기에 다른 기준에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에도 백분 동의한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달리 판단하는 것을 무조건적인 수용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구태의연한 바보상자에 대한 비판은 아직 버릴 수 없는 날이 선 칼일 수밖에 없다. 이제 그 오래된 칼로 지루한 바보상자 해부를 해보자.
1. 바보상자(폄하가 아닌, 작가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 매체를 총칭하는 의미에서)가 우리의 지능을 높여준다는 의견을 그에 쓰인 과학적인 근거를 뒤로 하고 사회적인 요인을 살펴본다면, 그것이 유행을 창출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잘 나가는 드라마나 게임 들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이제 대중문화의 뒷자리로 밀려나고 아예 대화에 끼지도 못하는 현실이니 조만간 TV,게임 등을 다루는 학원이 등장한 다해도 그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바보상자가 사회화 과정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는 판단은 위험하다. 그것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런 구조의 사회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이렇게 변했으니 따라오시죠! 하는 작가의 논조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가치를 무조건 과거의 문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시대가 상실한 것을 되짚어 보려고 하지 않고 시대의 조류를 타려는 작가의 의도는 비겁하게까지 여겨진다.
2. 작가의 위험한 논조의 맹점 중의 하나를 꼽자면 게임이라는 매체가 독서의 저변을 잠식하고 기존 교육의 기반에 위험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게임을 하지 않으면 대화와 관계에서 소외되며, 이에 그치지 않고 책 읽는 사람을 고루하고 거들먹거리는 인종으로 규정짓는데 게임이라는 똑똑한 매체가 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 역시 자신의 주장을 책으로 펴낸 만큼 책이 주는 특별한 이점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게임에 대한 평가절상을 이뤄, 큰 숲으로 둘을 같은 잣대에 올리지 말고 나무로서 존중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부모가 우려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그 공존의 숲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니, 불가능은 아니지만 시기상조임은 확실하다.
결국 작가는 책 읽는 문화가, 소위 기성의 엘리트의 문화가 기득권층이니 복잡한 연산능력을 키워주고 문제해결 능력을 고양시키는 게임의 순기능을 존중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믿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다르기에 각각의 잣대로 흑백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옳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두 매체가 공생관계에 놓일 것이냐 약육강식에 지배될 것이야 하는 것이다.―현재로서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적이라 생각한다.
3. 인터넷의 발달로 요즈음의 아이들은 부모가 잘 다루지 못하는 각종 최신 하드웨어와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또한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재분배와 속도의 혁명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이점이다. 하지만 이런 순기능 역시 맹신해서는 안 된다. 분명 공공연히 거론되는 문제점이 일부에 국한되고 노파심에 불과하여 인터넷의 특징적인 장점으로 그것을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확실한 것이 쓸모없는 정보에 대한 노출이다. 물론 정보의 옥석을 가리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니 그것을 그 매체 자체의 확대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려서 받아들이는 개인의 선택의 기회가 박탈당하고 있다.
어떤 포털 사이트를 방문에서 메인페이지에 뜨는 연예인의 신변잡기에서 눈을 돌려 정보를 얻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는 인터넷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 시초는 정책적으로 이용된 스포츠신문에서, 아니 그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문제는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그것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용자의 욕구에 인터넷이 동한 것이냐 대중이 인터넷에 호도된 것이냐 하는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의 논쟁 전에 현실에 드러난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가의 의견은 곳곳에서 감탄사를 내뱉게 할 만큼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이런 논조가 책을 통해 출판되어 읽힌다는 사실에도 조금 놀랐다. 그만큼 TV, 게임, 인터넷, 영화 등의 매체가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바보상자로 대변되는 문화가 평가절하된 것이라는 것에 공감하고 그것의 순기능에 대해서 역시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것이 대세라고 해서 현상이 전복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같은 의미에서 작가의 의견에 동조한다고 해도 구태의연하리만치 산재한 문제들을 그것의 순기능으로 눈감아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매체들을 바보상자로 보는 고정관념을 깨는 작가의 과학적으로 보이는 주장 역시 뚜렷한 대책이 없는 이상론에 불과할 것이다.
바보상자를 버리자고 문화의 르네상스를 부르짖으며 바로잡으려 하는 노력은 고집스러운 향수병에 불과할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매체에 붙은 저속, 하위, 획일성 등의 시치미는 떼어버려야 한다. 이제 그것들을 떼어버렸다면 다시 한 번 지지부진한 고찰을 하도록 하자. ‘TV가 바보상자가 아닐까, 게임이 집중력 결핍을 낳고 있지 않은가, 인터넷이 개인의 삶을 침범하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의심과 함께 말이다.
크게 감복하고 그만큼의 반감을 갖기도 하면서 읽어나간 이 한권의 책이 그 길고 긴, 정답이 없는 전쟁을 종결짓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