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추정경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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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휴가를 영월과 정선에 갔다 왔다. 휴가 1일차 영월 ‘장릉보리밥’으로 출발했다. 집에서 세 시간 정도 가야하기 때문에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보리밥에 묵과 감자전을 먹고 ‘장릉’을 이동했다. 한 낯의 온도가 무려 35도를 넘었기에 한 손에는 양산을 다른 손에는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장릉 일대를 구경했다. 두 번째 방문지는 ‘청령포’로 단종 유배지였다. 십 미터도 안 되는 좁은 강폭을 뗏목을 연상케 하는 작은 배를 타고 건넜다. 짧은 시간에 한 바퀴 둘러보고 이곳이 단종 유배지라는 흔적만 남긴 채 다음 목적지인 ‘젊은잘와이파크’로 이동했다. 여기까지 따라와 준 것에 대한 답례로 성인이 된 두 딸들을 위해서였다. 사진을 찍으며 마냥 즐거워하는 두 딸을 보면서 뿌듯했다.


저녁은 태백으로 가서 한우를 먹기로 했다. 그 후 예약해 놓은 정선에 있는 호텔에서 짐을 풀고 카지노를 방문하기로 했다. 고기를 실컷 먹고 배를 채운 후 다시 정선으로 복귀해야 했다. 동선을 미리 알아보지 않은 탓에 길바닥에서 흘려보낸 시간이 제법 됐다. 우선 호텔에서 씻은 후 카지노를 가려고 했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당일예약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실망하는 딸들의 눈초리를 뒤로한 채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를 먹으며 올림픽을 구경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날이 되자 카지노는 물 건너갔음을 직감했다. 아내의 일정 때문에 카지노 오픈시간이 너무 늦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마지막 코스로 잡은 화암동굴로 직행했다. 동굴 안 온도는 바깥온도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냉기를 뿜어대며 우리 가족을 반겼다. 동굴 끝에 다다르자 냉기가 열기로 바뀌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집으로 오는 길에 과거 강원랜드에서 일했던 생각이 떠오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우연이 두 딸과 함께한 가족여행이 된 것도 그렇고. 강원도 지역이 코로나19 4단계 방역조치가 내려져서 갈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무사히 귀가를 해서 다행이었다.


정선 사북의 정취는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애들 잠옷을 사러 호텔 밖으로 나갔는데, 시가지의 풍경이 단조로운 불빛과 함께 을씨년스럽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에 세워있는 차들을 볼 때는, 저건 전당포에 저당 잡힌 차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휘황찬란한 카지노 분위기와는 다른,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길거리에 많은 차가 세워진 이유를. 그리고 호텔에서 묵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은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포트’라는 능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정상과 비정상, 합법과 불법이 복잡하게 얽힌 곳이면서 인간의 욕망이 꿈틀대는 곳이기도 하다.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으로 SF와 한국풍 누아르가 절묘하게 조합된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의 세계에서 초능력은 재능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주인공 진을 기어이 죽이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은 각자 재능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재능을 억눌러 운명을 바꾸려는 자, 재능에 기만당한 자, 재능에 중독된 자, 재능을 경계하지만 받아들이는 자…. 강력한 힘이 될 수 있기에 모두가 갈망하는 것이 재능이지만, 거기 휘둘릴 때의 우리는 오히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놓칠 수 있다. 수많은 유명인의 삶에서 무수히 보아왔듯 말이다.


대박을 노리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곳에서 함께 기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극적이면서 생동감 있게 전개된다. 몰입해서 읽을 수 있도록 재미있는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숨은 욕망이 분출하면서 천당과 지옥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사뭇 인생사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집중해서 읽으면 반나절이면 충분하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세상과 맞서며 자기 삶에서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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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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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발적이면서 막연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힘없고 가녀린 그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펠리시아는 연고도 없는 낯선 곳으로, 길을 나선다. 뱃속 아기의 아빠이자 그녀의 애인인 한 남자를 정확한 정보도 없이 공장 주소 하나에 의지한 채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그를 찾아 나선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그녀는 무슨 용기가 있어 그 무모한 여정을 떠나게 되었을까. 아기를 배자 부모의 갖은 언어폭력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시달렸고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가족으로부터의 핍박은 그녀의 선택을 외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을 것이고, 얼마 안 되는 여비를 챙겨 그녀는 집을 나서게 된다.

 

누가 봐도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막달은 골목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자문해본다. 인생의 모험을 건 펠리시아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힐다치 씨라는 의문투성이면서 결말에 가야 그의 본성이 드러나는데, 왜 하필 그곳에서, 유일한 희망인 주소 지에 있는 공장에서 그와 맞닥뜨리게 된단 말인가. 힐다치 씨는 그의 본성을 숨긴 채 그녀에게 다가간다. 겉으로는 선하게 행동하면서, 주위의 이목에 신경 쓰면서. 하지만 그의 음흉한 생각(유혹, 편집적인 사랑, 엽기살인 등)이 전신을 관통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중간부터는 펠리시아 보다 힐다치 씨의 얘기가 더 많이 나오는데, 오락가락하는 그의 정신착란에 깜박 시선을 놓칠 수 있으니 이점 유의하며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길 바란다.

 

이 소설의 저자는 어느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선은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을 끔찍할 정도로 가까이에서 접한 후에야 눈에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악이란 힐다치 씨를 말한다. 결말에 도달하면 그의 엽기적인 행보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난다. 그의 유혹을 뿌리치고 도망쳐 달아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집으로 돌아갈 돈이 없다. 수중에 아무것도 없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걸인이 될 수밖에 없다.

 

운명의 장난은 이 정도로 참혹한 것이다. 아기를 밴 상태에서 남자친구를 찾아 나선 그녀에게 더 가혹한 채찍질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좋지 않은 일은 겹치면서 온다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그녀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참혹한 경험을 통해 삶의 이면에 있는 통찰을 얻는다. 이 소설의 결말에 도달하면 불교의 자비와 해탈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힐다치 씨는 결국 죽게 된다. 하지만 그의 못된 짓과는 상관없이 펠리시아는 그를 용서한다. 그리고 현실(옛 애인의 배신과 아기를 잃은 상실)에 처한 상황까지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선이 악을 이기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한없이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해답은 책 끝에 도달하면 알게 될 것이다. 선은 선을 통해서 오게 된다. 그러한 선이 그녀의 마음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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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위의 남자
다니엘 켈만 지음, 박종대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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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비웃는 풍자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필요하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냥 웃을 일만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더 이상 반복적인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 된지 오래다. 서로 가지고 있는 생각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오늘도 계속 벌어지고 있으니 경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이 책은 이러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대의 권력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비운의 풍운아라는 말이 있다. 딱 이 말에 어울리는 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틸이 것이다. 틸은 전쟁과 전염병이 휘몰아친 절망의 시대, 가장 밑바닥에서 누구보다 거침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인물 ‘틸’의 생애를 따라가는 거대한 모험기다. 권력자의 위선에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눈앞에서 경험한 틸은 안락한 삶을 내려놓고 평생을 떠도는 위험천만한 광대의 삶을 선택한다. 황제를 머저리라고 부를 수 있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크게 세상을 비웃을 수 있는 공중의 제왕 틸의 이야기는 암울한 세상에 던지는 농담이자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 수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이 시대의 안부다.


틸은 권력 투쟁의 장이 된 30년 전쟁에서 소모품처럼 희생된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는 14세기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인물 틸 울렌슈피겔이다. 중세 독일의 민담으로 전해 오는 악동이자 어릿광대인 울렌슈피겔은 온갖 장난으로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성직자나 권력층을 조롱하는 캐릭터다. 악마처럼 무모하고 예수처럼 사심 없는 자, 안락한 삶을 내주고 자유를 얻은 예술가 틸은 권력투쟁의 장 속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희생된 수많은 민중을 대신해 강인한 생명력으로 끈질기게 삶을 이어간다.


이 책의 저자는 틸이라는 인물의 시선을 통해 전쟁과 질병, 기아 속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과 절망을 세심하게 포착해낸다. 또한 거대한 역사 앞에서 드러나는, 권력과 지위를 가진 자들-교황과 왕, 제후와 성직자-의 어리석음과 유약함을 한껏 비웃는다. 이것이 다름 아닌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과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종교 갈등은 멈추지 않았고, 계급 또한 타파되지 못했으며, 극단주의나 배타주의 또한 극성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또한 당시 페스트가 기승을 부렸듯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었다. 종교와 전쟁, 배타주의로 분열된 유럽의 이 잔혹한 이야기는 거울처럼 지금 우리 시대를 비춘다.


“남들이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억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고, 우리는 산 자들의 일에 무심하지 않다. 모든 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시대의 아픔(불평등, 젠더, 빈부의 격차 등)을 떠안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민중을 해방시킬 자가 생겨난다. 틸처럼 어떤 영웅을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젠 나 자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할 때다. 즉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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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과 창조 - 서울대 김세직 교수의 새로운 한국 경제학 강의
김세직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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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는 현명한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살면서 우린 그 실체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100점이 만점이라면 우린 몇 점에 해당할까.


존리는 한국이나 일본이 금융문맹 율이 높은 나라에 속한다고 한다. 아파트와 같은 부동산에 목을 매고 있기 때문이다. 주식에 투자해서 동산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한다. 또한 IRP나 연금저축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해주면 반응이 썩 좋지 않게 돌아온다. 그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다른 사람의 말을 경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경제학의 빈약한 지식과 경제용어의 난해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금융문맹 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지름길이 아닐까싶다.


『모방과 창조』는 경제학을 처음 접해보는 사람부터 한국경제사에 관심 있는 독자, 합리적 투자 결정을 내리고 싶은 독자 등 경제학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책을 통해 경제학의 핵심 이론들을 습득할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쓰였다. 한국경제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60년의 한국 경제와 미래의 한국 경제를 오가며 대한민국 경제의 역사적 측면에 주목하며 읽을 수 있다. 경제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경제학의 핵심 이론들을 습득하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고, 경제활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쉽고 친숙하게 익힌 경제학을 합리적 투자 결정에 이용할 수 있다. 경제학 이론들이 나온 배경부터, 우리 삶과의 연관성, 그리고 경제학 이론을 만든 경제학자들의 일부 에피소드까지 담으며, 경제학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무미건조한 원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들이 만들어낸 ‘지혜’에 가깝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좋은 일자리가 점점 사라지면서 취업이 점점 어려워지고, 많은 근로자들이 소득이 낮은 일자리로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소득취약계층의 경제적 어려움이 크게 가중되어 소득 분배 문제가 심각해지는 현상의 원인도 바로 5년 1% 하락의 법칙에 따른 성장 추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우리나라 경제가 ?1% 역 성장했지만, 그 근본적 원인은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다. 추세장기성장률이 이미 1% 중반까지 하락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단기적 충격만 가해져도 마이너스 성장의 위기에 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모방에서 창조로 가는 전략적 해결책’이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대전환, 세금 정책 개편, 교육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근로 현장의 개혁, 새로운 시대를 이끌 리더의 자질 등 개인, 기업, 국가 차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거시적 통찰을 제시한다. 경제의 흐름, 현재 정책의 허점, 성공담과 실패담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다음 우리가 취해야 할 전략적 비책을 제안하며 알 수 없는 미래를 헤쳐 갈 등불을 밝혀준다.


이제 우리는 ‘모방형 자본주의’에서 ‘창조형 자본주의’로 가는 갈림길에 서 있다. 경제 하락에서 벗어날 타개책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내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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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언어의 탄생 - 영어의 역사, 그리고 세상 모든 언어에 관하여
빌 브라이슨 지음, 박중서 옮김 / 유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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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영어영문과를 지원했지만 아쉽게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과 출신인 나는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삼십년 째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IT관련 일이다. 영어영문과를 떨어진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만약 그때 영어영문과를 들어갔다면 인생의 판로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자못 궁금한 정도랄까.


우리는 자신의 근원이 무엇인지 찾고 싶을 때가 있다. 난 어학이나 문학 쪽이 아니었나 싶다. 당연히 영어에도 관심이 많아 번역 일에 도전해볼까 잠시 주춤하기도 했던 적이 있다. 하나를 더 말하자면 소설과 글쓰기다. 십년 넘게 여기에 매료되어 언젠가는 꼭 책(소설)을 쓸 거야, 하는 목표는 아직도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한 채 살고 있다. 실천을 못하는 것은 나의 게으름이 동반한 핑계일 수도 있다. 아직 그 시기가 오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어떤 계기가 오지 않은 탓을 은근슬쩍 차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느긋한 마음을 먹는 이유는 어차피 인생은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지만, 좀 게으르다고 해서 큰일 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하면 되는 거니까. 인생은 기니까. 이놈의 게으름이란.


삼십년 전으로 돌아가서 이 책을 봤더라면 어쩌면 원래 하고 싶은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쓸모없는 짓이라고 질책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지만 나의 마음의 고향이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아무튼 지금부터라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진짜?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이 책의 힘을 빌려 한 번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당장 할 수는 없고, 그건 용기가 없어서 어떤 계기가 필요한데, 성큼 그 놈을 때려잡기라도 할라치면 저만치 도망가니 이를 어쩐다? 포기는 금물이므로 이 두꺼운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갈 수밖에. 읽다보니 벌써 많은 페이지를 넘겼고 조금 있으면 목표지점에 도달할 날이 올 것이므로 더 힘을 내서 영어 완전 정복이 오는 그 날까지 파이팅하자.


“언어란 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유행이며 용법과 철자와 발음의 문제는 마치 옷단의 공그른 선처럼 이리저리 탈선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은 그것이 더 쉽고 더 이치에 맞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문장이 뒤통수를 한 대 걷어차고 지나간다. 왜 이걸 진작 몰랐을까?


그리고 살아남은 영어의 역사를 빌 브라이슨과 쫓다 보면 2000여 개의 단어를 창조한 언어 천재 셰익스피어, 인터넷은커녕 주변에 도서관도 하나 없는 상황에서 4만 3000개의 단어를 정의하고, 11만 4000개의 예문을 덧붙여 1775년에 《영어 사전》을 편찬한 새뮤얼 존슨, 40년에 걸쳐 1만 5000여쪽에 달하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 책임자였던 은행 출신의 독학 언어학자 제임스 어거스틴 헨리 머리 같은 인물들뿐만 아니라 단어를 잘못 해석하여 역사가 바뀌었을 만한 결정적 사건들도 마주하게 된다. 또한 빌 브라이슨은 단어, 철자법, 발음 같은 기본 요소부터 방대한 단어의 정의를 담아낸 사전 편찬자들의 이야기,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욕적인 욕설의 특성, 그리고 한때 사람들에게 앉아서 하는 오락 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십자말풀이 같은 말놀이에 이르기까지 언어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이제껏 몰랐던 영어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읽다보면 영어단어 하나 외우려고 안간힘을 썼던 지난날의 고통의 시간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귀중한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책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걸. 그리고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한 내가 잘 못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원래 목표를 언젠가는 꼭 이루리라는 걸. 이 책을 읽고 못 이룬 영어에 도전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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