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나다 - 첨단 패션과 유행의 탄생
조안 드잔 지음, 최은정 옮김 / 지안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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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소개팅이 있다. 뭉그적대다 나온 터라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에 간다. 그날따라 구두는 먼지가 끼어있다. 바지에 어울리지 않는 스니커즈를 신고 나올 수밖에 없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가는 내내 신발이 마음에 걸린다. 머릿속에는 얼마하지 않는 신발의 가격이 맴돌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자학(?)은 온 몸으로 치닫는다. 재킷도 바지도 셔츠도 손목에 찬 시계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날, 하루를 즐길 여력이 내겐 없다. 온종일 마음에 들지 않는 옷에 신경 쓰느라 노심초사 했을 뿐.

고가의 명품에 열광하는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우리는 어느 정도 스타일에 매어있는지도 모른다. 뉴스나 시사프로그램, 그리고 신문기사에 경쟁적으로 등장하는 과소비와 소비 자체가 파생하는 문제를 접하며 혀를 차지만 결국 그런 문제에 초연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비단 옷차림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유행하는 음악, 영화, 연극 등의 공연 관람 까지, 문화라는 것 자체가 스타일에 목을 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는 만큼은 보고자 하는 호기심의 속내에는 유행을 좇는 불나방의 본능이 숨어 있다.

여기서 소비행태에 따른 사회문제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아니 최소한 나는 ‘스타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TV를 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고가의 유럽산 수입가구의 가격 거품에 관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날 입은 옷차림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있는 개인감정에 까지 현대사회의 우리에게 ‘스타일’을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에 지배당한 기원은 언제부터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면 이 책, <스타일 나다>(지안. 2007)을 보자.

책에 소개된 여러 유행과 스타일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루이 14세’라는 인물과 ‘프랑스’라는 나라로 모든 것이 귀결된다. 그것을 모든 유행의 기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현재의 소비행태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 주요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그것에 대한 비판도 추종도 아닌 일정한 거리를 둔 역사기행 정도이기 때문이다. 조금은 과도한 프랑스 애찬이 섞인 거북한 역사기행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 명품 스타일하면 떠오르는 나라 중 1,2위를 다투는 프랑스라는 국가의 이미지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것이라는 작가의 지적 말이다. 프랑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국가의 수장에 의해 의도적으로 양성되고 국민들은 그를 추앙하는 것만큼 그 이미지가 보장하는 문화를 맹신한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정책적으로 키워진 문화가 300년 이상 소비되는 것이, 아니 그것이 문화 자체로 인식되는 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작가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순간 고개가 끄덕여진다. 적어도 루이 14와 그의 서포터즈의 의도가 일간 적중한 것처럼 보인다. 오로지 패션으로 귀결되는 소비문화와 삶의 방식을 그들이 간파한 것이던, 사치품으로 인한 무역의 누수를 막기 위한 미봉책이었던 그것이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그 시대의 정책을 마케팅이라 칭하는 것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책의 목차에 나열된 의복과 액세서리에서 주거 환경까지 고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준 철저한 마케팅의 소산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유럽이 자신의 사치를 위해 신세계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나라를 짓밟은 것과 같이 문화를 창조한다는 미명으로 소비를 부추기는 것 역시 문화적 침략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촌에 살면서 같은 문화를 소비하는 동시대인으로서의 삶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 가만은 그것이 한 국가의 마케팅의 소산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들이 아닌 우리는 적어도 우매한 소비자가 되는 것만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패셔니스트의 세상을 지탱하는 사회의 이면에는 역사 깊은 명품을 갖추기 위한 신용불량자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학부모의 주머니 사정을 이해한다며 등장한 학생복의 세계에도 엄연히 명품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것을 단순히 경제적 능력과 취향의 선택으로 봐준 다해도 이러한 소비문화가 과소비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마케팅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패배감을 안기며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미에 이런 뻔한 우려를 늘어놓는 것은 구차한 피해의식일지도 모른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을 가졌기에 패션이라는 명사가 달뜬 자신감과 세련됨을 가져다 준 기원을 찾는 이 책에도 뻔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시대적 자료와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고 패션을 해부한 이 책 <스타일 나다>가 과소비와 스타일,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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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의 역습 - 대중문화가 어떻게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었나?
스티븐 존슨 지음, 윤명지.김영상 옮김 / 비즈앤비즈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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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맨사 아이큐테스트가 이슈화되고 사무실에서도 그에 대한 반향이 일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행해진 20-40분간의 테스트가 잠시나마 서로에게 약간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져다주며 웃음을 유발한 것이다. 그 짧은 유희를 바라보는 내내 난 이 책을 생각했다.

<바보상자의 역습>(비즈앤비즈. 2006)의 작가가 내세우고 있는 근거 중 하나인 아이큐의 전반적인 상승의 맹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TV, 게임 등의 매체에 전폭적인 지지를 실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주말에 TV를 껴안고 살 것이냐 책에 코를 박고 살 것이냐 는 삶의 패턴의 문제이다. 정보와 가십의 경계가 점점 무너져가는 대중매체의 홍수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고지식하게 책을 들여다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문화의 질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의 삶의 방식에 달려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TV,게임 등의 매체의 옹호를 펼치는 주장에 아이큐를 들먹이면서 그 효용을 설파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아이의 싸움을 연상시킨다. 또한 그러한 장점(작가가 예시하고 있는)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폐해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굳이 예를 나열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어른들도 감당하지 못하는 급변하는 사회에 놀라운 적응력과 천재성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TV와 게임 등의 매체가 끼치는 영향은 참으로 대단하다. 때문에 작가의 주장이 전혀 그릇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의 말처럼 현재 문화의 주류가 된 바보상자의 문화를 하위문화로 폄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문화를 나누는 기준을 기존의 문화(독서를 통한 교육으로 대변되는)에 두고 TV, 영화, 게임, 인터넷 등의 문화를 판단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분명 두 문화는 차이가 있고 효용도 틀리기에 다른 기준에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에도 백분 동의한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달리 판단하는 것을 무조건적인 수용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구태의연한 바보상자에 대한 비판은 아직 버릴 수 없는 날이 선 칼일 수밖에 없다. 이제 그 오래된 칼로 지루한 바보상자 해부를 해보자.

1. 바보상자(폄하가 아닌, 작가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 매체를 총칭하는 의미에서)가 우리의 지능을 높여준다는 의견을 그에 쓰인 과학적인 근거를 뒤로 하고 사회적인 요인을 살펴본다면, 그것이 유행을 창출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잘 나가는 드라마나 게임 들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이제 대중문화의 뒷자리로 밀려나고 아예 대화에 끼지도 못하는 현실이니 조만간 TV,게임 등을 다루는 학원이 등장한 다해도 그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바보상자가 사회화 과정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는 판단은 위험하다. 그것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런 구조의 사회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이렇게 변했으니 따라오시죠! 하는 작가의 논조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가치를 무조건 과거의 문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시대가 상실한 것을 되짚어 보려고 하지 않고 시대의 조류를 타려는 작가의 의도는 비겁하게까지 여겨진다.

2. 작가의 위험한 논조의 맹점 중의 하나를 꼽자면 게임이라는 매체가 독서의 저변을 잠식하고 기존 교육의 기반에 위험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게임을 하지 않으면 대화와 관계에서 소외되며, 이에 그치지 않고 책 읽는 사람을 고루하고 거들먹거리는 인종으로 규정짓는데 게임이라는 똑똑한 매체가 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 역시 자신의 주장을 책으로 펴낸 만큼 책이 주는 특별한 이점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게임에 대한 평가절상을 이뤄, 큰 숲으로 둘을 같은 잣대에 올리지 말고 나무로서 존중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부모가 우려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그 공존의 숲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니, 불가능은 아니지만 시기상조임은 확실하다.
결국 작가는 책 읽는 문화가, 소위 기성의 엘리트의 문화가 기득권층이니 복잡한 연산능력을 키워주고 문제해결 능력을 고양시키는 게임의 순기능을 존중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믿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다르기에 각각의 잣대로 흑백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옳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두 매체가 공생관계에 놓일 것이냐 약육강식에 지배될 것이야 하는 것이다.―현재로서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적이라 생각한다.

3. 인터넷의 발달로 요즈음의 아이들은 부모가 잘 다루지 못하는 각종 최신 하드웨어와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또한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재분배와 속도의 혁명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이점이다. 하지만 이런 순기능 역시 맹신해서는 안 된다. 분명 공공연히 거론되는 문제점이 일부에 국한되고 노파심에 불과하여 인터넷의 특징적인 장점으로 그것을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확실한 것이 쓸모없는 정보에 대한 노출이다. 물론 정보의 옥석을 가리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니 그것을 그 매체 자체의 확대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려서 받아들이는 개인의 선택의 기회가 박탈당하고 있다.
어떤 포털 사이트를 방문에서 메인페이지에 뜨는 연예인의 신변잡기에서 눈을 돌려 정보를 얻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는 인터넷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 시초는 정책적으로 이용된 스포츠신문에서, 아니 그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문제는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그것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용자의 욕구에 인터넷이 동한 것이냐 대중이 인터넷에 호도된 것이냐 하는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의 논쟁 전에 현실에 드러난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가의 의견은 곳곳에서 감탄사를 내뱉게 할 만큼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이런 논조가 책을 통해 출판되어 읽힌다는 사실에도 조금 놀랐다. 그만큼 TV, 게임, 인터넷, 영화 등의 매체가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바보상자로 대변되는 문화가 평가절하된 것이라는 것에 공감하고 그것의 순기능에 대해서 역시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것이 대세라고 해서 현상이 전복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같은 의미에서 작가의 의견에 동조한다고 해도 구태의연하리만치 산재한 문제들을 그것의 순기능으로 눈감아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매체들을 바보상자로 보는 고정관념을 깨는 작가의 과학적으로 보이는 주장 역시 뚜렷한 대책이 없는 이상론에 불과할 것이다.

바보상자를 버리자고 문화의 르네상스를 부르짖으며 바로잡으려 하는 노력은 고집스러운 향수병에 불과할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매체에 붙은 저속, 하위, 획일성 등의 시치미는 떼어버려야 한다. 이제 그것들을 떼어버렸다면 다시 한 번 지지부진한 고찰을 하도록 하자. ‘TV가 바보상자가 아닐까, 게임이 집중력 결핍을 낳고 있지 않은가, 인터넷이 개인의 삶을 침범하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의심과 함께 말이다.
크게 감복하고 그만큼의 반감을 갖기도 하면서 읽어나간 이 한권의 책이 그 길고 긴, 정답이 없는 전쟁을 종결짓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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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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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르헤스에 대한 오마주인가. 교묘한 장치인가.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웅진지식하우스. 2007)의 첫 장을 읽는 동안 혼란스러움에 힘겨웠다. 난해한 단어의 나열이 아님에도, 편지의 형식을 빌린 따라가기 쉬어 보이는 템포에도 불구하고 독해가 결코 녹녹치 않았던 것은 내 얕은 문학적 소양 때문일까 아니면 작가의 언어적 시비일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도 책의 무게는 묵직하게 느껴졌다.

초반의 혼란스러움을 조장하는 것은 ‘보르헤스’에 대한 두려운 선입견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시종일관 언급되는 ‘애드거 앨런 포우’의 이름 역시 머리를 무겁게 하는데 일조한다. 그뿐이 아니다. 소설 속에 언급되는 많은 작가의 이름의 태반이 생소하다. 이쯤 되면 작가의 글이 시비처럼 느껴지는 것이 결코 억지는 아닐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 보다 많은 작가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으면 즐길 수 없는 것인가’ 하고 반쯤 포기한 상태로 읽기 시작한 것도 작가의 의도를 시비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에 독자의 추리가 기본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이 공평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글의 전개에 숨겨있는 해답의 꼬리가 낯선 작가들의 작품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명탐정으로(혹은 ‘양들의 침묵’에서의 ‘한니발’같은 존재)로 등장한 ‘보르헤스’가 용의자 또는 참고인의 자격으로 불러내는 것은 여러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혹은 등장 동물, 소재, 개념까지)이다. 보통의 추리소설에서는 드문 일이다. 물론 명장으로 꼽히는 작가와 명작으로 꼽히는 그들의 소설이 극의 모티브가 되거나 단서가 되는 일은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이 소설의 그것은 그들 자체가 극을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며 독자에게 불공평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아니, 그 작품들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추리의 과정이 그리 녹녹치는 않은 것을 보면 소위 문학적 엘리트를 위한 유희인가 하는 반감마저 들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 재미가 있다. 뭉그적댐 없이 경쾌한 템포로 몰입시키는 매력이 있고, 억지웃음의 장치가 없음에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묘한 재치가 있다. 자존심이 상해 생긴 반감으로 읽었음에도 끝에 가서 허벅지를 내리치는 통쾌한 반전도 있다. ‘다 빈치 코드’에서 나왔을 법한 음모론의 냄새도 풍기는 이 소설은 일흔 살의 작가가 고집스럽게 펼쳐낸 엘리트 소설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유행에 민감한 대중소설로도 손색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소설의 주가 되는 사건은 ‘밀실살인’이다. 그 살인의 저변에는 다소 의심스러운 단체와 역사적인 사건의 흔적이 있고, 범죄의 주체가 되는 인간의 본성과 한이 있다. 이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다소 어려운 작품과 작가들로 가득 차 있지만 탄탄한 이야기의 틀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이 소설이 잘 짜인 추리소설로 손색이 없는 점이다. 사건과 인물, 그리고 그것을 연결해주는 배경에 의한 탄탄한 틀 위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말이다.

또한, 이 소설은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재치가 있다. ‘보르헤스’와 화자가 주고받는 농담의 소재가 낯선 작품 속의 밑줄 긋기인지라 그로 인한 웃음의 타이밍은 잡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등장인물의 면면에 대한 묘사와 무엇보다도 그것을 확연히 드러내는 대화를 읽다보면 실로 웃음이 나온다. 억지웃음의 장치라고 폄하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사건과 이미지로 웃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식상하게 느껴졌다면 이 소설에서 상쾌한 웃음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미 고전으로 평가받는 소설에서 틀을 갖춘 ‘밀실살인’이라는 소재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거장들에 대한 오마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피카소’의 등장으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미술은 죽었다고 평가한 후대 미술가들의 탄식처럼 추리소설 역시 ‘애드거 앨런 포우’나 ‘보르헤스’ 등의 거장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쳇바퀴 돌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의 추리소설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가치가 있다. 지금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질 시대상을 담아내며 빠르게 변하는 문화의 배경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흔의 이 고집스러운 작가의 자존심은 전혀 다른 방향의 글을 탄생시켰다. 거장에 대한 오마주가 난무하지만 전혀 비굴하지 않는 그만의 특이한 소설을 내놓은 것이다.
작가가 살고 있는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주는 생경한 풍경과 브라질 하면 떠오르는 열정적이고 빠른 삼바 리듬에 휩싸이며 읽은 괴짜 노인의 이 소설은 그런 이유로 즐겁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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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편지 - 사드에서 피카소까지
D.A.F. 사드 외 지음, 이혜리 옮김 / 다빈치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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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사가에 의한 흔적으로 좇을 수밖에 없는 대가들의 삶이 안타깝다면 그들이 남긴 그림이나 책을 통해 나름대로의 복원 과정을 거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것에는 말 그대로 후대의 솜씨가 더해진 것으로 그림자의 윤곽이 아닌 빛에 비친 이목구비를 오목조목 뜯어보고자 하는 우리의 갈증을 완전히 풀어주지는 못한다. 물론 그런 일련의 과정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진정한 원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족발집의 지루한 싸움처럼 예술적 가치를 시간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에 말이다. 이러한 의미와는 별개로, 우리의 풀리지 않는 갈증은 어쩌면 그들이 그 오랜 시간 전에 존재했던 것처럼 현재에도 거리감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외 유명한 미술관을 굳이 찾아가 그 실체를 확인하고 작가의 생가를 찾아 여행일정을 꾸리기도 하는 것 역시 바로 그런 이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개인마다 대가들의 작품에서 얻는 감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좀 더 다가서고자 하는 욕구는 프레타포르테의 무대 위에 있는 것이다.

스타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확인하고자 새벽걸음, 방송국 앞, 숙소 앞 철야도 마다하지 않는 팬클럽의 그들처럼 나 역시 대가들의 모습을 보고자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일이 여의치 않다. 필수적인 문제인 시간과 돈의 제약이 그렇고, 높은 언어의 장벽 역시 말 그대로의 높다 높은 벽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아쉬워하는 게으른 나에게, 이 책 <그림편지>(다빈치. 2004)가 큰 위안이 된다.

편집자에게 전하는 작가의 변, 친구에게 건네는 다소 장난기어린 안부에서 소중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 까지, 이 한권의 책에 담기에는 벅찬 많은 인물들의 등장만큼 그 편지의 내용 또한 다채롭다. 다채롭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짧은 편지로나마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대가들의 인간관계와 그 당시의 사회상을 엿보고, 짤막한 글에는 묻어난 그들의 성격으로 그동안 상상해 왔던 모습에 살을 붙여가는 것이다.
그 와중에 흥미로운 것은 그림편지에는 작가들의 그림과 화가들의 글이다. 예술가라는 공통분모 위에 앉은 분자의 그들이지만 미술가가 쓴 글이나 작가가 그린 그림은 선뜻 상상이 가지 않는다. 때문에 궁금하다. 또한, 그 두 갈래의 예술적 소양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실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반가운 것은 머릿속으로 환율계산이 안될 만큼 엄청난 가격이 매겨진 그들의 작품만큼 멀게만 느껴지는 거장들을 약간 미숙한 그들의 그림과 글로 평범한 내 곁에 붙잡아 앉힐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물론 화가로서의 재능이 만만치 않은 작가와 그 반대가 성립되는 화가가 대부분이다.)

편지와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이 주는 느낌은 구겨진 종이더미와 찢겨진 캔버스 위에서 탄생한 그들의 글과 그림이 주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편지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그들은 자유롭다. 편지의 대상이 답장이 뜸한 친구라면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애정 어린 충고를 담기도 하며, 연인이나 가족에게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갱의 편지에는 그의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그의 예술적 성과의 탄생 과정을 엿볼 수도 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지금에까지 남겨진 대가들의 그림과 글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그들의 사사로운 감정의 흐름을 구태여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 감동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이 그들을 후대에서도 추앙받는 거장으로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것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그들의 존재를 사적인 자취로 파고들어가는 것은 과거의 망령을 좇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희비가 엇갈리는 팬들처럼 나 역시 그들의 팬이기에 조금 더 가까이 가고자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편지를 들춰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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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의 소리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3
이시다 이라 지음, 김성기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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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소설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이면을 담고 있다. 범죄라는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허락된 일과 그렇지 않을 것의 구분이 모호한 현대사회에서 그 무거움을 더해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재미, 즉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책을 잡은 손의 자세를 바꾸지 못하게 하는 재미를 가진 추리물이 주는 이미지는 다소 가볍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런데 요즘의 작품들을 읽으면 그것이 타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다루고 있는 사건은 점점 복잡하게 꼬이고 그 속의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는 극의 긴장감을 좇다보면 피로감을 느낄 정도의 잘 짜인 구성이 있고 묵직한 생각할 거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발목정도는 적실 함정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근래의(이전의 것들 역시) 추리소설이 다루는 무거운 사회문제와 다양한 인간 군상간의 갈등의 전개는 분명 환영할만한 일이다. 아니, 양손을 치켜든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런 장점이 추리소설의 또 다른 매력. 즉, 한여름 더위를 식혀줄 흥미진진함이라는 시쳇말의 비유가 나타내는 조금 가벼운듯한 재미를 반감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시다 이라는 그런 면에서 무거운 주제와 가벼운 재미의 절충선을 알고 있는듯하다.

어른이 되어서 - 이 말이 조금 우습지만 -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못 볼 걸 많이 본다. 봐야한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더 이상 TV에 나오는 성적인 장면에 부모님이 채널을 돌려주지 않는다.(물론 그것이 못 볼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인지도) 이 말은 고개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책임감이라 하기엔 조금 우습지만 어쩔 수 없이 봐야하는 것, 참아야하는 것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을 직시하는 행동과 ‘용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도리어 알면 알수록 패배감에 사로잡힐 뿐 피터팬의 용기는 가당치도 않다.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의 피터팬들은 ‘피터팬 증후군’의 그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어른이라는 어색한 이름이 주는 책임감을 외면한 비겁함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다소 무거운 주제, 사회의 이면에서 들끓고 있는 구정물의 아우성이 그들의 손을 거쳐 경쾌한 파도를 파는 이유는 바로 이런 피터팬의 경쾌함에 있다. 그리고 이 경쾌함은 즐겁게 쓸 줄 아는 작가, 이시다 이라를 통해 힘을 얻는다.

이케부쿠로의 공원을 둘러싼 문제들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기성세대에 의해 파생된 문제와 그것을 외면하거나 더 키워나가는 그들의 자녀세대는 공원을 무대로 서로 부딪히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이케부쿠로의 아이들은 이런 문제를 만들고 또, 그대로 방치하는 어른들이야 말로 회생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거리를 아니, 최소한 이 거리의 아이들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바로 피터팬, 그들 자신이다.

피터팬이 휘두르는 칼에 잔인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진 동심 때문이다. 그 동심을 이케부쿠로의 어른아이들에게는 우정이라 부를 수 있다. 물론 밤거리의 황태자라든가 야쿠자의 유망주라는 명패를 가진 그들에게 동심이라는 말이 가당치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인 잣대에서 벗어나 ‘우정’ 그 자체만으로 서로의 일에 발 벗고 나서는 것은 어른들의 의리와는 다른, 오히려 아이의 동심에 가까운 순수한 면이 있다. 아이라고 할 수도, 어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한 나이의 그들의 동심은 그렇기 때문에 잔인하기도 하고 무책임하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거리의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합리화되는 것일 뿐, 그들의 행동은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의 발로여서 타인의 기준에서 보면 그들 역시 거리를 더럽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단적인 예로, ‘서 1번가의 테이크 아웃’에서의 그들의 정의는 그 반대편의 사람들에게는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지키는 것은 순수하리만치 솔직한, 지극히 이기적인 그들 자신에 한정되는 것이다.(이것을 그들 자신도 알고 있다.)

거리의 정의를 판단하는 것이 누구의 기준인가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이 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이시다 이라가 짤막한 이야기를 통해 이 거리의 이야기를 경쾌하게 그려내며 그 속의 아이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모험의 참 맛을 살릴 수 있는 힘이 바로 그런 ‘외면하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케부쿠로를 지키려고 그들이 사회의 또 다른 입장을 외면한 것처럼 우리가 이 소설을 백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뻣뻣한 문제의식을 외면하고 소년들의 경쾌한 템포에 발맞추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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